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두 개의 검 (2)서
늘한 날의 감촉이 목에 전해졌다.
솜털이 모조리 곤두선다.
새로운 충격에 휘감긴 오지원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 이벤트 중에는 죽지 않는다는 거 몰라? 이런 걸로 협박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면…."
"흐음. 아직까지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데, 방금 못 봤어? 이벤트 끝났다는 메시지?"
죽지 않는다는 대전제는 진즉에 끝났다.
이제부터는 칼에 찔리면 정말로 죽게 된다는 말이다.
"당신 같이 유명한 랭커가 살인을 하겠다는 뜻이야?"
푸욱!칼날이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붉은 피가 울컥하고 솟구쳤다.
"끄아아악!"
"똥오줌을 못 가리네. 워낙 오냐오냐 자라서 그런가?"
"그만해! 그… 그만! 그만하라고! 이런 짓을 했다가 걸리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무사할 것 같아? 우리 집에서 이 일을 알았다간…."
"너희 형제들은 네가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눈엣가시로 보일 텐데, 과연 적극적으로 나설까? 더군다나 용의자는 네 말대로 유명한 랭커인데?"
벌집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 터.
100이면 100, 놈들은 오지원의 죽음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달가워할 거다.
수사라고 해봤자 형식적으로 하는 척하다가 금세 묻어버리겠지.
"만약 시비를 걸어온다고 해도 상관없어. 설마, 내가 협박에 겁먹을 사람으로 보인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오지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할 게 없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좋아.
슬슬 뜸은 들였고.
이제 토끼굴에서 토끼를 끄집어낼 시간이다.
"자자. 너무 겁먹진 마. 그렇다고 내가 당장 죽이겠다거나 그런 게 아니잖아. 그냥 차분하게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대화라니 어떤… 걸 말하는 거냐?"
콰득!
"끄아아악! 왜 칼을 돌리는 거야…! 거기서 더 틀면, 안 돼. 멈춰! 제발 좀!"
"말투가 영 거슬리네. 내가 네 부하냐?"
"그만…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이제 좀 듣기 좋아졌네."
진혁이 생긋 웃으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던 검을 멈췄다.
"허억.허억.허억."
"그래. 숨 좀 고르고 잘 들어. 사실, 내가 이래저래 돈 들어갈 구석도 많고 필요한 것도 많거든. 넌 지금 이 순간부터 그걸 담당하는 일종의 보급병이 될 거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어머니의 마음으로 헌신하는 아름다운 기업인이 될 거다.
"앞으로… 하수인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죽는 것보단 낫잖아?"
"……그걸 당근이라고 주시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다.
채찍만 쓰면 안 된다는 것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도 했고.
진혁의 입꼬리가 더욱 위로 올라갔다.
"대신, 널 확고한 후계자로 만들어줄게."
"……예!?"
"그게 가장 원하던 거 아니었어?"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대체 무슨 수로 저를 후계자 자리에 앉히신단 말입니까?"
"요지는 적아 길드의 명성을 높이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물론, 네가 바지사장인 격이긴 하지만."
진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어떻게. 내 제안대로 할래? 아니면 그냥 여기서 내 휴일을 힘들게 한 대가를 치를래?"
죽거나 살거나.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게다가 살 수 있는 길은 자존심만 버린다면 달달한 과즙이 넘쳐나는 길이 기다리고 있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강진혁이란 이름이 함께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좋아. 잘 생각했어. 그럼, 계약서에 사인부터 하자고."
"예? 지금 종이나 펜을 가지고 있는 게 없는데…."
"누가 계약하는 데 그런 걸 쓰나?"
화르륵!
진혁의 손끝에서 붉은색 화염이 타올랐다.
'염혼의 낙인'.
대상이 승인을 하면 영원한 복종을 강제하는 스킬이다.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여러 놈한테 이 낙인을 찍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아파하진 않았으니까."
물론, 직접 당해 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은 이야기다.
그냥 추측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으아아악!"
***
낙인까지 끝나자, 비로소 모든 싸움이 마무리됐다.
오지원이 모든 길드원들에게 후퇴를 명했고 그렇게 고인물 코퍼레이션과 적아 길드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나쁘지 않은 데뷔전을 치를 수 있게 됐습니다. 기자들한테 적절하게 밑밥을 풀었더니 스토리도 제법 그럴듯하게 나올 것 같고요."
오지원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여간 조금 전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낯짝이 두껍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처세술이 좋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주제 파악은 제대로 할 줄 알아서 다행이다.
"뭐, 입에 발린 말은 됐고. 준비하라고 한 아이템들은 다 찾아놨어?"
"예. 빠짐없이 가져왔습니다. 아공간으로 직접 보냈으니 필요하실 때 찾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깔끔하네. 아!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중소 길드 하나가 있거든?"
검은 까마귀 길드라고.
예전에 명목상 가져다가 놓은 게 있다.
"김희웅이란 친구가 맡고 있는데, 내가 통 신경을 쓰지 못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고. 거기 관리도 좀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신경 쓰도록 하죠."
오지원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
정확히는 진혁의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신격들의 눈치를.
덜덜덜!
가늘게 떨리는 팔과 다리.
차마, 기절하지 못해서 버티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일 거다.
잔뜩 분노한 괴물들을 앞에 두고 있으니 당연히 오금이 저릴 수밖에.
"볼일 끝났으면 이만 가 봐."
"저, 정말요? 아니, 감사합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진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오지원이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생각보다 더 깔끔하게 마무리된 것 같네… 이 골치 아픈 애들만 좀 떨쳐내면 숨 좀 돌릴 수 있겠어.'
시선이 힐끗 뒤쪽으로 향했다.
베리엘, 아누비스, 토르.
