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규칙 (2)
콰앙! 쾅! 쾅!
모드레드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마기가 응집된 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그 모든 공격을 적절하게 흘려보냈다.
"여긴, 저에게 맡겨 주세요."
"괜찮겠어?"
"예. 버티는 것 정도라면요. 저보단 빨리 멜레나 쪽을 부탁드려요."
트리스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멜레나를 바라봤다.
전투가 정신없기에 당장은 레미아 쪽에서 내버려 두고 있지만, 언제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같이 목숨을 걸고 잠입한 동질감 때문인가?
많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아직 '퍼시벌'이란 이름을 가진 기사는 움직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멜레나를 구하는 건 프레이의 몫이다.
여기서 진로를 틀었다간 오히려 이점을 상실한 채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레미아를 처리한다.
그게 이번 작전의 대전제다.
"프레이를 믿어. 저 녀석도 그리 호락호락한 애가 아니거든."
상층부의 세력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최종병기.
그 초기 알파 모델이 바로 프레이다.
실제로 프레이는 홀로 역십자 제단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네…. 알겠어요."
트리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툭….
"이쪽은 부탁할게."
진혁이 가볍게 트리스탄의 어깨를 두드린 뒤 재차 몸을 날렸다.
시야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각종 키메라들이 가로막았다.
"키에에에!"
"샤아아!"
상반신은 도마뱀에 하반신은 전갈. 혹은, 호랑이에 날개가 달린 형상을 하고 있다.
심지어 예전에 상대했던 천수천안관음과 비슷하게 8개 이상의 팔을 가지고 있는 마수도 있었다.
모두 몽마의 군주이자 마계의 연구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레미아가 손수 제작한 키메라들이었다.
치이익!
독액이 비산하고, 수십 개의 날붙이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고유 능력 '멸천만독(滅天萬毒)'이 발동합니다!]
[고유 능력 '만다라(曼茶羅)'가 발동합니다!]
이독제독.
전갈의 독보다 더욱 강력한 독이 녹색 운무를 만들었다.
후욱하고.
구름처럼 생긴 벽이 날아오는 독을 모조리 흡수해버렸다.
그리고 그 운무 사이로….
파츠츠!
황금색 번개가 점멸했다.
긴 빛줄기는 키메라들의 몸과 몸을 타고 이어졌다.
당연히, 번개에 관통된 키메라들의 몸속은 내장 채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이것이 '만다라'.
시련의 탑 45층을 지배하고 있는 상위 세력의 근원적인 힘이다.
거기에 '빙하조형'과 '화룡의 숨결'이 곁들여지자 천재지변을 방불케 하는 학살의 현장이 펼쳐졌다.
콰콰콰콰콰!
"크오오!"
"크아아… 컥!"
10m에 이르는 대형급 마수들이 토막이 난 채 좌우로 쓰러졌다.
그토록 탄탄하게 보이던 벽도, 전력이 분산되자 손쉽게 돌파당했다.
짙은 피보라 속,진혁이 레미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드디어 가까이서 보게 됐네."
나름대로 준비를 하긴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혹시 탐식과 모드레드, 그리고 퍼시벌까지 합세할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어쨌든 그 가정은 완전히 뭉개져버렸으니까.
진혁이 이번엔 '탐식의 눈'을 사용해 레미아를 살폈다.
띠링!
눈앞에 푸른 상태창이 나타났다.
[인물 정보]
이름: 레미아
레벨: ???
고유 능력: 몽마의 맹세
스킬: '서큐버스의 타액' Lv32, '지옥의 불꽃' Lv30, '통각의 채찍' Lv30, '고속 재생' Lv29, '은신' Lv29
상세 정보: 군타페르의 심복 중 하나로 타인을 자신에게 복속시키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몽마의 군주라는 이명에 걸맞게 정신계열뿐 아니라, 대인전에도 매우 강력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사 조건: 레미아는 본인의 고유 능력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레미아의 능력으로부터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과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공을 들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레미아의 고유 능력을 복사하기 위해서다.
'몽마의 맹세'는 박하나에게서 얻은 '교감'이나 '염혼의 낙인'과는 차원이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맹세를 한 인물이 자진해서 시전자를 따르게 만든다는 점이다.
강제성이 아닌 본인 스스로가 강렬히 열망하게 만드는 힘.
'그야말로 자발적 노예들을 대거 양산할 수 있는 티켓이지.'
융합을 통해 더욱 상위 능력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니, 이 능력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제법이구나. 그래, 허를 한 번 찔렸다는 건 인정하지."
레미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짜증이 목소리에서 묻어 나왔다.
"하지만, 너무 자만하진 마렴. 아직도 내가 훨씬 유리하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
레미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탐식이 두 주먹을 하늘 높게 치켜들었다.
묶여 있는 멜레나가 그대로 공격에 노출되었다.
동시에, 레미아 역시 손끝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만약, 진혁이 멜레나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그대로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에서다.
그런데,
"……."
진혁은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호오. 구하러 가지 않을 생각인가? 역시, 마족보다 더 마족 같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군."
"아니,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야."
"기다린다고? 무얼 말이냐?"
주먹이 아래로 향했다.
무시무시한 파공성은 스치기만 해도 연약한 인간의 살 따위는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멜레나가 멍한 표정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바라봤다.
이미 한계에 몰려 있던 터라, 저항할 의지도 살려 달라 소리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듯. 담담히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콰아앙!
누군가 끼어들었다.
거대한 주먹과 두 개의 단창이 한 점에서 맞부딪쳤다.
지면이 움푹 파였지만, 프레이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키라고 했어."
