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천세(千歲)의 사도 '니라샤' (2)
아름답다.
숲을 따라 쏟아지는 월광(月光)은 가장 짙은 어둠마저도 거둬내고 있었다.
쏴아아…….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 뭐야, 이건? 지형지물을 전부 바꿔버리는 능력이라니."
"필드형 스킬인가?"
니라샤와 콥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광범위하면서 모순점이 없는 필드 스킬은 생전 처음 접해보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오직 락샤샤만이 이 스킬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심상…… 구현화, 아니."
단순히 장소를 바꾸고 그 장소가 지닌 이점을 극대화하는 것뿐이라면…….
그건 심상의 구현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재현하고 있는 것인가."
신화가 되어 사라져버린.
오직 탑만이 알고 있는 기억의 단편.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있었다.
"아……."
엘리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모든 것이 붉게 물들었던 기억.
생을 되새겨 가장 치열했던 전투를 선택하자면 단연 그날의 싸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계를 넘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졌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기억에 맞춰…….
……온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빠르게 회복되는 상처.
부서졌던 고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타올랐다.
한 쌍의 붉은 날개가 천천히 그 형을 자아냈다.
마력의 한계도.
능력의 제약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전성기.
가장 강했던 시절의, 아타락시아의 가주가 현현했다.
* * *
쿠쿠쿠쿠쿠!
날개가 펼쳐진 주위의 공간이 왜곡됐다.
터무니없는 마력으로 인해 물질이 변형되어버린 것이다.
"과연, 난이도가 조금 올라가긴 했군. 하지만, 이 몸은 천세의 신격이다. 진조들 따위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이다!"
"그런 것치곤 목소리가 떨고 있구나."
"뭐?"
"이해는 한다. 겁먹은 개가 시끄럽게 짖는 법이지."
천세의 신격이든, 아니면 그 이상의 존재가 오든.이제는 상관없다.
전성기의 자신과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곁에 있었으니까.
엘리스가 진혁을 힐끔 바라봤다.
처음 계약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언제나 함께 해줬다.
그게 고맙고. 또 미안했다.
"짐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미천한 버러지들아."
파츠츠…….
조금 전보다 3배는 더 큰 꼬챙이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엘리스의 흰 손바닥이 펼쳐졌다.
콰콰콰콰콰!
이어진 건 붉은 소나기였다.
"크아아악!"
니라샤가 곧바로 황금 화살들을 소환했지만, 아까와는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챠크람으로 꼬챙이를 쳐내던 니라샤의 몸이 순식간에 고슴도치로 변해버렸다.
전장 선택으로 만든 결계가 흔들릴 정도로 엘리스의 공격은 규격 외였다.
'무시무시하네.'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만상공유의 특징은 대상에 대한 이해도.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수록 그 완성도가 올라간다.
이미 엘리스와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그 폭을 최대치에 가깝게 만들어 두었을 터.
지금의 만상공유가 이토록 뛰어난 위력을 보이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반동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무리해서 상위 스킬들을 사용한 만큼, 몸에 가해지는 부담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쯤 되니까 견딜 수 있게 된 건가.'
모든 기연을 독식하고 최적화된 루트를 설계해 온 덕에. 절대자의 전성기를 재현하고도 몸이 박살나지 않았다.
[엘리스가 '블러드 바인드'를 발동합니다!]
살아 있는 독사들이 니라샤의 발목을 휘감았다.
"큭!"
니라샤가 혀를 찼다.
당장 파훼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엘리스의 레이피어가 심장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타앙!
기적 같은 총성이 울려 퍼졌다.
엇박자 타이밍을 노리는 콥스의 지원사격이 이어진 것이다.
"그만 좀 뒈져라! 빌어먹을 박쥐 녀석아!"
엘리스가 피하는 것 대신 허공을 향해 레이피어를 그었다.
쩌억하고.
공간이 갈라졌다.
"마, 말도 안 돼."
