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29층, 대해(大海)를 지배하는 자 (1)
3 대 1이었던 포위 상황이 순식간에 2 대 2의 대치전으로 바뀌었다.
철컹!
진혁이 시체에 떨어져 있던 창을 집었다.
[중천사 '하마우엘'의 창 '륜타르'.]
공격력: 10,500
내구도: 100,000 / 100,000
특징: '에덴'의 국경 수비대 중 하나인 하마우엘의 애병기입니다. 전격과 신성력의 2 속성 효과가 부가되어 있으며, 마족을 상대할 경우 5분간 공격력이 50%만큼 상승합니다.
[특수한 공법으로 성유물화 되어 있어 마족이 다룰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군타페르가 꽤나 공을 들이긴 한 모양이다.
상극의 존재들이 반대 쪽 세력의 힘을 역이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은 본래라면 몇 년이 흘러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지긴 달라졌네.'
큰 전환점이 되는 일들이 앞당겨졌다.
변수들이 개입하면서 탑의 신격들과 거주자들 역시 발빠르게 움직인 탓이었다.
그래.
'이래야 재밌지.'
진혁이 흥미롭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마왕 중에서 가장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게 군타페르인데, 이런 식으로 나와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슬슬 마무리해야지? 해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
진혁이 창을 앞으로 뻗었다.
"그래. 우선 버러지들부터 정리하고 그 다음에 대화를 나누도록 하마."
베리엘 역시 손톱에 검은 마기를 덧씌웠다.
귀족들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웠다.
셋이서 베리엘 하나를 상대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승산이 없었다.
"젠장…."
"으아아아!"
짧은 비명을 끝으로 영지에 들어온 군타페르의 수족들이 모두 시체로 변했다.
툭툭….
진혁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미안하다. 오자마자 험한 꼴을 보게 만들었군."
"아니야. 마계야 언제 어디서든 뒤통수 맞을 수 있는 곳이니까. 각자가 자기 몸 간수 잘하는 게 상식이지."
"흐음. 마치, 이전에도 여기에 와본 적이 있다는 말투로구나."
베리엘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차.
무의식적으로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진혁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마족들이 음흉하다는 건 상식이니까. 그것보다 게이트 확보는 가능하겠어?"
"다행히 그대가 위치를 좋게 잡아준 덕에 방어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다른 영지는 포기하더라도 이곳 위주로 병력을 재배치해 두지."
"티 나지 않게 꼼꼼하게 신경 써 둬. 병력이 한쪽에 편중된 게 발각됐다간 군타페르가 오히려 냄새를 맡을 거야."
"그 부분은 걱정 마라. 이래 봬도 영토 전쟁만 수천 년을 해온 몸이니까."
정보 공작과 거점 보호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겪었다.
기본적인 실수를 할 정도의 시기는 이미 옛날 옛적에 지났다는 말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내 사도로서 함께 군타페르를 쓰러뜨리면 되겠군. 내 성에 방을 마련해뒀으니 머무는 동안 부족함은 없을 거다."
음….뭔가 오해를 하고있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난 바로 가 봐야 돼."
"뭐, 뭐라고?"
"지금 나머지 애들이 29층에서 한창 지옥을 맛보고 있을 거거든. 너무 늦기 전에 가서 도와줘야지."
"아니, 그럼 이곳엔 대체 왜 온 거냐?"
"게이트가 잘 연결됐는지 확인도 해야 되고 다른 쪽 정보도 좀 물어보고 싶어서. 너라면 알고 있지? 저번 전쟁이 어떻게 된 건지 말이야."
올림포스와 마계에 의해 라그나로크가 무너졌다.
결국.
위그드라실을 잃은 라그나로크의 상위 신격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고 현재도 아레스가 이끄는 추격대가 잔당들을 처리하고 있는 중이라 들었다.
'태양의 샘물을 파훼할 수 있는 수단을… 군타페르가 갖고 있었다는 건데,'
그게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무슨 짓을 한 건지 확인해야 한다.
