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하이엘프와의 동맹 (1)
파츠츠……!
어금니를 따라 마력이 응집됐다.
마력으로 만든 화살.
평범한 화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압감이다.
붉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위력은 제법 세 보인다만 인간이 화살이라니. 그것도 우릴 상대로 말이냐?"
"어쭙잖은 재주를 부리는구나."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보지. 얼마든지 쏴 봐라."
나무 위에 있던 하이엘프들이 비웃음을 지었다.
활이야 말로 엘프들의 주특기.
천성적으로 타고난 유연함과 집중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락된 무기다.
그런데 그걸 조급하기 짝이 없는 인간 따위가 쓰겠다고?
이쯤 되면 기가 차서 말조차 나오질 않는다.
"잠깐! 진정해라! 저 분들이 뭘 모르고 하는 말일 거다."
"지, 진혁 님, 죽이면 안 돼요."
그런데, 정작 테슬론과 실비아는 하이엘프들이 아닌 진혁을 말렸다.
걱정해야 할 번지수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기가 막히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물어볼 게 많으니 일단은 팔 하나 정도로 봐주지."
장난은 여기까지다.
순식간에 7개의 화살이 쏘아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얀색 빛이 허공을 갈랐다.
궤적이 완벽하게 가려진 걸 보면, 엘프의 궁술이라는 게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카카캉! 카앙!
화살들이 모조리 박살났다.
자로 잰 듯 날아온 붉은 섬광들이 엘프들이 쏜 화살을 허공에서 요격한 것이다.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떨어지는 파편들.
"무슨……!?"
"마, 말도 안 돼."
경악은 오래 이어지지 못 했다.
어느새 진혁이 두 번째 시위를 당겼다.
빠르다.
마력으로 화살을 만드는 과정도. 그 화살이 목표물을 겨냥하는 것도.
상식을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퍼퍼퍽!
이어지는 연격에 하이엘프들이 들고 있던 활이 그대로 박살 났다.
"큭!"
활을 잃자,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그거 뽑으면 죽는다. 너희."
하이엘프의 목덜미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선이 활에서 검으로 향한 건 고작 1초 남짓.
그 찰나의 순간에 이미 뒤를 잡혀 버렸다.
"대, 대장!"
"어느새?"
반 박자가 지나서야 나머지 엘프들이 반응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언…… 제 여기까지 올라온 거냐?"
수비대장을 맡고 있던 남자 엘프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돌아보면, 아니, 손 하나라도 까딱했다간 그대로 목이 날아갈 거다.
그걸 알았기에, 반항할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요구를 하는 건 내 쪽이야. 알았으면 대답해."
"그래……. 알겠다."
"믿고 안 믿고는 너희 자유지만, 우선 기생충들을 해독해 준 건 바로 나야. 해독하는 방법이야 성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찬찬히 설명해 주지."
"저, 정말인가?"
하이엘프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지금까지 감염체로 인해 온갖 곤욕이란 곤욕은 다 겪은 상황.
강력한 전사들과 정령수들마저도 바로 저것 때문에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해독법만 알 수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반격을 할 기회를 몇 번이나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거기에, 포로로 잡아온 마인 역시 넘겨 줄 거야. 우호의 표현으로서 말이지. 뭐, 엘프들에겐 엘프들의 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
거기까지 이르자 하이엘프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의심과 경멸의 시선은 간데없고. 어느새 진혁에 대한 감탄과 존경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파라곤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우리가 그대를 오해했던 것 같군."
"강진혁이야.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이네."
진혁 역시 생긋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런데 왜일까?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짙은 살기가 맴돌았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오해했다 미안하다고 해결되지가 않더라고. 다른 건 몰라도 내 마음에 입은 상처는 보상해 줘야지."
마상은 오래 가는 법이다.
적절한 사과가 없다면 평생을 갈지도 모르고.
"보상이라니. 어떻게…… 말인가?"
