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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416화 (417/653)

416화. 29층, 대해(大海)를 지배하는 자 (4)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요시오가 대뜸 물었다.

"고인물 코퍼레이션 쪽에서 그 모든 위험 부담을 다 무릅쓰고… 거기에 보상은 공평하게 분배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제가 워낙 심성이 착해서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걸 못 보겠더라고요."

"……하! 그걸 믿으란 겁니까? 저희 쪽 성유물을 가지고 사기를 쳤던 당신을?"

가면무도회에서 혹독하게 당했던 기억 때문일까.

요시오의 반응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천총운검을 되찾았다고 기뻐하던 남자에게 분노한 천유성을 보냈었으니….아직까지 뒤통수가 얼얼할 수밖에.

"저야 좋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낸 건데… 정 못 믿겠다 싶으시면 없던 일로 하든가요."

"잠깐! 요시오 마스터님. 지금 좋은 이야기를 한 분에게 무슨 막말입니까?"

"그래요. 강진혁 플레이어님께서 모두를 위해 희생하시겠다는데?"

"괜히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 그쪽 길드에서 선두에 설 거요?"

여기저기서 거친 목소리가 솟구쳤다.

"아니, 저는 혹시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요시오가 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는 찰나.

"후우… 아닙니다."

진혁이 세상의 고뇌를 모두 짊어진 표정을 지은 채 한숨을 쉬었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이죠. 요시오 님에게 뭐라 할 게 아니라 저에게 돌을 던지세요. 기분이 풀릴 때까지 달게 맞겠습니다."

씁쓸함과 자조 섞인 목소리는 선의를 배반당한 이를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뭘 잘못하셨다고!"

"사무라이 길드가 사과를 해야죠. 사과를!"

순식간에 분위기가 역전되었다.

괜한 말을 꺼낸 요시오는 졸지에 역적이 되어버렸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 진혁은 비운의 영웅이 되어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언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시오가 어금니를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좋아.

이거로 반대파의 입은 적절하게 막은 것 같고.

이제는 혹시라도 남은 잔불이 일어나지 않게끔 못만 잘 박아두면 된다.

"저도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진혁이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공증서를 꺼냈다.

우우웅!

구속력을 지닌 황금색 양피지가 펼쳐졌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함선이 가장 선두에 설 것이며, 모두가 해적섬에 무사히 도착해 해적단을 소탕할 경우 그로 인해 나오는 모든 보상은 참여한 길드의 숫자대로 분배하겠습니다.]

[불이행 페널티: 1,000만 코인]

"오오오…."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커흠! 정말 배려심 깊으시군요."

"알겠습니다. 저희는 강진혁 플레이어님과 고인물 코퍼레이션을 믿고 그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희미하게 남은 의심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그걸로 뿔뿔이 흩어졌던 길드들이 하나로 결집했다.

* * *

"사기꾼 기질은 여전하더군. 다른 사람들 구워삶는 게 메인 고유 능력은 아니겠지?"

회의가 끝난 직후, 천유성이 내뱉은 첫 질문이었다.

"넌 기껏 고생하고 온 사람한테 사기꾼이니 뭐냐? 사기꾼이."

"보고 느낀 걸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보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 우리가 선두에 서는 게?"

천유성의 목소리가 한 층 무거워졌다.

29층을 공략하기 위한 두 개의 조건 중 하나인, '해적섬'.

그곳엔 이 층계에 있는 해적들 중 가장 커다란 세력을 가진 대 해적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껍데기만 남은 해상 공국의 해군들은 감히 손도 댈 수 없는, 수백의 함선을 거느린 악질들이 말이다.

거기에 섬으로 가는 해협은 수많은 암초들과 거친 해류로 둘러싸여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천혜의 요새란 평가를 받았다.섬에 접근하는 데 엄청난 희생과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걱정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진혁은 언제나 그랬듯 싱긋 웃었다.

"제발 미친 짓만 아니길 바란다. 부탁인데 우리까지 휘말리게 하지 마라."

"어허. 아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 못 믿어?"

"네놈을 믿을 바엔 차라리 고구마한테 마정석을 맡기고 말지."

"선 넘네."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제대로 정신 나간 일을 계획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위해선 사전에 준비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이번에 상위 랭커들이 전부 모인 김에 그 녀석들도 만나봐야겠어.'

이곳에 오며 얼핏 두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는 걸 들었다.

"우선 테레사 씨부터 해결하자. 버려진 교회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알겠다."

쇼핑 삼매경에 빠져 있는 엘리스와 배 수리를 맡은 이태민과 유연화는 뒤에 남기로 했다.

진혁과 천유성은 곧장, 세타 아일랜드의 외곽으로 향했다.

반파된 채 버려져 있는 배들과 술주정뱅이들.

섬의 끝으로 갈수록 보이는 풍경 또한 달라졌다.

몬스터만 없을 뿐이지 여기가 던전 내부인지 바깥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다.

바로 그때.두 사람 앞에 녹슨 십자가가 나타났다.

'순교자가 잠든 곳.'

그 별명답게 이곳은 천사들이 현현할 수 있는 성지(聖地) 중 하나였다.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테레사는 29층에 온 이후 이 주위에서 주로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었다.

덜컹!

낡은 문이 열리자 어두컴컴한 실내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가운덴….

순백의 기사가 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다.

여러 명의 성기사들을 대동한 채로.

