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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405화 (406/653)

405화. 망자가 잠든 신전 (3)

녹(綠)거미 길드.

만든 지 이제 갓 3개월이 넘은 신생 중의 신생 길드다.

공대장은 32살 조남철로 원래는 백수 생활만 몇 년째 해오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이 길드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취직은 안 되고 나이는 점점 더 차고.인생이 팍팍해지다 보니 에라 모르겠다를 외치며 시련의 탑에 들어온 케이스다.

'흔한 일이긴 하지. 세상에 로또를 바라는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

그나마 운이 좋게 좋은 직업을 얻은 게 지금까지 녹거미 길드가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행운도 이곳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서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예! 강진혁 플레이어님과 함께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갈 생각입니다!"

"제가 보스를 잡을 때까지 유적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살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높은데도요?"

"그럼 뭐합니까? 어차피 그렇게 살아봤자 죽은 거나 다를 바 없을 건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뭐가 됐든 끝까지 가볼랍니다 저는."

지나치게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말투.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원하는 대로 하세요."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건 본인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까.

게다가.

'만드라고라 즙을 복용했다라….'

진혁의 시선이 조남철의 목덜미로 향했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은은한 청록색 피.

틀림없이 만드라고라 즙을 마셨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겁 없이 이곳에 온 것도 이것 때문이었군.'

만드라고라는 마약류의 일종으로 최근 레이드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꽤나 핫한 아이템이었다.

문제는… 지금 조남철과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복용한 즙의 양이 정상치를 한참이나 상회한다는 점이다.

'일개 개인이 구할 수 있는 양이 아니야.'

가격은 둘째 치고 초짜들이 이만한 입수 루트를 뚫었을 리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슥.

스윽….

늪지대를 따라 늘어서 있는 바위 사이로 기척이 느껴졌다.

엘프.

그것도 날렵하기로 소문이 난 하이엘프들이다.

"적입니다."

"저, 적이라고요? 설마, 귀쟁이들입니까 또?"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더니 왜, 벌써 겁이 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괜히 일부러 싸울 필요는 없다는 거죠."

"아니면. 싸우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든가."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이번 레이드는 여러 가지로 흥미진진할 것 같다.

***

슈웅! 퓩! 퓩!

퍼퍽!

측면에서 날아오는 화살.

그리고 정면에선 단검을 든 엘프가 쇄도했다.

카카카캉!

소름이 돋을 만큼 정교하면서 빠르다.

진혁과 하이엘프가 시계 방향으로 몸을 회전했다.

가속도에 무게까지 실린 검격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콰앙!

"……!"

하이 엘프의 몸이 5m 넘게 튕겨나갔다.

아무리 충격을 분산시킨다 해도 홍련을 견뎌낼 정도로 단단하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면 승부에서 밀린다 해서 하이엘프들의 기세가 누그러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그 틈을 찾아내려고 했지.

하이엘프의 한 쪽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조금 전과는 다른, 마치 화살이 살아 숨 쉬는 듯 궤도가 도중에 틀어진다.

하나를 쳐내는 즉시 반대쪽에서 두 개의 화살이 급소를 노렸다.

"더럽게 성가시네."

진혁이 사각에서 오는 공격을 모조리 튕겨냈다.

일진일퇴.

힘의 균형이 쉽사리 한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제법이군. 인간."

우두머리로 보이는 하이엘프가 입을 열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몸인지라 가능하면 상하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이러다간 끝이 없겠어. 무리를 해서라도 제거하겠다."

스릉!

척.

활 대신 묘하게 생긴 곡도가 앞으로 뻗었다.

원거리 견제 대신 근접전을 할 생각인가.

게다가 저 곡도는 상처를 악화시키는 하이 엘프 특유의 독이 발라져 있었다.

근접이 일곱. 궁수가 둘.

인원 배치가 달라진 만큼 더욱 치열한 난전이 예상되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저희가 뒤에서 오는 놈들을 맡겠습니다."

조남철이 거들겠다며 나섰다.

