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크라켄 (1)
"주군. 우측은 제가 맡겠습니다."
카카칵!
천유성에 이어 월영까지 가세했다.
달인의 경지에 오른 두 검객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크라켄의 위를 누볐다.
검강이 실린 검이 움직일 때마다 길고긴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때.
후끈한 염분이 피부에 와닿았다.
이건….
틀림없다.
크라켄이 본격적으로 '페이즈 2'를 발동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들 물러서!"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나온 것은 은색 빛을 머금은 단약.
아틀란티스에 갔을 당시 참치 초밥에게서 얻은 '인어족의 비늘'과 '천년 고둥의 껍질', '심해수'를 가공해 만든 특수 아이템이었다.
여기에 마력을 3mm 두께로 코팅해 바다에 떨어뜨린다면….
첨벙!
['생츄어리 필드 - 마지막 성역'이 발동됩니다!]
[모든 공격이 펼쳐지기 전에 그 위치가 표시됩니다(0h: 29m: 59s)]
아포칼립스라는 재앙에 맞서기 위해.
시련의 탑에서는 플레이어들에게 몇몇 돌파구를 제공해준다.
좋게 말하면, 극악의 상황 속에서 숨통을 트여주기 위한 배려고.
나쁘게 말하면 가능성 없는 싸움에 던져주는 희망고문일 것이다.
어쨌든 잘만 활용한다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올려줄 터.
이걸로 최소한의 안전망은 마련된 셈이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떤 식의 공격이 올지, 어떤 타이밍에 파고들어야 하고 빠져야할지는 알고 있는데….
손발이 되어 움직여줄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한쪽에서 또 다른 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아를 위시한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이다.
퍼어엉! 콰쾅!
폭발음과 함께 각종 마법들이 쏟아졌다.
영창을 제법 오래했는지 고서클로 이루어진 마법들이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반대쪽에선 오지원이 이끄는 적아 길드의 랭커들이 가세했다.
마지막으로 사무라이 길드의 함선들까지 보였다.
타케시가 길드 마스터인 요시오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이렇게 해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냐?"
"제 예언이 언제 틀린 적 있습니까?"
"알지, 알아.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믿으십쇼. 제가 이 장면을 꿈속에서 그대로 봤습니다."
각기 다른 파도를 넘어 다가오는 함선들.
'그래도 다들 겁쟁이만 있는 건 아니네.'
손이 제법 모자랐는데,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 *
진혁이 화이트펄 호 위에서 전장을 살폈다.
왼쪽 측면을 따라 접근하고 있는 한 무리의 해파리들.
중앙에서는 크기 10m가 넘는 백상아리들이 헤엄쳐왔다.
각각 크라켄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닌 몬스터들이었다.
우우웅!
'생츄어리'에 의해 크라켄의 움직임이 1초 먼저 포착되었다.
입에서 뿜어낸 기포를 이용한 공격.
이건 초기 충격을 분산시키는 게 관건이다.
"그오오오오!"
굉음과 함께 무수히 많은 기포들이 배를 향해 뿜어졌다.
제대로 맞았다간 배가 통째로 뒤집힐 수 있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1초 먼저 대비할 수 있는 진혁은 '기계군주'를 통해 기포의 방향을 어긋나게 만드는 방파제를 투척했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번엔 하늘에서 적색 섬광이 맺히기 시작했다.
공격이 떨어지는 지점이 무수히 표시된다.
이건 일일이 막기엔 무리다.
번개 하나하나가 지닌 위력이 말도 안 되게 강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화력이 집중되는 게 '화이트펄호'라는 것.
진혁이 순식간에 빙하조형으로 번개가 낙하되는 지점을 표시했다.
"으아아아! 형! 아니, 뭔 시간이… 잠깐, 잠깐 타임!"
이태민이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배를 몰았다.
파치칙!
파츳!
붉은 번개가 사정없이 떨어졌다.
어떻게든 돛대만은 사수하며 화이트펄호가 좌우로 움직였다.
갑판 위에 구멍이 뚫렸지만, 가까스로 침몰하는 것만은 막았다.
과거 탑을 오르며 여러 번 합을 맞춰 왔던 게 톡톡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태민아. 믿고 있었어."
"아니, 형. 믿고 자시고. 또 이러면 진짜 죽어요. 아직도 손발이 벌벌 떨린다고요."
이태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불만은 알겠는데.
그걸 들어주고 있을 여유는 없다.
"해파리들부터 처리 부탁합니다!"
진혁이 지원을 온 이들에게 외쳤다.
하늘에서 떨어진 붉은 번개는 크라켄의 주위를 부유하는 해파리들 속으로 저장되는 특징이 있는데, 저걸 가만히 방치했다간 이후에 핵폭발에 버금가는 대참사가 일어나게 될 수 있다.
사전에 미리미리 처리해둬야 한다는 소리다.
"해파리… 알겠어요!"
"강진혁 플레이어님 말 들었지? 랭커들은 당장 움직여라!"
"마스터님. 해파리랍니다. 닥치고 해파리부터 죽이세요. 그거 말고 해파리라고요. 이 멍청한 양반아! 흐물흐물한 거!"
지원을 온 플레이어들이 즉각 움직였다.
이미 신뢰 관계가 구축되어 있었기에, 토를 달거나 시간을 끄는 일은 없었다.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각자가 맡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둔 틈을 이용해….
크라켄의 공격에 공백이 비는 타이밍이 찾아왔다.
"모오오기이이!"
[고구마가 Lv?? '브레스'를 발동합니다!]
전투가 시작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마정석을 씹어 삼키며 마력을 모으던 고구마가 입을 벌렸다.
일점으로 응축되었던 빛이 한꺼번에 해방되었다.