어떻게긴.
"테슬론."
"나 말이냐?"
갑자기 지목당한 테슬론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너."
경험자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했으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말이다.
진혁이 미리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옷들을 늘어놨다.
하나같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형태를 한 옷들이었다.
"테슬론. 지금 이 인간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이거…… 진심은 아니겠지?"
"우리를 놀리는 거라면 적당히 해라."
"호오. 그래서 다들 못 입겠다?"
"당연하지! 고귀한 숲의 전사들을 뭘로 보는 거냐!"
"엘프의 긍지를 우습게 보지 마라!"
"흐음. 그렇단 말이지. 뭐, 거절해도 괜찮아. 시체에 입히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을 테니."
진혁이 재차 '홍련'을 꺼냈다.
붉은 칼날이 단숨에 하이엘프의 목덜미에 닿았다.
이번엔 닿는 것만으로도 살이 조금씩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지, 진심이냐? 이랬다간 우리와 정말로 전쟁을 해야 할 텐데?"
"해독제랑 포로만 넘기면 장로분들은 이해해 주실 거야. 너희는 일종의 전쟁 상 불가피한 손실인 셈이지."
도저히 대화가 통할 분위기가 아니다.
결국, 엘프 대장이 테슬론에게 도움을 구했다.
"테슬…… 론. 빨리 이 인간을 말려 보게. 진짜로 죽이려고 하질 않는가? 그래도 함께 온 자네가 하는 말이라면……."
"포기하십쇼."
"뭐?"
"그냥…… 다 내려놓고 받아들이시는 게 낫습니다. 믿으세요. 저도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아니까."
테슬론이 그윽한 눈으로 엘프대장을 바라봤다.
저건…… 경험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망울이다.
처절한 발악과 현실 부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 자신을 내려놓고 체념하기에 이르기까지.
그야 말로 한 엘프의 삶이 담긴 그런 눈이었다.
"……빌어먹을."
다…… 틀렸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은 없다.
엘프들이 힘 없이 고개를 떨궜다.
***
엘프 성채 안에 꽤나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빨주노초.
형형색색의 남스러운 옷을 입은 마법 소녀들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 키보다 커다란 지팡이들을 든 건 덤이다.
너무나도 기이한 광경에 성채 내부에 있던 엘프들은 감히 질문을 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다.
"……."
"……엄마. 저 사람 수비 대장님 아니야?"
"쉿. 뚫어져라 보면 못 써."
그저 귀신에 홀린 듯, 진혁이 성채 가장 안쪽까지 가는 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무로 만든 아늑한 방 안에선 이 성채를 책임지고 있는 장로와 진혁이 만남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 전사들이 말을 안 들어먹어서 교육을 좀 시켰다 이 말인가?"
긴 수염을 기른 하이엘프 장로가 찻잔에 녹색 차를 따랐다.
쪼르륵…….
그윽한 향이 심신을 조금이나마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예. 이번 전쟁에 함께 하게 될 텐데, 어느 정도 서열 정리는 필요해 보여서요."
"저놈이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장로님! 계속 듣고만 계실 겁니까?"
"가만있게. 자넨 그 옷을 입고도 뭘 잘했다고 그리 큰 소리를 치는 겐가? 가뜩이나 집도 좁은데 마법봉이나 들고 말이야. 쯧쯧."
"아, 아니 이건 말입니다……."
수비 대장이 얼굴이 벌게져 말끝을 흐렸다.
엘프 장로가 진혁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자네가 제안한 조건들은 나쁘지 않아. 우리로서도 가장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니까. 이곳에 있는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거야 내 권한으로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지."
"임시 동맹을 받아들이시겠단 말씀인가요?"
"그럴 생각이네. 누가 뭐래도……."
엘프 장로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일족을 도와줬던 은인을 믿어야지 누굴 믿겠는가?"
