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성녀의 책무 (1)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상층부에 거주하는 신격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고대룡 중 하나를 눈앞에 뒀기 때문도 아니었고.
심지어 태고의 신들에게 포위를 당했을 당시에도 이처럼 심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강진혁 용사님?"
망할 참치 초밥이 계속해서 압박해 왔다.
부르르…!
반지 속에 있는 흡혈귀 꼬마여왕도 그에 맞춰 더더욱 거세게 날뛰었다.
'……차라리 크라켄하고 싸우는 게 더 마음 편하겠네.'
어느 한 쪽의 요구를 들어줬다간 다른 한 쪽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거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는 선택지는 양 쪽 모두를 잃어버릴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속.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진정한 용사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면… 그땐, 여왕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인어의 법도에 따르겠습니다."
당장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법에 결혼을 하려는 여왕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바로 합방을 하자고 하진 않을 테니까.
"……겸손하시기까지 하군요."
다행히 여왕은 그 말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인간이란 욕구에 충실한 종족으로 알았는데… 폐하의 성은보다도 용사로서의 의무가 더 중하다는 말인가?"
"인간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었어."
"의심하던 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군."
"과연, 용사의 본보기로다."
대신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어났다.
이쪽은 목숨이 걸린 일인데, 전혀 다른 식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인어들 쪽 상황은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브라함의 반지'가 강제로 해방됩니다!]
다른 쪽은 납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콰콰콰콰콰콰!
아틀란티스 내부에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없던 마력도 모조리 끌어모은 엘리스가 외형만은 본래 크기로 현현했다.
"이, 이… 말미잘 같은 놈들이 누가 누구랑 후계자를 남긴다니 뭐니 하는 거야! 다들 콩벌레로 만들어 주마!"
엘리스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배, 뱀파이어?"
"고위 개체입니다! 아니, 어떻게 순혈종이 이곳에…?"
친위대들이 즉각 무기를 뽑았다.
각종 마법이 중첩되면서 삽시간에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당연히 최우선 의심은 진혁에게 쏟아졌다.
"설마, 용사님께서…."
"……."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정의로운 용사가 악독한 뱀파이어와 손을 잡았다는 모양새가 될 거다.
당연히 인어들의 지원 또한 물 건너 가버릴 테지.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진혁이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바너드를 꺼냈다.
은은한 빛을 띤 '별의 가호'를 발동시킨 건 덤이었다.
"처음 보는 뱀파이어인데요?"
그간 무수한 실전으로 단련해 온 표정 관리와 빼어난 연기력.
고개를 7도 가량 갸우뚱거려 주는 게 포인트다.
"용사님도 모르시는 거였군요."
"예. 어우. 여름 모기들이 악독하긴 하지만, 바닷속까지 들어올 줄이야. 어서 퇴치하시죠. 좋은 자리에 불경하게시리."
[마력이 제한됩니다.]
진혁이 엘리스에게 주는 마력을 전부 끊어버렸다.
"응?"
포옹!
엘리스의 몸이 작아져버렸다.
"간악한 뱀파이어도 용사님 앞에서는 잔뜩 겁을 먹었나 보구나! 당장 추격해라!"
"와아아아!"
분기탱천한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꺄아아아!"
엘리스가 기둥 사이로 요리조리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그럼, 지원은 약속하신 겁니다."
"예. 저희가 가진 최고의 전사들을 불러모을게요."
나중에 올 엘리스의 후폭풍은 솔직히 말해 두렵긴 한데.
뒷감당은 글쎄….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도록 하자.
진혁이 애절함과 분노가 뒤섞인 엘리스의 절규를 애써 무시했다.
* * *
뿌드득….
하늘에서 페인 해적단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던 알루티가 분을 참지 못하고 선실 안에 있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박살냈다.
"찍! 찌이익! 으아아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대체 왜애애!"
비싸 보이는 도자기들과 고풍스러운 원목 테이블이 걸레짝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웅!
선실 안에 녹색 빛이 맴도는 게이트가 나타났다.
이 마력….
설마?
알루티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틀림없다.
상급 관리자가 이곳에 오고 있는 것이다.