"마계 쪽에서도 워낙 극비리에 진행한 거라 나도 정확한 건 모른다. 뭐, 놈들에게 있어 나는 동료라기보다 방해꾼에 가까울 테니 말을 해주지도 않았겠지만."
"…그건, 그렇긴 하지."
역시, 정보가 없는 건가.
진혁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베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한 가지 단서를 꼽자면, 그 전쟁에 처음 보는 네 명의 기사들이 참전했다는 거다. 각기 다른 색의 깃발을 지니고 있는 게 특징이라더군."
기사 넷이라면…설마.
틀림없다.
[계시록의 네 기사]
놈들이 개입된 거다.
그리고, 그 녀석들이 나타났다는 건….
'아포칼립스 시나리오가 발동되었다는 말인데.'
그렇게 가정한다면 모든 일이 앞뒤가 맞았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련의 탑에서 최소한 1개 층계 이상을 쓸어버릴 수 있는 걸 '아포칼립스'라 부른다.
등급은 '붕계(崩界)', '천재(天災)', '언약(言約)' 세 가지로, 붕계는 한 층계에 해당하는 종말을.
천재는 적어도 3개 층계 이상에 해당하는 종말을, 그리고 언약은 탑 전체를 아우르는 종말을 예고한다.
'계시록의 네 기사는 붕계에 해당하는 아포칼립스지'.
확실히 그 정도 놈들까지 개입했다면 위그드라실이 파괴된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이 도움이 좀 된 것 같군."
"그래.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됐어."
아포칼립스 시나리오를 총괄하는 건 관리자가 아닌 50층의 존재들.
그리고 첫 번째 아포칼립스 카드를 사용한 이상, 이후부터는 아포칼립스가 발동되기 전 특정한 '징조'를 내비쳐야 한다.
미리 알고 있는 한….……
대비가 가능하다는 소리다.
"자세한 건 저쪽 일을 마무리 짓고 다시 만났을 때 할게.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그때까지 게이트만 확실하게 지켜 줘."
"흐음. 알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아! 그리고…."
돌아가기 전 진혁이 베리엘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뭐냐…?"
"뭐긴. 기껏 널 돕기 위해 게이트까지 뚫고 군타페르의 핵심 수족인 레미아까지 처리해줬는데, 빈손으로 보내려고?"
그건 상도의가 아니다.
그리고 상도의를 안 지켰다간 확 군타페르 쪽에 붙어버리는 수도 있다.
베리엘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나 지끈거리는 머리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마왕을 상대로 협박을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후우. 그래서, 뭐가 필요한 거냐?"
"근사한 배 한 척만 구해줘."
기왕이면 함포까지 달린 놈으로.
* * *
시련의 탑 29층.
'해상전'이 주요 무대가 되는 이 층계는 거인들의 성채와 몇몇 섬들을 제외한다면 층계 대부분이 거대한 바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쏴아아아….
스타팅 포인트에 선 진혁이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뜨거운 태양과 서늘한 바람.
칙칙한 마계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이 모든 게 달갑게 느껴졌다.
'다들 잘 하고 있으려나?'
일단은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응하는 것 위주로 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혁이 해안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플레이어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배를 보유하고 있는지부터 파악해야겠네.'
29계층 통과 조건은 이 층계에 거주하는 대형급 해적을 토벌하거나, 층계 가장 깊숙이 있는 섬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것.
두 개 중에 하나를 만족해야만 한다.
언뜻 보면, 플레이어들끼리 경쟁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유리해 보였지만.
워낙 층계의 크기가 큰 데다, 각종 보상들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여서 그리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진 않을 거다.
바로 그때.
"어? 형?"
"오빠!"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유연화와 이태민이었다.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어?"
일주일이 흘렀으면 당연히 훨씬 더 뒤쪽에 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나 '기계 군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태민이라면 해상전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포지션이었으니까.