"맞습니다. 궁수 몇 정도만 맡아줘도 훨씬 싸우기 편하실 것 아닙니까?"

"뒤는 신경 쓰지 말고 저희만 믿어주십쇼. 어떻게든 버텨보겠습니다."

나머지 플레이어들도 저마다 진혁의 뒤에 자리 잡았다.

"위험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돼도 되게 해야죠. 어차피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당하면 저희도 전부 죽게 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믿겠습니다."

진혁이 마력을 앞쪽으로 집중했다.

'검의 무덤'이 발동되면서 두 개의 검을 따라 검붉은 강기가 타올랐다.

하이엘프들의 곡도도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쳐라."

우두머리 하이엘프가 명령을 내렸다.

진혁과 하이엘프들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지금이야!"

"드디어 걸렸구나!"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진혁의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전부 몸을 빙그르 돌렸다.

하이 엘프가 아닌 진혁의 등을 노리고 일제히 무기를 휘둘렀다.

진혁의 무게중심이 완벽하게 앞으로 쏠린 데다, 마력 역시 전방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

기습을 하기엔 최적의 요건이 갖춰진 셈이다.

하지만.

부웅!

검과 창이 가른 것은 살과 뼈가 아닌 허공이었다.

"뭐, 뭐야?"

조남철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힘을 적당히 빼둔 상태에서 한 완벽한 기습.

그러나 그런 회심의 일격을 상대가 너무도 가볍게 피해버린 것이다.

"생각보다 뒤통수치는 게 좀 빠르네. 하긴, 내가 고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니 너희로서는 지금 타이밍이 딱 좋다고 생각하긴 했겠다."

"알고… 있었다고? 우리가 공격할 거라는 걸?"

조남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하늘에도 눈이 좀 있거든."

위이잉!

지상에서 약 1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날고 있는 소형 드론.

이태민에게서 복사한 '기계 군주'를 활용해 대략적인 시야를 잡아두었다.

아직 능력 활용도가 떨어져 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필요한 정보를 얻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저건… 신경 쓰지 못했군."

"그게 아니라도 너흰 처음부터 의심스러웠어."

"어떤 점이 말이냐?"

"하이 엘프들은 기생체들에게 당하지 않아. 기본적으로는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기생체에 감염됐다는 건, 기존의 기생체들이 할 수 없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는 뜻.

다시 말해 제3자가 개입했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곳에 익숙하면서도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자들. 그건 이곳을 본거지로 사용했던 마인들뿐이지."

진혁의 말에, 조남철의 얼굴이 180도 달라졌다.

"……빌드업이 좀 잘못된 건가. 스토리는 제법 그럴듯하게 짰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하이 엘프를 고른 게 실수였어."

"뭐, 굳이 짚자면 만드라고라의 즙을 과용한 것도 문제였고. 어설픈 신생 길드로 위장해 내 시선을 끈 것도 문제였지."

자기 동료들까지 희생시켜 하이 엘프들과 싸우는 장면을 연출한 건 좋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공격대가 전멸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특히 이런 신생 길드의 공격대라면 더욱더.

"다…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단 말이냐."

"멍청한 적만큼 이용하기 쉬운 게 없으니까. 원래는 아예 끝까지 잠자코 있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좀 바뀌었어."

진혁의 시선이 엘프들에게 향했다.

하이 엘프들 틈에 꽤나 익숙한 얼굴이 섞여 있었다.

테슬론.

6층 엘프의 숲에서 만난 적 있는 놈이다.

꽤나 볼 만한 코스프레를 시켜서 기억 깊숙이 남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이 녀석이 이곳에 기어 들어와 있다.

그리고 가장 뒤에는 마찬가지로 6층에서 만난 엘프 레인저 실비아 역시 함께 있었다.

이 둘이 여기 있다는 건 엘프들 사이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

"뭐, 좋아. 눈치가 제법 빠른 것 같긴 하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네놈은 하이 엘프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하던데, 우리까지 감당할 수 있겠어?"

이제 사방이 적이다.

