387화. 미궁의 수문장 (2)
살라맨더.
불의 정령수인 도마뱀은 호전적이기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소속된 살라맨더는 격이 달랐다.
화르륵!
입가에 넘실거리는 붉은 불꽃.
뜨거운 겁화가 공기를 불태웠다.
"캬오오오!"
살라맨더가 거칠게 포효했다.
마치, 드래곤의 피어를 맨몸으로 맞은 것 같은 공포가 전신을 엄습했다.
저건 정령수가 아니다.
불의 정령의 형상을 한…… 드래곤이지.
적어도, 불의 석상에 의해 소환된 살라맨더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캬오. 뭐냐, 저 괴물은?"
"사, 상급 정령수인가?"
"여기에 계약한 불의 정령들은 우리가 전부인 걸로 알았는데……."
"무……서워."
시험을 담당하던 살라맨더들이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자신들보다 족히 몇 배는 강력한 존재가 튀어 나왔으니 당연히 공포에 질릴 수밖에.
물론, 상대가 동족만 아니었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달려들었을 것이다.
워낙에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게 불의 정령이 가진 특성이었으니까.
하지만, 하필이면 그 상대가 같은 살라맨더, 그것도 상위 종에 위치한 놈일 줄이야.
당황한 건 시험을 낸 불의 석상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정령수를 다룰 줄 아는 인간이라고?"
"게다가…… 꽤나 고위급이잖아?"
"정령사라니. 제국에서도 만나 본 적 없었는데."
석상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다들 놀라는 걸 보니, 역시 든든하게 정령수들을 키운 보람이 느껴졌다.
쓰담쓰담.
진혁이 살라맨더의 머리를 토닥였다.
'하긴, 내가 이 녀석들을 애정과 사랑으로 키우긴 했지.'
그래서 그런가?
유독 성장이 눈에 띄는 것 같긴 하다.
"주, 주인,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야?"
"내가 지금 시험인지 뭔지를 치르는 중인데, 저 녀석들의 복종을 받아내야 하거든. 근데, 아무리 그래도 평화주의자인 내가 폭력을 휘두르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 그렇지. 주인은 평화를 사랑하니까."
"그러니, 네가 알아서 쟤네들 설득 좀 해 봐."
"설득? 내가? 뭘 어떻게?"
"야이……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돼?"
"히이익. 미안해. 잘못했어."
살라맨더가 조그마한 두 손을 들어 머리를 보호하는 시늉을 했다.
누가 보면 진짜로 때리려고 하는 줄 알겠네.
"그 왜. 우리 회사가 얼마나 직원 복지가 좋은지. 네가 얼마나 대우를 잘 받고 있는지. 그런 걸로 좀 꼬셔 봐. 있는 그대로를 말하면 되니 말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자발적인 회유야말로 최선의 선택일 터.
진혁은 동족인 살라맨더를 통해 불의 시험을 통과할 생각이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주인이 날 죽이겠지. 절대 죽어도. 사실대로 말할 순 없어.'
살기 위해선 때로 거짓말을 해야 하는 법.
'무조건 내가 처한 상황과 정반대로 말하면 될 거야.'
대업을 떠맡은 살라맨더가 몰려 있는 정령수들 앞에 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다들 계약을 맺고 이런 곳까지 와서 고생이 많아. 열악한 조건에, 맛있는 불은 쥐꼬리만큼 주지. 게다가 노동 시간은 또 뭐야?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하지 너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뭐, 척하면 척이지. 또 보자. 계약 조건에 연중무휴라고 되어 있을 테고. 낮이든 밤이든 계약자가 원하면 바로바로 튀어나와야 할 테지. 그 외에도 열악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있을 거야."
"……!?"
"정…… 정확해."
"저거 어제 내 하루 일과였어!"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자신들의 고충을 정확하게 이해하냐고 물으면서.
"나도 처음엔 그런 악덕 계약자와 계약을 맺었거든. 그때 정말로 고생 많이 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천국에 있게 됐지."