"……."
저벅.
곧바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가 나타났다.
고블린의 외형을 한, 상급 관리자 '하스팅'.
이번 일을 지시한 명령체계의 끝이었다.
"찍! 찍! 오, 오셨습니까?"
"알루티."
"예!"
"분명, 그대에겐 많은 지원을 해줬습니다. 천세의 지지를 받고 있는 간다라 길드를 연결해준 건 물론, 페인 해적단과 아틀란티스의 창까지 말입니다. 제 말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죠."
"어, 없습니다."
"당연히 없겠죠. 모두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하스팅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도자기 파편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일처리를 병신 같이 했길래. 상대를 저지시키는 것조차 하지 못했느냔 말이다!"
퍼퍼퍽!
파편들이 알루티가 서 있는 벽면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렸다.
"찌이이익!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아니, 죄송해할 필요는 없어. 다행히 버러지 같은 네놈에게도 나름의 역할이 남아있으니까."
쿠쿠쿠쿠!
선실의 바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대해(大海).그리고 수면 아래에선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그림자가 보였다.
"찍! 크, 크라켄!? 설마…."
"그래. 그 녀석이 뭔가 또 수작질을 부리기 전에 끝장내기 위해선 아포칼립스를 앞당겨야 할 터. 네놈들은 크라켄의 부활을 위한 제물이 될 거다."
후두둑!
십여 마리의 햄스터들이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끄으아아!"
"찍찍!"
풍덩! 풍덩!
잔잔했던 수면 위로 파동이 일어났다.
마침내 깨어나려는 것이다.
한 층계를 멸할 수 있는 종말이.
* * *
쿠르릉… 콰앙!
서서히 검게 물드는 하늘.
바다는 그야말로 폭풍전야를 연상케 했다.
"거의 다 됐다."
"조금만 더 밀어붙여라!"
연합 함대를 이끄는 각 길드의 공대장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기간트달로스와 싸운 지도 어느새 5시간이 훌쩍 넘은 시점.
길었던 싸움도 마침내 끝이 보였다.
사력을 다해 밀어붙인 덕에, 조금씩 승기를 잡은 것이다.
콰콰콰쾅!
콰아앙.
각종 마법들이 어지럽게 날아갔다.
"키에에에!"
기간트달로스의 몸에 거대한 불꽃이 솟구쳤다.
몇 시간 동안 힘을 뺀 와중에도 여전히 거칠게 날뛰는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저 망할 살인귀 쌍둥이들 때문에 아슬아슬하긴 했어. 배가 몇 척이나 가라앉은 거냐 대체.'
마리아가 소속된 유럽 쪽과 오지원이 이끄는 적아 길드가 전선을 이탈한 것도 전투를 어렵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중년의 남자가 어금니를 으득 갈았다.
성십자 기사단의 '로테인 펠리아니'.
그는 바티칸 직속의 성기사 중 하나로 이번 레이드를 통해 각국에 성십자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테레사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군. 역시, 적당히 데리고 써먹기엔 최고의 카드야.'
거기에 '에덴'에 소속되어 있는 신격들의 지원까지 약속받았다.
이건 잘못되려야 잘못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우웅!
이상한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방금 뭔가…."
로테인이 난간으로 걸어갔다.
분명, 바다에서 짐승의 울부짖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이긴 했지만, 피부를 자극하는 묘한 위화감은 오히려 이쪽이 더욱 급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부기사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옆에 있던 성기사들이 다가왔다.
"너희들은 지금 이게 느껴지지 않는… 헉?"
의구심은 경악으로 변했다.
쿠쿠쿠쿠쿠!
수면 아래서 거대한 그림자가 보이는가 싶더니….
콰아아앙!
이내 엄청난 양의 물보라가 솟구쳤다.
"그오오오!"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문어가 기간트달로스를 단숨에 옭아맸다.
"키에에에! 케에엑!"
그토록 거칠게 날뛰던 기간트달로스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파도 아래로 사라졌다.
우두둑!콰득!
순식간에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10초도 안 되는 찰나에 벌어진 일.
