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여포 봉선(呂布, 奉先) (3)
"아…… 아아……."
여포가 거칠고 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초선, 아니 초선으로 변장한 천유성을 향해서.
워낙 지친 데다 진혁이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아이템들을 적절하게 활용한 덕에, 변장은 완벽에 가까웠다.
'프레이나 운디네는 동양 특유의 미가 안 살아서 후보에서 제외했는데, 그 선택이 맞았어.'
서양적인 외형은 아무리 코인 거래소에서 고친다고 한들 한계가 있다.
일종의 위화감.
그래. 그런 디테일이 부족했으니까.
그에 반해 천유성의 본판은 초선을 만들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베이스를 갖추고 있었다.
몇 가지 남성적인 특성만 제거한다면…….
설사 초선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말이다.
'크으. 그럼, 내가 몇 코인을 투자한 건데, 당연히 이 정도는 되어야지.'
진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의 애절한 재회를 바라봤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야. 거의 다 넘어왔는데, 조금만 더 참아. 나중에 네 말대로 베든 썰든 마음대로 하게 해줄 테니까."
물론, 저주를 퍼붓고 있는 천유성을 향해 한 마디 덧붙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드득……!
천유성이 이를 부러져라 깨물며, 깃털로 만든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입만 다물고 있는다면, 여포가 눈치챌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초, 초선……. 정말 그대요? 정녕 그대가 이곳에 온 거냔 말이오."
여포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고유 능력 '바람의 영역'이 발동됩니다.]
진혁이 적당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쏴아아아…….
양 갈래로 땋은 검은색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거기에 준비해 뒀던 꽃잎까지 적절하게 날려주니, 그야말로 몽환적인 분위기의 절정을 연출했다.
"초선…… 초선…… 초선!"
쿠웅!
한 걸음.
쿠웅!
다시 한 걸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여포의 등이 점점 더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모든 걸 포기한 자의, 아니,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모든 걸 집어던진 자의 몸부림.
그 처량하고도 애절한 걸음은…….
"후우 이것 참."
진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안타깝기는……
.……개뿔.
"찌르기 딱 좋네."
영웅 등급이고 나발이고 간에. 뒤통수를 맞으면 한 방에 갈 수밖에.
아주 그냥, 이렇게 손쉬운 먹잇감이 없다.
[복사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고유 능력 '적토승마(赤兎乘馬)'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적토승마(赤兎乘馬)]
입수 난이도: S
내용: 승마 계열에 특화된 능력으로 탈것을 탈 경우, 모든 능력치가 30%만큼 상승합니다. 단, 고유 능력의 숙련도에 따라 최대 100%까지 상승폭을 올릴 수 있게 됩니다.
거기에, 능력까지 복사하는 데 성공했으니 더 이상 거리낄 건 없었다.
화르륵!
바너드에 실린 검강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렸다간 저 거대한 야수에게 천유성이 능욕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비극이 일어났다간, 두고두고 검성의 추격을 받으며 살아야 될 터.
깔끔한 대단원을 위해선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대, 대장군!"
"뒤…… 뒤를 보십쇼!"
부관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정신이 완전히 빠진 여포에게 그런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프레이를 상대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병사들은 여포에게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검마천령보'를 통해 가속된 진혁이 단숨에 여포의 뒤를 잡았다.
빠르면서 소리 없게.
바너드가 여포의 목덜미를 향해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카앙!
푸른 장막이 펼쳐지며, 바너드가 무언가에 막혔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죠."
셰리가 끼어들었다.
"너는……?"
"여포 대장군의 조력자……라고 합니다. 대장군께서 잠시 한 눈을 팔고 계시니, 정신을 차릴 때까진 제가 상대해드리죠."
"조력자라……. 삼국지 신화에 이종족이 섞여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는데?"
"그거야 이곳은 신화 속이 아닌 시련의 탑이니까요."
뭐든지 일어날 수 있는 곳.