고인물 코퍼레이션은 다르다.
"그럼, 주인이 얼마나 잘…… 잘…… 후우. 잘해 주는데. 봐. 나도 잘 먹고 잘 자서 이렇게 성장했잖아."
풍부한 마력과 휴식 제공. 든든한 동료들의 지원까지.
함께 한다면 정년은 물론, 노후와 사후까지 보장된다.
통통하게 부른 배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불꽃을 보자니, 묘하게 신빙성을 더했다.
"진짜 좋아?"
"그렇게?"
"우리도 먹을 것도 마음껏 먹고 하급 정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살라맨더들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크으윽! 지금 뭣들 하는 거냐! 우리가 한 계약을 잊지 마라. 너희들은 우리 미궁주님과 계약이 되어 있는 거란 말이다!"
불의 석상이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살라맨더들에게 그런 잔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나, 나나나! 나 갈래!"
"나부터야!"
"당장 이따위 계약 때려치우겠어!"
정령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항복을 외쳤다.
[불의 정령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수의 살라맨더들이 당신에게 높은 호감을 보입니다.]
['불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좋아. 아주 수월하군."
진혁이 생긋 웃었다.
평소에 행실이 좋은 덕에, 정말로 손쉽게 일이 풀렸다.
"이렇게 허무하게……."
"제법이군."
"됐다. 어차피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을 뿐. 내 선에서 끝내도록 하지. 이번에 행운 따위는 없을 거다."
물의 석상이 나섰다.
우우우웅!
회오리치는 물보라와 함께 이번에는 더 많은 수의 물의 정령들이 나타났다.
살라맨더들보다도 더 크고 강력한 마력을 지닌 상위종들로.
"후후! 물과 불은 서로 상극. 이번에는 아무리 입을 털어 봐야 소용없을 거다."
분명, 시험을 치르는 이들 중 정령사가 끼어 있는 건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상극의 정령수들 앞에선 제아무리 중급 이상의 정령수라고 하더라도 당해내지 못할 테니까.
"단숨에 끝내 주마. 인간 애송이."
물의 석상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운디네. 나와."
……이어지는 말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
테이머들 중에서도 극소수만 전직할 수 있는 게 바로 정령사이다.
재능이 있는 자들이 모이고 소위 천재라 부르는 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뽐냈지만…….
정령사로 나아갈 수 있는 이는 모래 한 줌도 채 되지 않았다.
실제로 오랜 세월 탑에서 거주하던 이들조차 정령사로 살아가는 건 채 100명도 되질 않았으니까.
그리고 뛰어난 정령사들마저 중급 이상의 정령수 2마리와 동시에 계약하는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세 마리 이상은 역사에 남길 정도로 극소수였고.
그런데.
대체 저 터무니없는 놈은 무엇이란 말이냐?
무려 다섯 마리의 정령수.
그것도 전원이 중급 이상으로 구성된 괴물들이다.
때문에, 시험을 위해 애써 준비한 정령수들이 모조리 상대에게 넘어갔다
"무, 무슨 이런……말도 안 되는 일이……."
"5대 원소의 정령수를 전부 품을 수 있는 자가 존재할 줄이야."
"신격도 아니고…… 최소한 상층부에서나 있을 만한 랭커다."
석상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 대충 시험은 다 통과한 것 같은데, 슬슬 저항석을 넘기는 게 어때?"
진혁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래. 시험에 통과했으니, 그대는 이걸 가질 자격이 된다."
툭.
투욱.
석상의 목에 걸려 있던 굵직한 저항석들이 뽑혀 나왔다.
좋아.
이걸로 보스한테 가는 최소한의 조건은 갖췄다.
덤으로 든든한 꼬맹이 정령수들도 잔뜩 손에 넣었고.
'이미 염혼의 낙인으로 계약까지 끝내 뒀으니,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겠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들을 보자니 조금 양심에 찔리는 것도 같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은 잡아먹히는 쪽과 잡아먹는 쪽. 오직 두 개밖에 존재하질 않는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이번 기회에 알게 됐으니, 수업료 치곤 싸게 먹힌 셈이지.'