이미 실비아를 통해 진혁이 활약했던 일들에 대해서 전부 들었다.
한 인간이 엘프들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으며, 그러한 업적을 달성해 놓고도 굳이 그 일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때문에 고민 따윈 없었다.
대화를 한 순간부터 이미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하이엘프 장로 '타이안'의 신의를 얻으셨습니다.]
[이후 처음 만나게 되는 모든 엘프들의 우호도가 200%만큼 상승합니다.]
[엘프 레인저 100인대 급에 해당하는 작위가 주어집니다.]
연거푸 나타나는 푸른 상태창.
이걸로 최소한의 준비는 끝났다.
"필요한 것들에 대해선 파라곤에게 말하게나. 무엇이든 제공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진혁이 짧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똥 씹은 표정의 파라곤과 테슬론 그리고 실비아를 대동한 채 성채 외곽으로 향했다.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레인저의 수가 얼마나 돼?"
"레인저만이라면 300 정도다."
"300이라……."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위 마족인 레미아와 칠죄종 탐식까지 왔으면 신전의 방비가 만만치 않을 거다.
'내부에 멜레나와 트리스탄이 잠입해 있긴 해도 둘로부터 정보를 얻으려면 접촉할 계기 정도는 만들어야겠지.'
삼엄한 감시 속에서 시스템을 통해 연락할 수도 없을 테니까.
"레인저뿐 아니라 전사들까지 모아 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귀족들도 포함시켜야 해."
"정찰 정도로 끝낼 생각이 아닌가 보군."
파라곤의 얼굴이 한층 딱딱해졌다.
"……설마, 정면으로 맞붙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애초에 이렇게 게릴라 전을 펼치는 것도 전부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하이엘프들이 강하다고 한들, 엄청난 수의 마수들과 기생체를 거느린 마족에게 견줄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모하게 엘프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생각이라면……."
"아니, 엘프들의 희생은 거의 없을 거야.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나와 티본 그리고 프레이 셋이면 돼."
"우리는 그럼, 너희들이 신전 안으로 진입하게끔 시선만 끌면 된다…… 이런 뜻이냐?"
"더도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만 해 줘."
"정말이지. 미친 짓만 골라서 하는 인간이로군. 고작 셋이서 거길 가겠다니……. 뭐, 좋다. 화끈하게 시선을 끌도록 하마."
파라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쿠쿠쿠쿠쿠!
신전 전체를 따라 붉은 피분수가 솟구쳤다.
혈계 마법을 통해 더욱더 내부에 마기를 응집시키려는 목적에서다.
그리고.
역십자 제단 아래 있는 옥좌에는 레미아가 앉아 있었다.
"지금쯤이면…… 녀석도 슬슬 움직였겠구나."
"예. 기껏 엘프들까지 사냥하며 자극했으니 분명, 서두르고 있을 겁니다."
"후후. 좋아. 이제 곧 결실을 볼 수 있겠어"
이번 일은 여러 가지로 공을 많이 들였다.
마계의 위대한 마왕이자 주인이신 군타페르께서 친히 명령을 내리신 거였으니.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에 약간의 변수도 있어선 안 된다.
'강진혁이라…….'
레미아가 피로 그려진 진혁의 초상화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상대는 틀림없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
왜 아니겠는가?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비장의 수를 가지고 있는데?
마인들이 멍청하긴 해도 니체라는 인간은 제법 쓸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당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고유 능력을 무효화 하는 힘. '니힐리즘'.
설사 날고 기는 거주자들조차 상대하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니체가 하루 아침에 플레이어에게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미리 니힐리즘에 대한 대처법을 알고 있지 않은 한. 처음 마주하게 된 니체는 재앙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쪽에 쥐새끼가 있다고 한다면 대충 앞뒤가 맞긴 해. 안 그러니? 우리 앙큼한 생쥐 양?"
레미아의 시선이 제단에 묶여 있는 적발의 여인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