이종족끼리 힘을 합치는 거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래? 흠. 이상하네. 내가 볼 땐 어떻게 봐도 관리자인데 말이야. 그것도 중급 정도 돼 보이는."
"……그, 그걸 어떻게!?"
셰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지금껏 외부에서 활동한 적 없는 중급 관리자였기에,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터.
그런데 어떻게 눈앞의 인간은 당연하다는 듯 정체를 간파해 낸단 말인가?
순간, 평정심이 깨져 손에 들어간 힘이 풀어졌다.
그리고 그 틈을.
"고마워."
진혁이 놓칠 리 없었다.
탓.
"아……!"
셰리가 뭔가 하기도 전에 진혁이 그 옆을 지나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진 거리.
여포가 손을 뻗어 천유성의 부채를 치우려는 게 보인다.
천유성이 사력을 다해 막고 있는 것 역시 보이고.
저 거친 손이 목덜미며 등이며 마구 쓰다듬고 있는데, 천유성 입장에선 아주 전신에 소름이 끼쳐 죽고 싶을 지경일 거다.
"초선…… 초선! 오오오!"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 손 좀 제발……."
"뭐가 아니란 말이오. 나 여포요. 당신의 연인 여포!"
"X발. 저리 좀 꺼져!"
가능하면 조금 더 이 상황을 즐기고 싶긴 하다.
추혼사영이나 각종 커뮤니티에 지금 저장하고 있는 영상을 팔았다간 백지 수표를 던져댈 사람들이 트럭으로 몰려올 테니.
하지만.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는 여기까지다.
"빨리…… 더 이상은 못 버틴다. 빨리!"
단순 완력으로 천유성이 여포를 당해낼 확률은 없다.
"고생했어."
이 말은 진심이다.
서걱!
검강으로 강화된 검이 여포의 등을 꿰뚫었다.
붉은 피가 앞쪽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
검이 심장을 뚫지 못했다.
정확히는 심장에서 바로 5cm 떨어진 곳을 관통한 것이다.
"젠장……."
진혁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후……! 내가 관리자라는 걸 알았으면, 이 정도 권능이 있다는 것쯤은 알았어야지."
셰리.
빌어먹을, 관리자라는 게 들통 났는데도 이렇게까지 개입을 한다고?
"함부로 관리자 권능을 써댔다간,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텐데?"
"감당할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거야. 그리고 날 걱정할 여유가 있다면, 본인들 스스로나 걱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초선이…… 초선이 아니잖느냐!"
분노한 여포가 양 손으로 천유성의 목을 잡았다.
"감히, 나에게 이런 장난을 치다니. 그 목을 닭목 비틀 듯 꺾어버리겠다!"
콰드득!
"커억!"
무시무시한 악력 탓에, 천유성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멈춰! 그 녀석은 내 소중한 돈줄……이 아니라, 하나뿐인 동료란 말이야!"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신권(天魔神拳)'이 발동됩니다!]
콰아앙!
여포의 몸이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조금만 늦었다간, 천유성이 그대로 죽을 뻔했다.
"쿨럭…… 컥. 허억. 허억."
"얼굴은 괜찮아? 아니, 몸은 됐고. 얼굴이 괜찮냐고. 넌 그게 재산인데."
"네놈 눈엔 이게 괜찮……아 쿨럭 보이는 거냐! 그러게. 왜 이런 미친 짓을 해서 사람 자존감을 지옥으로 던져 버리는 거냐. 빌어먹을!"
"아니, 나는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지."
능력 복사도 하고 일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더불어 은밀한 동영상까지 추가되는.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작전이라 굳게 믿었다.
"됐다. 이제부턴 내 식대로 하겠다."
쫘악.
천유성이 걸리적거리는 치마를 찢었다.
양손으로 검을 잡은 채 재차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자식은 내가 죽일 거니, 넌 구경이나 해라."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천유성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카앙! 카카카카캉!