콥스가 비명을 질렀다.
신의 영역이라 알려진 '차원 절단'.
총탄이 갈라진 틈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필살을 자랑하는 일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터.
이제 더 이상 콥스의 저격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부우웅!
엘리스의 레이피어가 일점을 향했다.
"으아아아!"
니라샤가 모든 마력을 쏟아 부었다.
카카카카…… 카카카캉!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공방전.
두 개의 챠크람을 손에 쥔 니라샤가 레이피어를 받아쳤다.
특유의 유연한 체술에 마력이 실리자, 아름다운 금빛 궤적이 그려졌다.
"허억…… 헉. 헉."
니라샤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배신자의 소금'으로 인해 50%의 능력치 너프를 시켰음에도 이 정도다.
간신히 버텨내는 게 고작인.
그마저도 언제든지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균형.
그 뼈저리게 냉혹한 사실이 니라샤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이럴 리 없다. 지금의 난 최강일 텐데……. 분명, 누구도 이길 수 있어야 할 텐데……!"
대체 어째서!
진조 한 마리를 잡지 못 한단 말이냐!
[니라샤가 '아바타' - '광역 흡수'를 발동합니다!]
우두둑!
"끄아아아!"
"으아악!"
'전장 선택'으로 인해 공간이 단절되어 있는 와중에도 미리 제물들의 심장에 심어두었던 표식은 발동되었다.
섬에 있던 해적들을 모조리 씹어먹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꿀렁꿀렁!
니라샤의 전신에 굵은 핏줄이 튀어 나왔다.
"후후……. 어디, 이래도 그 무표정한 면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보자."
오드아이에서 황금색 스파크가 일어났다.
마력이 허용량을 넘어 주입되면서 폭주의 영역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니라샤가 Lv18 '나선 챠크람'을 개방합니다.]
1m가 넘는 빛으로 물든 나선형의 챠크람.
콰앙!
니라샤가 앞으로 질주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맞출 수 있다면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왼손에 쥔 챠크람은 눈속임.
진짜는 '비마나의 파편'이 있는 오른 손이다.
퍼퍼퍽!
당연하게도 수십 개의 꼬챙이들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쉽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만 한다.
"콥스!"
니라샤가 도움을 청했다.
"젠장!"
콥스가 화승권총을 조준했다.
성유물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괴물들 싸움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다.
[콥스가 Lv17 '9개의 교수대'를 발동합니다!]
9번의 교수형으로부터 살아남은 기적.
총탄의 정확도는 물론, 1/3 확률로 발동되는 필살(必殺) 역시 확률을 100% 가까이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거기에 교수대의 효과로 인해 송장 파리들의 크기 역시 수십 배는 크게 만들어버렸다.
이거라면 분명,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으리라.
그런데.
철컥!
뭔가 이상하다.
철컥! 철컥!
아무리 격발을 해도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서포팅이 주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놈들보단 낫거든."
진혁이 생긋 웃었다.
"설마…… 내 스킬을 파훼했다는 말이냐?"
"방금처럼 집중력을 요구하는 스킬이라면 어느 정도 방해는 가능하지."
"헛소리도 정도껏 해라!"
고함을 지른 콥스가 다시 한 번 스킬을 발동하려 했다.
우연은 한 번뿐.
결단코 두 번은 없다.
스킬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술식에 개입할 수 없는 게 정설이었으니까.
하지만.
철컥!
또 다시 화승권총에서 기분 나쁜 불발음이 울려 퍼졌다.
"9개의 교수대 같은 스킬은 부하들 틈에 숨어서 몰래몰래 사용했어야지."
"이, 이럴 수가…… 우연 따위가 아니었단 말인가?"
콥스가 말을 더듬었다.
스킬의 이름까지 정확히 꿰고 있는 이상, 부정할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새도 없이…….
이번엔 진혁이 움직였다.
"키에에에에!"