"당연히 형을 기다리고 있었죠."
"모처럼 협력전인데 오랜 만에 같이 뭉쳐야지. 봐. 우리끼리 배도 만들어 놨어."
이태민과 유연화가 해안가에 있는 배를 가리켰다.
약 5m 크기의 소형 선박은 제법 그럴싸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이건… 좀 감동인데?
역시, 사람은 평소에 행실이 바르고 착해야 하는 법이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
"음… 그게…."
유연화가 말꼬리를 흐렸다.
"왜, 무슨 일이 있는 건데?"
"형. 있잖아요. 사실 일이 좀 복잡하게 됐는데, 하아. 그 유성이 형이 단독행동을 선언했어요. 엘리스 누님도 마찬가지고요."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라고.
천유성이 주위의 소형 해적들을 규합해 해적선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엘리스 역시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고.
"이 바다의 지배자가 되겠다나 뭐라나…. 어차피 끝만 보면 클리어가 인정되니 다들 1등으로 통과하고 싶었나 봐."
"바람을 넣은 게 그 망할 관리자 놈이었어요. 제일 먼저 통과하는 플레이어에겐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걸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저 같은 경우엔 S급 AI 칩이었고요."
"난, 아일랜드 웨일의 통뼈로 만든 건틀릿이었어."
플레이어들끼리 연합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 이번 층계의 난이도를 더욱 올리기 위해서.
관리자들이 나선 것이다.
"뭐 하는 관리자야? 그 공수표 남발하는 놈."
"쥐새끼… 아니, 햄스터 외형을 하고 있는데, 성격이 아주 지랄 맞아."
"유성이 형에게는 탑에서 주최하는 '정상대전(頂上大戰)'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와 원하는 상대에 대한 지명권을 준다고 했어요. 엘리스 누님에게는 연인과 함께하는 7박8일 파라다이스 섬의 숙박권을 약속했고요."
"테레사 씨한테도 뭔가 제안했는데, 뭔지 까먹었네. 아무튼 다들 각개 전투로 돌입했어."
하필이면….
천유성과 엘리스에게 있어 거절하기 힘든 미끼를 뿌려 놨다.
이거, 생각보다 층계 공략이 스펙터클해질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많이.
* * *
29계층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구름 위 '관찰자의 배'.
그곳에선 이번 층계를 관리하는 중급 관리자, '알루티'와 그를 따르는 하급 관리자들이 모여 있었다.
"찍찍! 역시,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교육해야지."
알루티가 양 손에 가득 들어오는 거대한 해바라기 씨를 움켜쥔 채, 키득거렸다.
나머지 햄스터들도 각기 다른 견과류를 갉작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찍! 맞습니다. 알루티 님께서 나서주신 덕분에 일이 꽤나 수월하게 풀릴 것 같군요."
"이런 흐름이라면 하스팅 님도 만족하시겠죠."
이들이 이렇게 공을 들이는 건 전부 하스팅의 명령 때문이었다.
최대한 플레이어들이 29층을 공략하는 걸 늦추게 하라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겐 기회야.'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는 상급 관리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바로 하스팅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들 수만 있다면….
중급 관리자들 중에서 선두에 서게 될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운까지 따라 주는지 생각보다 모든 게 착착 맞아 떨어지는 중이었다.
'의외로 유력한 공략 후보자들이 바라는 게 소소한 거라 다행이긴 해.'
충분히 자신의 권한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아타락시아의 가주'나 '성녀' 그리고 '검성'이라 불리는 놈은 조심하긴 해야 한다.
이 정도 실력을 지닌 놈들이라면 예상 보다 더 빨리 마지막 섬에 도달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더욱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이 외에도 또 한 가지 보험을 들어두긴 했다.
때마침.
똑똑.
관리자가 있는 곳에 누군가 방문했다.
"찍찍! 어서 오시죠. 기다리느라 목 빠질 뻔했습니다."
알루티가 방 안으로 들어온 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