아무리 날고기는 고인물이라 해도 이 상황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싸움이 팽팽해 보인 건 너희를 자백시키려고 일부러 살살해서 그런 거야."

팟.

진혁의 몸이 사라졌다.

…콰앙!

선두에 있던 하이 엘프의 몸이 지면에 처박혔다.

이번엔 바로 옆에 있던 하이 엘프가 옆으로 날아갔다.

어떻게 당한 건지 이해조차 되질 않았다.

벌써 둘.

그리고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세 번째 엘프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어…?"

"방금 뭔가…."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픽픽 쓰러지는 엘프들.

조남철은 이제야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

콰직! 우득!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 몸의 뼈란 뼈는 전부 박살이 난 조남철이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엄살 피우지 마. 아직 물어봐야 할 게 더 있으니까."

"무…멀 마…립니까? 져는 하는 게… 거의 읎습…. 크아아아! 내, 소…손카락이."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을 텐데? 괜히 쓸데없이 입 놀리지 말고 쉴 수 있을 때 얌전히 쉬고 있어. 이따가 다시 올 거야."

"아… 알게스니다."

이빨까지 몽땅 사라져서 말할 때마다 입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

그래도 통증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욱 컸기에, 조남철은 감히 앓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한 동료들이 전부 죽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탓이다.

상황을 정리한 진혁이 이번엔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전원이 포박된 채 기절해 있었지만, 테슬론과 실비아만은 의식을 차리고 있었다.

기생충들을 내쫓는 해독제를 조제해 먹인 덕분이다.

"어때. 좀 괜찮아?"

"크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기도 하고."

테슬론이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다행이네. 그래도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몸 안에 있는 놈들의 움직임이 많이 둔해지긴 했는데, 아예 내보내려면 추가적인 자극이 필요하거든."

"젠장. 하여간 네놈이랑 마주하게 되면 좋은 일이라곤 없군. 빤질빤질한 얼굴을 보니 우리한테서 가져간 무기를 잘 쓰고 있나 보지?"

펜타그리스의 송곳니와 어금니를 잃어버린 게 꽤나 분한 모양이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에게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아득바득 대들면 쓰나.

진혁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짜악!

"크아악! 뭐 하는 짓이냐?"

"약효가 빨리 돌게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해. 두들겨 패는 게 제일 좋긴 한데, 그랬다가 뇌에 손상이라도 가면 큰일이잖아."

"그렇다고 싸대기를 때리면…."

쫘악!

"아아악! 이, 잇몸 깨물었다. 이 망할 자식아!"

"저런 많이 아파?"

한데 어쩌냐? 이제 시작인데?

진혁이 사정없이 테슬론의 안면을 두들겼다.

타악기를 치듯 묘하게 리듬감까지 실린 연속 싸대기다.

"이야. 은근히 찰지네. 우리 테슬론이 못 본 사이에 아주 찹쌀떡처럼 됐구나."

"그…만. 아악! 머, 멈춰. 멈추란 말이다!"

"멈추면, 그러다가 다시 놈들에게 의식을 빼앗기면 어쩌려고? 너 다시 기생충들이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야?"

"그, 그건…!"

"아니지? 너희 일족이 이렇게 처참한 꼴을 당하고 있는데 고작 이것 하나 못 버틸 리가 없잖아."

마을을 수호하는 레인저들의 대장.

고통 받는 엘프들을 생각한다면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쳐라."

테슬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진혁이 또 다시 신명나게 테슬론의 안면을 마사지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어라? 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옆에 실비아가 손발을 꼼지락 거리며 움직였다.

테슬론을 보면서 곧 자신의 차례도 올 거라며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감염되었을 때의 위화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몸.

거기에 두 눈 역시 맑아졌다.

"어…떻게 된 거냐? 왜… 실비아는…."

얼굴이 잔뜩 부풀어 오른 테슬론이 말을 더듬었다.

"아… 생각해보니 좀 전에 먹인 약이 신약이라 그냥 시간만 좀 지나면 알아서 기생충이 죽었지. 그만 깜빡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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