암. 이건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사회의 쓴맛이 어떤 건지 알려준 거다.
절대로 착취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진혁이 자리를 뜨기 전 갑자기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아. 맞다. 깜빡할 뻔했네."
"깜빡하다니, 뭘 말이냐?"
"우리가 이대로 가면, 너희는 쪼르르 달려가서 미궁의 주인 놈에게 저항석을 전부 뺏겼다고 보고할 거 아니야?"
"뭐……?"
"그렇잖아. 이쪽의 정보를 죄다 일러바칠 텐데, 그 위험성을 내가 꼭 감수해야 하나?"
리스크는 줄이는 게 상책인 법이다.
목격자가 없으면, 쓸데없는 말이 새어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설마, 우리를 죽이겠다는 건가?"
"불경한! 우리는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존재들이다. 관리자와 마찬가지로 미궁을 조율하는 법칙 그 자체란 말이다!"
"게다가. 그깟 무기로는 어림도 없어."
그래. 그렇겠지.
바너드로는 놈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스윽.
공간이 갈라지며, 무지막지한 크기의 대검이 튀어나왔다.
발뭉.
용을 베어버린 성유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하지만, 이번 레이드는 비밀 유지가 철칙이라서."
이걸 다루는 데 드는 마력이 만만치 않겠지만, 이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어."
그저 탑을 오르는 데 필요한 행동을 할 뿐.
진혁이 양손으로 잡은 대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으아아악!"
"머, 멈춰!"
석상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사정없이 내리꽂힌 발뭉이 석상들의 머리를 통째로 박살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파편 속.
진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마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하겠다고 다짐하듯이.
***
콸콸콸…….
황금빛을 띤 샘물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곳엔 수련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연무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후읍!"
그 위에서 거대한 창을 휘두르는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미궁주인 보스 몬스터였다.
부우웅!
번뜩이는 창날이 공간을 베어 버렸다.
열화된 기체가 아직까지 공기 중에 남아 창이 지나간 궤적을 그려냈다.
쾅! 콰콰콰콰쾅!
청강석으로 만든 바닥을 따라 생기는 상처.
한 눈에 봐도 무게가 엄청나 보였으나, 바람개비처럼 창을 다루는 솜씨는 신의 경지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창의 움직임이 멈췄다.
"언제 봐도 훌륭하시군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만 봤네요."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아름다운 외모의 엘프였다.
중급 관리자 중 하나인 '셰리'.
자연을 사랑하는 우드 엘프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위의 말을 전하는 대리자일 뿐이다.
"근질거리는 몸을 달래느라 네가 온 것도 몰랐었군. 미안하게 됐다."
"함정들 덕에 침입자들이 이곳까지 올 엄두도 내지 못하던데…… 그래도 수련은 하루도 거르시지 않나 보네요."
"그래. 그놈의 튼튼한 방어책들 덕에 피 맛을 본 지 너무 오래 되었어. 차라리 나에게 오는 길을 훤히 뚫어 놨으면, 이토록 따분해하지 않아도 됐을 것을…… 쯧!"
거구의 남자가 혀를 찼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투기.
직접 싸워 본 게 언제였더라?
목숨을 걸고 치고받는 혈투가 그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말에, 셰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엔 함정들로도 막기 힘든 침입자들이 온 것 같아서요."
"호오? 강한가?"
"강합니다."
"……그거 재밌겠군."
남자의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셰리가 인정할 정도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도 될 터.
드디어 제대로 된 싸움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쿠웅!
창이 큰 반원을 그렸다.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정도는 아니어도 내 창에 묻은 녹이 떨어질 수준은 됐으면 좋겠구나."
미궁주(迷宮主) '여포 봉선'.
탑의 '영웅' 중 하나가 방천극을 움켜잡았다.
"부관들을 전부 깨워라. 손님 맞을 준비를 할 터이니."
"예. 대장군."
연무장 주위에 있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