망령나무의 낫이 찢어질 듯한 굉음을 내뱉었다.
동시에.
지면을 따라 검붉은 칼날이 사정없이 솟구쳤다.
퍼퍼퍼퍽!
거대화된 송장 파리들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압도적인 광역 마법.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천세의 가호를 받은 니라샤조차 진조에게 쩔쩔매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서 버티고 있다가는 개죽음만 당하게 될 것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젠장! 젠장할! 으아아아!"
성유물까지 전부 내던져버린 콥스가 허둥지둥 숲의 반대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흐음……."
진혁은 그 뒤를 쫓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놈은 절대로 이 숲을 벗어나지 못할 거다.
"냄새,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키에에!"
콥스의 암묵적인 동의로 인해 제물로 바쳐진 시체들.
배신당한 증오로 가득 찬 두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가서 똑똑히 되갚아줘. 해적의 방식대로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곱게 죽기는 힘들 거다.
원한이 전부 다 사라지기 전까진, 시체들의 원념은 이 땅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히익……. 히이익!"
그 말을 증명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콥스가 시체들에 의해 포위됐다.
"얘, 얘들아. 나야. 너희 선장이란 말이다! 무, 물러가. 저리 꺼지라고!"
콥스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렸다.
"키에에에!"
"산채로 씹……어 먹어……버리겠다!"
"우릴…… 배신한……쓰레기! 우리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알려주지."
"켈켈켈켈!"
시체들이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 * *
"니라샤! 당장 빠져나가야 한다!"
락샤샤가 재차 니라샤를 만류했다.
콥스마저 사라져버린 지금, 이미 싸움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큭!"
니라샤도 그걸 깨달았지만, 문제는 그 시점이 너무 늦었다는 점이다.
진혁이 합류하자 균형이 단번에 무너졌다.
우우웅!
발밑에 생겨난 검은 문양.
디버프 계열의 마법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아아악!"
니라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격통에 순간 마력이 흐트러졌다.
시간으로 치면 고작해야 0.3초 남짓.
찰나라고 해도 좋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최상위 랭커들 사이에서 그 정도 틈은 싸움을 결정짓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엘리스가 순식간에 니라샤의 등 뒤를 잡았다.
"2:2 호흡은 아무래도 우리 쪽이 훨씬 더 잘 맞는 모양이구나."
엘리스의 레이피어가 예기를 발했다.
물론, 니라샤는 자신의 등을 파고드는 칼날을 바라보지 못했다.
푹!
"커……억……."
니라샤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심장에 꽂힌 검을 뽑으면 치사량의 피가 나올 터.
긴 악연이 이걸로 끝났다.
만약, 진혁이 '별의 가호'를 쓰지 않았다면 말이다.
우우웅!
조금씩 회복되는 상처.
"계약자?"
엘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나를……?"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니라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묘한 표정 지을 거 없어. 네가 예뻐서 치료해주는 게 아니거든."
단지, 지금까지 그토록 성가시게 굴었는데, 이렇게 쉽게 끝내버릴 생각이 없을 뿐이다.
상처를 회복시킨 진혁이 망령나무의 낫을 휘둘렀다.
서걱!
"아아악! 끄……끄아아악. 너, 너무 아파. 이게 뭐야!?"
낫에 베인 어깨가 검게 변했다.
'멸천만독'의 효과로 인해 맨살이 그대로 썩어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부패 독이야. 통증을 주는 덴 최고지."
약 1분 정도가 흐르고…….
우우웅!
곧바로 진혁이 '별의 가호'를 사용해 상처를 회복시켰다.
"허억……. 헉. 헉."
"다음엔 산공독이야. 이것도 꽤 화끈할 거야."
이후엔 분근착골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독도 있고. 마약에 중독된 것과 비슷한 후유증을 남기는 독도 있다.
'별의 가호'로 낫게 하면 멀쩡하게 되돌아오게 만들 수 있으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