한 점 흔들림 없는 목소리.
푸른 눈동자에 희미한 불꽃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지킬 거야."
믿고 맡긴 사람이 부탁한 일이다.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이유로는 충분하다.
"건방진… 인형 주제에 감히 누구를 가로막는 게냐!"
콰앙! 콰콰쾅!
탐식과 프레이가 그 자리에서 서로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인질 가지고 협박하는 건 힘들 것 같네."
제단 왼쪽, 숨겨져 있는 방에 있는 엘프 포로들과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배치해둔 퍼시벌 역시 파악이 끝났다.
테슬론과 실비아에게 운디네를 붙여 줬으니 학살을 막을 시간 벌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다.
"그럼, 슬슬 우리도 마무리를 지어 볼까?"
서로가 준비한 카드는 이제 전부 다 사용했다.
이제 각 세력을 이끄는 머리끼리 끝을 볼 차례다.
"하? 너 따위가 서큐버스의 군주인 이 몸을 말이냐?"
"그 말, 조금 뒤에 꼭 다시 한 번 하길 바랄게."
우우웅!
진혁이 아껴 두었던 마력을 한꺼번에 해방했다.
검붉은 스파크와 함께 공간이 횡으로 갈라졌다.
[고유 능력 '만상공유(萬祥共有)'을 발동합니다!]
[고유 성창 '흑창 키샨'이 현현합니다!]
찢어진 공간 너머로 검은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리엘의 고유 성창.
검게 타오르는 창은 원거리 투창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고유 성창이다.
"그…건 베리엘의…? 아니, 네가 어떻게 그 창을. 그 저주받은 창을 다룰 수 있는 거지?"
레미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몇 걸음인가 뒷걸음친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열화판 따위가 아니다.
이 느낌.
이 감각.
일전에 마계에서 전쟁을 벌였을 당시, 베리엘의 사용했던 그 창과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이, 인간의 몸으로 그 힘을 견딜 순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단 말이다!"
"그래. 그렇겠지."
제국에서 간다라 길드의 니라샤에게 쓴 키샨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성장했고. 그만큼 강해졌다.
그럼에도 마왕의 권능을 구현하는 건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일이었다.
그러니….
만들어주면 된다.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신체를.
그렇게 또 한 번….
……공기가 변했다.
[고유 성창 '페이즈2'가 발동됩니다!]
툼그레이브의 오른팔과 다리가 신체의 일부를 개변하는 것이라면, 페이즈2는 신체를 붕괴시키고 재구성하는 창조의 영역에 가까웠다.
보스 몬스터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허락된 영역.
그걸 플레이어가 재현하고 있었다.
진혁의 몸을 따라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이내 전신을 뒤덮은 갑주처럼 변했다.
흑기사.
검은 창을 쥔 흑기사가 전장에 나타났다.
"함정도 좋고 다 좋은데…."
진혁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쿠쿠쿠!
검은 갑주에서 불길한 마기가 솟구쳤다.
"우리와 제대로 싸울 생각이었으면, 군타페르가 직접 내려왔어야지."
* * *
욱씬! 욱씬!
두 개의 고유 성창을 연속으로 사용한 건 역시나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보유한 마력이 400이 넘었기에 이 정도지, 과거였다면 페이즈2를 사용하는 즉시 전신이 갈가리 찢겨 나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짧은 시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역시, 미친 듯이 성장을 한 보람이 있네.'
과거 탑을 올랐을 때보다도 몇 배는 빠른 속도.
덕분에 20층 대에서도 이런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스윽.
진혁이 키샨을 가볍게 놀렸다.
긴 창이 부드러운 원을 그렸다.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베리엘의 정수가 담긴 창답게, 응축되어 있는 마기는 그 끝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큭!"
레미아가 '은신'을 사용했다.
정면에서는 힘들 테니, 기척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진혁은 레미아가 사라진 곳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거기냐."
진혁이 번개처럼 창을 던졌다.
슈우우우… 콰콰콰콰콰!
창이 공간을 갈랐다.
빠르다는 수준이 아니다.
사라진 창이 다른 공간에서 나타난 것처럼, 키샨은 기둥들을 모조리 박살낸 채 벽에 꽂혔다.
비명이 울려 퍼진 건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난 후였다.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달은 레미아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아아악! 내 팔이… 내… 내 팔이!"
창에 스친 레미아의 팔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자연히 사용하던 은신 또한 풀렸다.
"재생 능력 있으면서 엄살 피우지 말고. 아, 고통은 그대로 느끼니 아프긴 아프려나?"
"허억…. 허억…."
레미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고속 재생'을 통해 순식간에 새로운 팔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신체를 복구하는 데 상당한 마력을 소모했는지, 호흡이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척!
진혁이 벽에 박혀 있던 키샨을 회수했다.
빙그르 날아온 키샨이 진혁의 손에 단단히 잡혔다.
"아직 창이 손에 덜 익긴 하지만, 점점 더 정확도가 올라갈 거야."
"후후…. 덜 익은 게 아니라, 감당하기 힘든 거겠지. 제대로 그 창을 다룰 줄 알았다면 방금 전에 치명상을 입혔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일부러 살살 해주는 걸 수도 있지."
"허세… 부리지 마라. 무리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니까."
레미아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기를 꺼냈다.
촤르륵….
칼날이 달린 붉은 채찍이 바닥에 늘어졌다.
"하루아침에 강한 힘을 얻었다고 그걸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리는 없어."
플레이어가 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총량이야 뻔한 수준.
직격만 당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마력이 소모되기만 기다린다면….
아직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촤촤촤촤!
레미아의 채찍이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