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격변하는 세계 (2)
시련의 탑이 나타난 이후. 세계는 변했다.
기존의 법이나 관습 따위가 더 이상 새로운 세계를 대변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성한 플레이어들의 힘은 나날이 높아졌고. 그를 막을 수 있는 정부의 권한은 나날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된 바티칸은 급진적인 변혁을 꾀했다.
기존의 튼튼한 사회기반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교도를 가차 없이 신문했고. 에덴과의 소통을 통해 다수의 성기사들을 배출했다.
그렇기에, 단기간에 대형 길드들조차도 무시하기 힘든 거대 세력으로 성장해버린 것이다.
특히 '이단심문관'이라 불리는 플레이어들은 전원이 '에덴'의 사도로 간택받은 랭커들이었다.
"테레사 씨."
새로운 바티칸을 상징하는 문양.
"지금 즉시 바티칸으로 소환하라는 추기경님의 명령입니다."
29층에서의 일을 두고….
……그 희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청문회가 잡혔다.
"얌전히 따라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소란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숫자는 셋.
희미하게 신성력을 끌어올리는 건 무력시위의 일종이리라.
웅성이던 손님들이 빠르게 쫓겨났다.
바티칸에서 온 수행원들이 카페를 완전히 격리시켜버린 것이다.
"저, 저는…."
테레사가 곤란한 듯 말을 더듬었다.
로젠베르크 가문이 엮여 있는 이상 소환장을 함부로 무시할 순 없다. 가문에 누가 될뿐더러, 무엇보다 테레사 본인이 공식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곳이 유럽 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순히 따라간다면 결코 좋은 꼴을 보기 힘들었다.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있는 바티칸 내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툭!
이단심문관의 가슴팍에 검집이 부딪쳤다.
"누구 마음대로 데리고 가겠다는 거지?"
천유성이 싸늘한 기운을 쏟아냈다.
"당신이 그 유명한 천유성 플레이어님이군요. 분명…. 성질이 꽤나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알고 있으면 조용히 꺼져라. 전부 베어버리기 전에."
"흐음. 지금, 외부인이 바티칸의 일에 간섭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외부인이라고? 테레사 씨는 우리 멤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신성한 대업과 한낱 길드를 같은 선상에 놓다니… 과연, 죄인들다운 생각이군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어찌나 그리 한결같은지. 이젠 놀랍지도 않습니다."
이단심문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나머지 두 명도 한 마디씩 덧붙였다.
"방해한다면 국가 차원의 문제가 될 겁니다. 대형 길드라 해서 온 나라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을 텐데요?"
"게다가 당신들이라면 에덴을 건드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특히, 곧 있을 30층에서 테레사 씨가 많이 곤란해질 테니까요."
에덴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 플레이어들.
특히, 사도로 구성된 이단심문관들은 각각의 천사들이 보유한 성유물까지 소지하고 있었다.
이것이라면 조금 늦게 시작했다는 후발대의 단점을 보완하고도 남을 터.
이단심문관들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협박이 먹힐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아니었다.
"너희 뒤에 그 날개 달린 놈들이 있다는 건 알겠다. 그래서, 그게 어쩌라는 거지? 겁먹은 표정이라도 지어달라는 거냐?"
스릉!
천유성이 검을 뽑았다.
"기어이…."
"원한다면 상대해드리죠."
상대 쪽에서도 각자의 무기를 꺼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하하호호 하던 웃음소리는 간데없고. 상위 랭커들의 숨막힐 듯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바로 그때.
"주접들 그만 떨고 앉으세요. 무식하게 칼부터 휘두르려하지 말고."
진혁이 생긋 웃었다.
"……."
천유성이 움찔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다소곳이 자리에 앉은 건 덤이었다.
저 웃음이 지닌 의미가 뭔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단심문관들은 진혁의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제 와서 대화는 무슨…."
"다 필요 없으니 얌전히 테레사 씨를 넘기십시오."
……곱게 말해서는 못 알아처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하아…."
진혁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순간, 엄청난 마력이 테이블 주위를 짓눌렀다.
"내가 말했잖아. 앉으라고."
쿠쿠쿠쿠!
"커억…?"
"끄으으…."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감.
마치, 현현한 천사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다.
그러나,설령 죽을 걸 알더라도 개의치 않는 게 바티칸에 소속된 사냥개들이었다.
"이, 이까짓 거!"
"우린 천사들의 선택을 받은 사도들이란 말이다!"
파츠츠!
['오노마의 성흔'이 발동됩니다!]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70cm 길이의 검에 눈부신 광채가 깃들었다.
에덴의 상위 천사들이 사용하는 권능.
'오노마의 성흔'이다.
평범한 신성력보다도 훨씬 상위 격인 이 힘은 피격 시 상대의 마력을 날려버리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맞부딪치면 칠수록 힘이 빠지게 된다는 뜻이다.
진혁이 횡으로 나오는 검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굳이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다면야…."
아주 제대로 짓밟아주는 수밖에.
가볍고.
빠르게.
최소한의 동작으로 움직인 진혁이 그대로 주먹을 내리쳤다.
콰앙!
단순히 주먹을 휘두르는 거라곤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테이블이 산산조각나며, 사람이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홍련의 손잡이 부분이 뒤에서 오던 또 다른 이단심문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뿌각!
"크아악!"
갈비뼈가 부러지는 격통.
난다 긴다 하는 이단심문관들이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필살을 자랑하던 오노마의 성흔이 이토록 무력할 줄이야.