"저들은…?"

천유성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갑주에 새겨진 문양이 익숙했던 것이다.

"성십자 기사단인가."

진혁 역시 길드의 트레이드마크를 알아봤다.

8대 길드에 해당하는 대형 길드는 아니었지만, 로마와 교황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급부상하고 있는 신흥 길드다.

전원이 2차 전직을 끝마친 성기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듣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욱 장관이다.

"지금은 예배를 드리는 중입니다."

성기사 한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에 잠시 이야기만 좀 했으면 해서요."

"그건 곤란하군요. 예배 후에는 저희끼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랜 동료하고 인사도 못 하게 막겠다는 말씀인가요?"

"당신과 어울리면… 테레사 님의 신앙이 그릇된 곳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분위기가 차갑게 급변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성기사들의 눈빛이 영 좋지 않더니.

"나를 완전 사교도로 취급하고 있나보네."

"사교도면 다행이지. 넌 굳이 분류하자면 악마 쪽에 가깝지."

"야!"

네가 여기서 저쪽 편을 들면 어떡하냐?

가뜩이나 이미지가 안 좋은 상황인데.

"그쪽 길드의 입장은 이해한다. 세상엔 어울리지 않는 게 좋은 인간이 있는 법이니까."

"역시, 검성 분은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묘하게 쿵짝이 잘 맞는 걸 보니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진혁이 성기사들의 사이로 테레사를 불렀다.

"테레사 씨도 이들과 같은 생각인 겁니까?"

"……."

줄곧 침묵을 지키던 테레사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타래 같이 부드러운 금발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런데.

테레사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텅 비고 공허한, 심지어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선 체념마저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다.

그 대답을 해준 건 성기사였다.

"테레사 님은 신성왕국과 상층부의 거대세력 '에덴'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대천사 우리엘께서 직접 현현하셨죠."

"……우리엘이라고?"

"영광스러운 일이죠. 저희 성십자 기사단은 천사들의 간택을 받아들여 그분들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성기사의 힘의 근원은 곧 신성력.

특히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탑이 나타나기 전부터 신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시련의 탑이 나타난 것 역시 하나의 기적이라고 여기곤 했었지.'

그렇기에, 이들의 대의와 신념은 에덴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

"죄송…해요."

테레사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하필이면 가브리엘이 아닌 반대쪽이 먼저 손을 쓸 줄이야.

"……가브리엘은 몰라도 우리엘은 당신들이 알던 천사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뿌리는 사랑이나 용서 같은 게 아니라 우리를 그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아요."

"닥치시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성기사들 사이에서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역시, 뱀 같은 혀를 지녔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또 다시 헛소리로 테레사 님을 현혹시킬 생각이라면, 크게 오판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아니, 저희가 방관하지 않을 테니까요."

스릉!

성기사가 즉각 검을 뽑았다.

천유성이 반사적으로 손을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척!

스릉!

이번엔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성기사들이 무기를 뽑았다.

신성력이 발현되면서 칼날을 따라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만해. 유성아. 그리고 그쪽도."

진혁이 모두를 만류했다.

여기서 싸웠다간 괜히 테레사만 곤란해질 거다.

이번 결정엔 개인의 신념뿐 아니라 로젠베르크 가문과 유럽 정부의 이해관계까지 얽혀 있었을 테니까.

'괜히 무리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겠지.'

물론, 그 모든 걸 다 무시하고 쓸어버리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다.

성십자 기사단과 시온 길드는 이번 항해에서 나름대로 해줘야 할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밤, 해적섬으로 가는 건 알고 계시겠죠?"

"공과 사를 혼동하진 않을 겁니다."

성기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 또한 최우선 관심사는 이번 층계를 무사히 공략해 인류에게 새로운 시간을 벌어주는 거니까요."

"그거면 됐습니다. 가자."

"정말 괜찮겠나? 테레사 씨를 내버려두고 가도?"

천유성은 뭔가 탐탁지 않는 듯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진혁만 동의한다면 당장이라도 뽑을 기세로.

"그래. 시작도 전에 괜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

* * *

이튿날, 진혁은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섬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랭커들을 만나고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했다.

적아 길드의 오지원과 마리아가 적극적으로 도와줬기에, 섬 구석구석의 정보를 모으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걸로 대충 다 됐나.'

진혁이 뭉쳤던 관절을 풀어주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시간은 정신없이 빨리 흘렀다.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졌을 무렵.

드르르륵!

해안가에 정박해 있던 수많은 배들이 닻을 올렸다.

마침내 29층을 공략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대가 출항을 시작한 것이다.

가장 선두를 맡은 건 역시나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타고 있는 '화이트 펄'호였다.

[이태민이 Lv13 '공대지 헬파이어 - 5대'를 소환합니다.]

베리엘에게서 받은 8성급 전함, 그 주위로 이태민의 드론들이 호위기처럼 따라붙었다.

거기에 비무장인 대신 넓은 범위를 아우를 수 있는 정찰용 드론들도 주위 바다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지금부터 간단하게 브리핑을 할게. 다들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잘 숙지해둬."

선실에선 진혁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테이블을 따라 펼쳐진 거대한 지도.여기엔 29층의 최대 해적단인 '페인' 해적단의 주요 거점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새 이런 걸 손에 넣었군. 호오 보면 볼수록 상세한데…. 음?"

천유성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섬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건 설마…? 너,"

악마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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