"우와아악! 저게 뭐야?"
"크, 크라켄이다!"
함대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신화 속 몬스터.
지금껏 나름대로 탑에서 구르며 다양한 보스들을 잡아온 공격대로서도 저런 규격 외의 괴물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싸운다?
그런 선택지는 버려야 한다.
본능이 미친 듯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한다고.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가능할까?
저 속도로 달려든다면, 도망가더라도 전체 중 3%나 살아서 육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희생양.
그렇다. 모든 함대들이 물러날 때까지 시간을 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더욱이, 그 사람의 희생을 통해 성십자 기사단의 가치가 올라갈 수 있다면 최상이었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테레사를 불러라."
로테인이 명령을 내렸다.
* * *
모두가 떠나버린 바다.
대양 위엔 배 한 척만이 외로이 떠 있었다.
"멍청하네. 정말로 죽을 생각인 거야?"
또 다른 인격이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테레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체념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볼 뿐.
"……내가 남지 않으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 죽게 될 거야."
시간을 벌어야 한다.
모두가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그리고 시온 길드와 성십자 기사단에서 움직여 주기로 했어."
대천사의 강림.
그걸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그 대상이 설령 크라켄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승산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믿다니. 순딩이. 넌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멍청이야. 알고 있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테레사가 힘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파르르.
백색 갑주가 가늘게 떨렸다.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하자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쿠쿠쿠쿠!
단순히 이동하면서 생기는 물살만으로도 쓰나미가 일어날 지경이다.
어느새 크라켄이 십여 미터 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바로 그때.
콰콰콰콰!
바다가 갈라졌다.
하늘을 가릴 듯 솟구친 거대한 다리.
마치, 수십 개의 탑이 생겨난 것처럼 그 크기는 상식을 아득히 초월했다.
집채만 한 빨판들이 연신 꿈틀거렸다.
"크오오오오!"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다.
"……."
하지만, 테레사는 간신히 균형을 유지한 채 아공간을 개방했다.
나타난 건 순백의 깃발.
탑의 영웅 중 하나가 보유했던 성유물이었다.
[성유물이 개방됩니다!]
눈부신 빛과 함께.
한 영웅의 기억이 테레사의 몸에 스며들었다.
구국(救國)의 성녀(聖女), '잔다르크'.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평범한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마도… 거짓이겠지.
난데없이 나타난 천사보다는 새로운 희망을 위해 고위 귀족들이 '만들어낸 일화'라는 설이 더욱 설득력 있었으니까.
하지만, 소녀는 믿었다.
적어도 그녀 자신이 천사의 계시를 받았노라고.
그것이 진실이든 혹은 만들어진 진실이든.
잔다르크는 승리의 구심점이 되어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였다.
시골의 이름 없는 소녀가 무너져가던 나라를 구해낸 것이다.
허나, 이 이야기의 끝은 해피 엔딩이 아니다.
왕보다 인기가 많아진 성녀 따위,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위험만 될 뿐이었기에.
결국, 구국의 영웅은 한낱 이교도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지독한 이야기다.
[영웅의 기억이 이어집니다.]
장면이 바뀐다.
높게 쌓인 장작과.
묶여 있는 소녀가 보인다.
소녀는 더 이상 성녀가 아니다.
소녀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그저 죽음을 목전에 둔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데도.
최후에 최후까지 소녀는 성녀로서의 삶을 지켰다.
그렇기에 별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영웅 '구국의 성녀'가 특수 능력 '혼신일체(渾身一體)'의 허가를 구합니다.]
따라서 '별의 가호'는 일종의 저주다.
시전자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신성력은 결국엔 그 자신마저 태워버릴 테니까.
남은 건 성녀의 이름을 잇는 이가 또 다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냐고 묻는 것뿐.
그 질문에….
"받아들일게요."
테레사가 마력을 해방했다.
[고유성창(固有聖唱)….]
고민 따윈 없었다.
시련의 탑이 나타나기 전에도. 그리고 탑이 나타난 후에도.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소망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하얀 불꽃'이 발동됩니다!]
화르륵!
성화(聖火).
눈부신 백염이 주위를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