"……영상에서 보던 것하곤 차원이 다르군. 과연, 모두가 적으로 삼고 싶어하지 않을 만해."
마지막 남은 금발의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알면서 왜 무리하게 덤비는 건지 모르겠네. 신념이라는 게 전치 12주보다 더 중요한 건가?"
"너는 평생을 걸려도 모를 일이다. 신의 뜻이라는 게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전부."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진혁이 재차 자세를 잡았다.
이미 물이 엎질러진 이상, 단숨에 상대를 제압하고 한상진이 오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바티칸의 입김이 얼마나 세든, 이쪽도 국가 차원에서 대응을 해버리면 그뿐.
만약 정부가 곤란하다는 스탠스를 취하더라도 고인물 코퍼레이션이란 이름만으로 능히 이번 일을 무마시켜버릴 수 있었다.
억지로라도 말이다.
그만큼 고인물 코퍼레이션은 강대국들도 어찌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 있었다.
'하긴. 이런 광신도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벌집을 건드리겠어.'
이미 남지 대형 길드들과도 서열 정리가 끝난 상황.
유일하게 주제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게 이 녀석들이었다.
우우웅!
남자의 검을 타고 금빛 섬광이 타올랐다.
대장격답게 좀 전에 상대했던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운이다.
심지어 유형화된 황금색 마력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좀 심한데?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순도 높은 성흔을 발현할 수가 있는 거지?
뭔가 좀 이상하다.
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저런 감응력을 지니고 있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진혁이 '탐식의 눈'을 발동했다.
띠링!
[인물 정보]
이름: 케네스
레벨: 129
고유 능력: 오노마의 성흔
스킬: '신성강화' Lv19, '성스러운 재생' Lv18, '연대의 힘' Lv18. '천사의 후견(패시브)' Lv17
복사 조건: 천사와 인간의 혼혈 '네피림'은 성스러우면서 동시에 저주받은 존재입니다. 에덴의 입장에서 쓸모 있는 장기말이지만, 동시에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결과물입니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묵묵히 자신의 의무만을 관철하는 존재. 그런 네피림의 능력을 복사하기 위해선 그를 개종(改宗) 시켜야 합니다.
상태창을 보고 나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랬군. 그래서 이렇게 배짱을 부렸던 거였나.
'여기서 네피림을 보다니.'
천사와 인간의 혼혈.
네피림은 그 존재만큼이나 희귀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주자의 신분이면서 아무런 제약도 없이 탑 밖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질적인 능력이 말이다.
게다가 네피림에게 상처를 입힐 경우 천사가 상처를 입힌 적에게 직접 위해를 가할 수 있기에. 네피림을 건드리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바티칸에서 온 성기사들이 그토록 뒤가 없이 날뛰는 게 이해가 됐다.
천사들의 지원은 물론, 탑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네피림들까지 있으니 당연히 무서운 게 없을 수밖에.
'재밌네.'
이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네피림만 잘 구워삶을 수 있으면 30층에 갔을 때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을 터.
진혁의 머릿속에 또 다시 음흉한 생각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거지? 방금 전까진 거리낌 없이 나섰으면서?'
진혁과 대치하고 있던 케네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내 존재를 눈치챈 건 아닐 테고.'
평범한 인간이 네피림에 대해서 알 리가 없다.
바티칸의 상층부와 소수의 이단심문관들만 알고 있는 게 자신의 정체였으니까.
하지만.
능글맞게 웃으며 단검을 집어넣는 진혁을 보자니 찜찜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스윽.
진혁이 케네스의 간격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나 무방비한 모습에 순간 케네스의 사고가 멍해졌다.
공격을 해야 한다는 반응이 0.1초가량 늦어졌다.
"큭!"
케네스가 뒤늦게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런데.
"흐음, 이거 설마 했는데, 네피림이었나? 어쩐지 뭔가 좀 다르더라니. 그런데, 명색이 네피림이라는 놈이 대천사의 사도에게도 칼을 들이미나 보지?"
진혁의 입에서 터무니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너… 어떻게 그걸…?"
어떻게긴.
"내가 진짜이니까 그렇지. 아니면, 내가 어떻게 네 정체를 알고 있겠어?"
태연스러운 말이 이어졌다.
연기력이라면 이미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터라 돌멩이보고 금이라고 해도 설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목소리 톤이나 비언어적인 제스처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나 평소에 쌓아온 업보 때문이었을까?
주위의 반응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지. 마계 쪽이라면 모를까. 천사들도 눈이 삐지 않고서야 네놈을 선택할 리가."
"진혁 씨…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계약자는 정말 여러 의미에서 대단하구나."
지켜보던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까지 혀를 내둘렀다.
저 자식들은 같은 편인지 적인지 가끔 구분이 안 간다.
"믿…을 수 없다. 대천사께서 너 같은 사교도를 선택했을 리 없어. 절대, 절대로…."
당연한 말이지만, 케네스 역시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건 근거 없는 허세가 아니다.
바지 벗고 있던 대천사도 달려오게 만들 마법의 단어가 있었으니까.
"커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진혁이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네크로 읍읍…!"
그러자.
[신격 '승리를 알리는 자'가 다급히 응답합니다!]
['곤충 소리가 나는 책'에 대한 단서가 있다면 즉시 알려줄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진혁과 케네스의 앞에 황금빛 상태창이 나타났다.
틀림없이 에덴의 대천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메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