방천극과 류화가 허공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
길길이 날뛰는 여포는 분노로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
"크오오오!"
때문에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오롯이 공격으로 밀어붙였다.
'일대일로 붙으면 천유성도 해 볼 만할 테지만, 관리자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지.'
서포팅이 있다면 천유성은 또 다시 죽을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렇다면…….
'관리자를 제거한다.'
타겟 전환은 즉각 이루어졌다.
콰앙!
천유성이 여포를 상대하는 사이, 진혁이 셰리를 노렸다.
"하……! 진심인가? 플레이어 따위가 감히 관리자에게 칼을 겨눈다고?"
"자기 일에 충실한 관리자면야 가만히 냅두겠지만, 시스템에서 벗어나 제 멋대로 행동하는 놈은 혼 좀 내드려야지."
"가소롭군. 우리가 가만히 지켜본다고 해서 약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셰리가 붉은빛이 나는 한 쌍의 단검을 꺼내들었다.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예기가 뿜어져 나오는 종류다.
레드 드래곤의 이빨로 만든 건가…….
"물론, 너희가 약하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
단지, 시스템의 제약에 얽매여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 또한.
그럼에도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고 있다는 건…….
제멋대로 행동해도 괜찮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뜻.
'상급 관리자 수준에서 어떻게 해볼 일이 아니야.'
더 위다.
주먹을 쥔 진혁의 손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니알라토텝.
층계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그 자식이 무언가 장난질을 친 게 틀림없다.
불법이 아닌, 편법을 이용하는 걸 테지만…….
어쨌든 탑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 중 하나답게, 이번 일 역시 평범한 레이드보다는 더 복잡한 뒷사정이 얽혀 있는 거리라.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역시나 하나뿐이겠지.
"태양의 샘물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거군. 50층의 존재들도 그걸 찾고 있던 거였어?"
진혁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미끼를 던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전혀 모르겠네. 이곳에 달의 샘물 말고 다른 게 또 있다는 건가?"
셰리가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미세하게 떨리는 왼쪽 눈꼬리를 진혁은 단숨에 눈치챘다.
[중급 관리자 셰리, 아름다운 외모의 우드 엘프. 168cm. 근접 전투계열로서 맡은 임무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걸로 유명. 좋아하는 음식은 베베라임 육회. 특이사항으로는 거짓말을 할 때 왼쪽 눈꼬리가 5~6회 정도 떨리는 현상이 있음]
……이래서 미리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중요하다니까.
만약, 과거 시련의 탑을 할 때 셰리와 만난 적이 없었다면, 이런 반응을 그대로 흘려 넘겼을 것이다.
겉으로는 초선을 찾아주겠다느니. 이 미궁이 중요한 요충지니 하면서 여포를 구워삶고.
뒤에서는 미궁 어딘가에 흐르는 태양의 샘물을 지키고 또 찾아내기 위해 수작질을 하고 있던 것이다.
북유럽도 그렇고. 50층도 그렇고. 관리자들도 그렇고.
하여간, 다들 자기들 잇속만 챙기기 바쁘다.
"그래도 덕분에 어떻게 태양의 샘물을 이용하면 될지 계산이 좀 섰어."
잘만 하면,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덕분에 말이다.
"마치, 네가 샘물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구나."
셰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단검을 고쳐 잡았다.
개소리를 듣는 게 역겨우니 서둘러 끝내버리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래.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봤자 믿기 힘들겠지."
하지만, 굳이 친절하게 반박해줄 생각은 없다.
어차피, 적대 관계가 됐는데……. 이번 기회에 관리자가 플레이어한테 개박살나는 경험도 하게 해줄 생각이었으니까.
"보아하니 단검을 꽤 잘 다루나 본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높이 교육을 좀 해줄게. 와 봐."
"건방진! 가장 먼저 그 혀부터 썰어주마!"
셰리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