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성녀의 책무 (2)
어둠이 걷힌다.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광명.
거칠었던 파도마저 잠잠해졌다.
쿠쿠쿠쿠쿠!
스스로를 태우는 마력은 그 순도가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쿵!
테레사가 '잔다르크의 깃발'을 꼿꼿이 세웠다.
[영웅 한정 스킬 '오를레앙의 기적'이 발동됩니다!]
[수성의 힘에 따라 함선의 방어력이 1000%만큼 상승합니다!(10분)]
[마법 저항력이 100%만큼 상승하며, 사기가 200%만큼 상승합니다!(10분)]
배 위로 황금빛 방벽이 펼쳐졌다.
그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
"이곳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마치, 폭풍에 맞서는 외로운 등대처럼.
최후의 성녀가 그 책무를 다하기 위해 나섰다.
"크오오오!"
크라켄이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쩌렁쩌렁 울리는 대기.
새하얀 빛과 성스러운 기운이 거슬린다는 듯, 다리가 수면 위로 낙하했다.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이 방벽을 강타했다.
벽을 따라 그어지는 균열.
아포칼립스를 상징하는 존재답게, 단순한 공격마저도 규격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
테레사는 그 일격을 견뎌냈다.
배가 크게 휘청이긴 했지만, 부서진 곳은 없었다.
당연히, 크라켄으로서는 미물의 반항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쿠쿠쿠쿠쿠….
순식간에 수많은 다리들이 함선을 휘감았다.
가볍게 힘을 주는 것으로 통째로 가라앉혀버릴 생각에서다.
바로 그때.
툭.
테레사가 앞으로 움직였다.
배를 박차고 크라켄의 다리에 올라탄 테레사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검신을 따라 타오르는 은은한 신성력.
퍼퍼퍽!
다리에 여러 줄기의 상흔이 생겼다.
워낙에 방어력이 뛰어난 크라켄이었으나, '하얀 불꽃'을 발동한 테레사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기란 어려웠다.
긴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테레사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반대 쪽 다리를 향해 도약했다.
빠르다.
다리들이 낚아채기 전에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으니까.
탓!
[Lv19 '성호(聖號)'가 발동됩니다!]
[Lv24 '성호(聖號)'가 발동됩니다!]
검에 맺힌 두 개의 기운.
테레사와 잔다르크의 성호가 하나로 합쳐졌다.
금빛으로 물든 한 쌍의 십자가가 나타났다.
콰콰콰콰!
"그아아아!"
크라켄의 다리 하나가 벌집으로 변했다.
신성력에 닿은 상처는 더욱더 빠르게 악화 됐다.
크라켄이 몸을 비틀었다.
격노에 가득 찬 비명.
피해가 컸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한 인간이 자신에게 작은 상처를 입혔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단숨에 짓이겨 죽인다.
콰드득!
배의 밑창이 일격에 박살났다.
오를레앙의 기적을 만든 방벽과 각종 마법으로도 배를 지켜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덴의 신격들이 침묵합니다.]
거듭 소리쳤지만, 에덴은 테레사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어떤 것 때문인진 몰라도 천사들은 침묵했다.
테레사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상관없어.'
애초에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
이 괴물을 상대로 이긴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최대한 파편들을 이용해 도망 다니면서, 크라켄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뿐이다.
테레사가 파편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온다.
콰콰콰콰콰!
수면 아래로 크라켄의 다리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나하나가 건물에 비견될 만큼,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공포감에 전신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탓!
그래도 움직인다.
잔다르크의 가호와 하얀 불꽃의 능력을 믿고.마지막까지 발버둥 쳐야만 한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 * *
"성녀라…. 확실히 짜증나는군."
위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하스팅이 손톱을 연신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자잘한 변수들을 차단해야 하는데….
테레사가 그 계획을 망치고 있었다.
하필이면, 신격들이나 관리자들도 다루기 힘든 잔다르크의 인정을 받은 것도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영웅 놀이와 희생정신에 심취한 골칫덩어리에 그 뒤를 잇는 머저리의 조합이라니…."
1분 1초가 중요한 지금에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진혁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크라켄이 등장한 시점에서 무슨 수를 쓰든 결과가 바뀌진 않을 테지만….
어째서일까?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 느긋하게 구경이나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계획을 보란 듯이 박살내버린 당사자가 다름 아닌 진혁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타미아만 발이 묶이지 않았어도… 이렇게 무리를 하지 않아도 됐건만."
고대룡의 뼈.
타미아와 엑센시온과 함께 입수하여 준비한 비장의 재료다.
이걸 무기로서 제대로 완성하기만 한다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최강의 카드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타미아를 포함한 상층부의 용들이 분쟁에 휩싸인 탓에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에이션트급 드래곤들과 장로들까지 개입하면서 후계자 자리를 놓고 파벌이 나뉘기 시작했기 때문.
결국.
당분간은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톡…. 톡….
하스팅이 불안한 듯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이렇게 된 이상 크라켄을 통해 모든 걸 잘 마무리 지어야 한다.