아직까지 서로가 제일이라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멍청이들을 향해서.
"말해라! 우리 중에서 당연히 내가 최강 아니더냐? 나르시즘 걸린 토 나오는 마왕 자식이나 발할라로 간다면서 매일같이 쌈박질만 하는 근육망치랑 비교 당하다니. 이건 우리에 대한 모독이다!"
"이집트의 개가 언어를 구사하는 걸 보니 놀랄 따름이군. 멍멍 짓는 게 더 어울리는데 말이지."
"발할라는 전사들의 숙원이다! 그걸 무시하는 건가?"
쿠쿠쿠쿠쿠!
또 다시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음.이거, 가만히 냅뒀다간 또 다른 전쟁터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내가 일부러 너희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 게 아니야. 나도 당연히 거대 세력이랑 손을 잡고 싶지. 그렇게 하면 든든하게 탑을 올라갈 수 있는데 내가 왜 마다하겠어?"
진혁이 본격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누구와 계약을 맺으면 계약을 맺지 못하는 세력은 실망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너희끼리 싸움이 날 수도 있을 테고… 근데, 그렇게 되면 꽤나 곤란하지 않아?"
베리엘은 현재 마계 내부에서 마왕들과 서열 경쟁에 휩싸여 있다.
아누비스 역시 최근 칠죄종이 42층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서 잔뜩 예민해져 있었고.
올림포스와 전쟁 중인 토르야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
그런 와중에 전력을 까먹는 행동을 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끄응…."
"그건, 그렇긴 한데…."
"맞는 말이군."
세 신격이 똥 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물론, 이번에 도와준 건 잊지 않을게."
도움을 받고 입만 싹 닦을 생각은 없다.
이렇게 소중한 호구… 아니, 후원자들을 한 번만 써먹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 세 신격이 속해 있는 층계는 늦든 빠르든 가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얽혀 있기도 했다.
"알겠다. 일단은 물러나지."
"쳇! 운 좋은 줄 알아라. 떨거지 신들아."
"위그드라실을 지킬 수 있게 해줘서 다시 한 번 고맙다. 인간이여."
결국, 기세를 누그러뜨린 채 휴전이 결정됐다.
그렇게 모두가 원래 있던 곳으로 가려고 할 때.
-베리엘. 잠깐 가지 말고 남아 봐. 할 이야기가 좀 있어.
진혁이 베리엘을 불러 세웠다.
-……? 알겠다.
파츠츠….
잠시 뒤, 토르와 아누비스가 사라지자, 홀로 남은 베리엘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훗! 저 녀석들 앞에선 내색하지 않더니. 역시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구나."
"느끼하니까.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남아 달라고 한 건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서 그런 거야. 이런 이벤트가 아니라면 현현한 상태에서 마주할 기회가 그리 없을 테니."
"제안이라고?"
"우선 봐 봐,"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몇 가지 아이템들을 꺼냈다.
균열의 틈으로 가는 열쇠.
피바얀의 나침판.
그동안 고이 간직해뒀다 모처럼 빛을 보게 된 아이템들이었다.
"원래 이걸로 적당히 수련을 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혼자서 성장하는 것보다 다른 쪽으로 이용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베리엘의 도움이 있으면 이 아이템들을 통해 마계로 갈 수 있는 게이트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마계에 갈 수 있다면….
"군타페르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거든. 관심 있어?"
베리엘의 서열 경쟁과 마계에 있는 최상급 성유물.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
제국에 위치한 대장간.
근사하게 차려진 대장간에선 한창 망치질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크흠! 헙! 제발. 제바알!"
대장장이 오룬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거대한 망치를 휘둘렀다.
장인의 정신…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한 분위기.
마치, 실패했다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당연한 이야기다.
현재 강화 중인 아이템은 '홍련'.
자칫 강화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고 있기에, 오룬은 영혼까지 불사르며 일생에 남을 걸작을 만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눈부신 황금빛이 점멸했다.
[+4 강화에 성공하셨습니다!]
"됐어! 됐다고! 크하하! 살아남았구만! 살아남았어!"
오룬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후우. 형. 성공이네요."
"오빠 말대로 실력 있는 대장장이 맞으시네. S급 이상 아이템 4강화 확률이 극악이라도 하던데."
구경하던 이태민과 유연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탑에서 구르고 구른 고인물이라고 해도 강화를 하는 순간만은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어요."
진혁이 환하게 웃었다.
"허허. 뭘, 이 정도야 가뿐하지. 그래. 이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나? 이 정도 급의 아이템을 4강으로 만들었으면 충분히 쓸 만할 텐데."
"아뇨. 다음으로 가야죠. 분위기 좋은데, 기세를 꺾을 필요가 있나요?"
"5, 5강화까지 가겠다는 건가?"
"예. 어서 시작하세요."
"하, 하지만, 그러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실패를 한다라….
"그럼, 제 기분이 많이 안 좋아질 것 같네요."
강화에 실패해 아끼는 신상 무기가 날아가는데, 그 누가 기분이 좋겠는가?
그리고.
"제가 기분이 안 좋아지면 이성을 좀 잃어서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장담은 못 하지만, 왠지 오늘 대장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예상일뿐이지만 말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 보겠네."
"최선을 다하는 걸론 부족하고. 그냥 결과만 만들어주세요."
감성팔이니 과정이 중요하느니 하는 건 다 쓸모없는 말이다.
오롯이 결과.
세상에 기억되는 건 그것 하나뿐이다.
물론, 강화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오지원에게 받은 아이템들을 적절하게 사용했지만, 굳이 오룬에게 그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이 편이 훨씬 더 오룬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으허허헙!"
오룬의 눈물겨운 망치질이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