콰콰콰콰콰!
허공을 꿰뚫는 빛.
직선으로 내달린 섬광이 크라켄의 본체를 강타했다.
콰아앙!
구름이 갈라질 정도로 그 위력은 차원이 달랐다.
과연 고대종의 브레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수백 개의 '블러드 스피어'를 꺼내든 엘리스 역시 질세라 융단 폭격을 퍼부었다.
"먹지도 못하는 덩어리 주제에 감히, 그 더러운 촉수들을 누구에게 들이대는 것이냐!"
퍼퍼퍼퍽!
크라켄의 몸이 붉은 산처럼 변해버렸다.
한 층계를 담당하는 보스 몬스터라 할지라도 버텨내기 힘든 공격을 두 번이나 정통으로 맞았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자욱한 연기 너머에서 나타난 건 여전히 건재한 크라켄이다.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 회복하는 게 빠른 데다, 워낙에 덩치도 거대했기 때문에 유의미한 타격을 가하기 힘들었다.
아니,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해냈다놈의 화를 한계치까지 이르게 한 것 말이다.
"크오오오!"
크라켄의 포효소리가 바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황도십이궁 상태에서 케이시와 주드로도 최상위 랭커급일 텐데… 거기에 고구마와 엘리스로도 안 된다는 건가.'
대충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효과가 없다니.
막상 결과를 보니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크라켄의 다리들이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쿠쿠쿠쿠!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크라켄이 특수 스킬 '바다의 분노'를 발동합니다!]
좌우로 흔들리는 파도.
거센 물살은 이내 소용돌이로 변했다.
'이건 좀 위험한데….'
진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크라켄의 주위에는 크기가 몇십 미터짜리 소용돌이가 가장 큰 규모에 속했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크기와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마치, 블랙홀처럼.
바다 위에 떠 있는 모든 배들이 크라켄이 있는 곳을 향해 모이게 된다는 뜻이다.
'스킬이 완전히 발동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
진혁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발동했다.
양 어깨 위로 4개의 거대한 팔이 나타났다.
각각의 손이 들고 있는 건 서로 다른 종류의 마력으로 만든 창이었다.
'별의 가호'와 '만다라', '혈마기'와 '태초의 불꽃'.
트리플 매직으로 인해 강화된 창이 수면 아래로 날아갔다.
…콰아앙!
물 위로 10m 높이의 물보라가 솟구쳤다.
꽤나 공을 들인 일격이다.
'바람의 영역'으로 가속도까지 실었으니까.
그런데도….
소용돌이의 위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몰아치며, 그 범위를 넓혀나가고 있었다.
"젠장…."
저 멀리 수평선에서 다수의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형 길드의 연합으로 구성된 함대들이었다.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을 터.
그럼에도 모두가 바다에 남아 있다는 건….
적당히 거리를 벌리기만 하고 육지로는 가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덕분에 제대로 된 지옥이 펼쳐지게 생겼다.
크라켄의 기본 패시브 중 하나가 바로 침몰시킨 함선의 숫자 당 공격력이 5%씩 증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헤아릴 수 있는 함선만 100척 이상.
전부 다 침몰한다 가정할 경우 몇 개의 층계를 포식하는 아포칼립스로 커져 버릴 수도 있었다.
* * *
"비, 빌어먹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바다가…."
완전히 방향을 상실해버린 배들이 해류에 휩쓸려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항해에 관련된 고유 능력과 스킬들까지 전부 먹히지 않는 통에, 그저 물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필드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마법이 발동된 것 같습니다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빌어먹을. 방법이 없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결국, 함대들이 도착한 곳은….
"이럴 수가…."
"전, 전투 준비!"
"크라켄이다!"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지옥 한복판이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자 함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육탄 공격만 할 줄 알았던 크라켄이 소용돌이를 만들어 바다까지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테레사. 이 멍청한 건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 하고 이게 뭐 하는 짓거린 게냐!"
성십자 기사단의 로테인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테레사라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때마침.
로테인의 눈에 테레사가 들어왔다.
화이트펄호에서 뻔뻔하게 서 있는 걸 보니,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연명한 게 틀림없다.
"테레사!"
로테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로테인 부기사단장님?"
"어째서 크라켄을 막지 못하고 우리들을 이 사지로 불러들인 건가? 내가 분명 목숨을 던져서라도 막으라 했을 텐데!"
"그게……."
"변명은 됐다! 팔팔한 걸 보니, 자기 몸 하나 챙기기도 바빴던 거겠지. 덕분에 무고한 어린 양들만 죽어나게 생겼군. 젠장할."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테레사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면 지금이라도 나서서…."
"거, 꽁지 빠지게 도망 다니기만 하던 양반이 이제 와서 누구 집 뽀삐마냥 짖어대네. 뒷광고 하다가 걸린 비제이도 그보단 낯짝이 덜 두껍겠다."
로테인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진혁이었다.
"도, 도망? 게다가 낯짝이 어쩌고 저째? 지금 말 다 하신 겁니까? 강진혁 플레이어?"
로테인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렸다.
"아직 덜 했습니다."
이제 막 시작했는데, 다하긴 뭘 다해?
목숨을 걸고 싸운 테레사에게 저딴 말을 하는 놈에겐 해 줄 말이 한 가지밖에 없다.
"나이 먹을 만큼 드신 양반이 그 반밖에 안 산 여자한테 모든 책임을 다 넘기고 도망쳤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당신처럼 치졸하고 옹졸한 놈팽이는 에덴에 속한 천사들도 손절 칠 테니, 이참에 마계로 전향이나 하든가. 주기도문에 적힌 글자 수 만큼 맞기 싫으면 찍소리도 하지 말고 머리나 박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