연이은 실패로 인해 태고의 존재들이 언짢아하고 있는 현 시점.
더 이상 꼬투리를 잡힐 일은 막아야 한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럴 순 없지. 고작 인간 한 명 때문에 천 년을 넘게 쌓아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순 없어."
어쩌면 상급 관리자의 지휘를 박탈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엔 목숨까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전신에 차가운 한기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 * *
콰아앙!
"아아악!"
거친 물보라와 함께, 테레사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지금까지 최대한 도망 다녔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호흡.
잔다르크의 깃발 역시 처음의 빛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시간은 제법 많이 벌었다.
이 정도면 대부분의 함대들은 모두 안전한 곳까지 빠져나갔을 것이다.
-괜찮은 거야?
또 다른 인격이 말을 걸어온다.
"괜찮아. 이거면 됐어…."
괜찮을 리 없다.
어찌 괜찮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너무 늦었다.
하늘로 높게 솟구친 다리들은 당장이라도 바다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뭉개 버릴 기세였으니까.
테레사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부우우웅!
다리들이 동시에 낙하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콰콰콰쾅!
화려한 폭발이 일어났다.
"크오오오!"
크라켄으로부터 아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지원이 왔다고?
테레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럴 리가.
이미 모든 이들이 반대쪽으로 도망친 걸 확인했다.
기껏 살게 되었는데, 굳이 다시 사지로 올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다른 쪽은….
'더 말이 안 돼.'
차갑게 내쳐 버렸다. 더 이상은 함께 할 수 없다며.
모두의 앞에서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는데, 그 사람이 와줄 일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어쩌면….
테레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진혁이 서 있었다.
"왜…죠?"
정말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희 회사는 제가 퇴사시키기 전까진 제 발로 나갈 수 없거든요. 뭐,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테레사 씨에겐 회랑에 갔을 때부터 함께한 인연도 있고요."
사원의 안전은 회사의 대표로서 가장 신경 쓰는 것 중 하나다.
무엇보다 잔다르크와의 높은 유대로 인해 얻게 된 고유 성창 '하얀 불꽃'을 복사할 수 있게 됐는데….
절대 덜떨어진 성십자 기사단이나 나머지 대형 길드의 희생양이 되게 만들 순 없지.
물론, 그런 걸 대놓고 말하진 못하니, 여기선 적당한 멘트를 섞어주는 게 최선책이리라.
진혁의 입가에 만들어낸 듯한 미소가 걸렸다.
여기선 조금 더 다독여주도록 하자.
"테레사 씨가 모든 걸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모든 것을 구해야 한다는 이상향은 그저 이상향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이상향이라 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자신마저 희생해야만 한다면….
그 삶에 무슨 행복과 의미가 있겠는가?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 지닌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적어도 성녀에게는 그러했다.
"조금은…."
테레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려놔도 되는 걸까요?"
압도적인 중압감.
암스테르담을 구했던 것처럼.
리치로부터 유럽을 구해야 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모든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야만 한다는 게 너무나 버거웠다.
"내려놓으셔도 돼요. 적어도 저희 앞에서라면요."
모든 걸 내팽개치란 이야기는 아니다.
테레사의 천성 상 그런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억지로 다른 이들을 버리게 만든다고 한들, 평생을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겠지.
단지….
그 짐을 조금 거들어주고 싶을 뿐이다.
"문어 주제에 감히 우리 사원을 건드리다니. 아포칼립스고 나발이고 간에 이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려줘야지. 안 그래?"
진혁의 말에 배에 있던 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바, 바보 성녀에게 빚 하나 지워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엘리스는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입술을 쌜쭉 내밀었다.
"젠장. 저런 놈을 앞에 두고 말은 잘도 지껄여대는군.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천유성이 검을 뽑았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주군."
월영 역시 언제라도 배 위에서 몸을 날릴 채비를 했다.
드디어 시작이다.
29층의 성패를 결정짓게 될 최후의 레이드가.
파츠츠!
"모오오기이이!"
고구마의 브레스를 기점으로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콰콰콰콰콰콰!
엄청난 마력 폭풍이 크라켄의 정면을 강타했다.
크라켄이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력이었다.
이어진 건 이태민의 드론들이 떨어뜨린 백린탄이었다.
철컹! 철컹!
……콰콰쾅!
물속에서도 타들어가는 화염.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 위로 짙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겠습니다."
동료들이 벌어준 틈.
테레사를 안은 진혁이 재빨리 화이트 펄 호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볍게 파편들을 밟고 가속한 진혁이 100m가 넘게 떨어져 있는 배까지 도달했다.
"고마…워요."
테레사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그런 미소였다.
역시, 상황이 썩 좋진 않다.
무리하게 잔다르크의 '하얀 불꽃'을 사용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생명력을 갉아먹어버린 탓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목숨을 잃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때였다.
['에덴'의 몇몇 신격들이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상태창이 나타났다.
지금껏 테레사가 죽을 상황에 처했어도 잠자코 있던 천사들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