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프로듀스 천마 101 (1)
"뭐, 뭐야?"
"누가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선택하는 걸 방해하는 거지?"
"그것도 8성급 과제를…."
"제정신인가?"
"자살 방법도 다양하긴 하군."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커졌다.
감히,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었다.
진혁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봤다.
'진짜 가지가지하네.'
진혁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렴풋이.
범인이 누구인진 알고 있었다.
단지,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
"고작, 그런 걸로 레이디에 대한 내 마음을 멈출 순 없다! 이젠 방심 따윈 하지 않을 터. 다시 한 번 정정당당하게 맞서라."
루시우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1시간은 족히 기절해 있을 만큼 세게 쳤건만….
랭커를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다음엔 손잡이 부분이 아니라 날 부분으로 찌르든가 해야지.
"여러 의미로 대단한 친구로군. 저렇게 꿋꿋하게 덤비는 놈은 처음 본다."
천유성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게. 진짜 져도 져도 또 악귀처럼 덤벼대는 거머리는 처음이야. 매번 뇌가 리셋이라도 되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치, 유성아?"
"꼭 날 보고 들으라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차, 착각이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조심해라. 꼭 앞에서만 칼을 맞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엄. 잘 알고 있지. 그나저나. 저 녀석 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러다간 우리 테마가 엉망이 되어버리겠어."
진혁은 천유성과 함께 테마를 클리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루시우스가 저리 날뛰면 코인 소모가 극심할 수밖에.
"쳇…."
천유성이 혀를 찼다.
자신의 코인도 투자한 상황이었기에,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었다.
"저 녀석을 베어버릴 테니, 그 사이에 테마를 확정 지어라."
애초에 이번 테마 결정전에서 무력을 사용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양 측이 모두 동의만 한다면, 그러한 방법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단지, 나머지 세력들은 서로의 전력손실을 우려해 코인을 사용하는 것이었을 뿐.
스릉!
녹색 빛을 머금은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류화.
저주받은 요검에 강기가 주입되자, 공기를 갉아먹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키이이이!
"그대는… 천유성 플레이어 아닙니까?"
"날 알고 있나?"
"검으로 정점에 오른 랭커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과는 한 번쯤 검을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
"……흐음. 의외로 보는 눈이 좀 있는 놈이었군."
"하지만, 불한당에게 협력하는 이상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봐드릴 순 없습니다. 기사도에 따라 선공은 양보해 드리죠."
"좋다. 사양하지 않지."
바보와 바보가 싸우게 되는 순간이다.
카카카캉!
검과 검이 오고 갔다.
그 사이, 진혁은 상대의 배팅 시간이 다 되길 기다렸다.
3분 동안 응답이 없을 시 자동으로 종료되는 특성.
"자, 잠깐! 안 돼!"
루시우스가 다급히 외쳤다.
3분 내에 승부를 내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프로듀스 101 '진짜 천마를 골라라'의 테마가 결정되었습니다.]
[플레이어 '강진혁'과 플레이어 '천유성'이 해당 지역으로 강제 전송됩니다!]
우우우웅!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 * *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수많은 천마들.
누군가의 몸에 빙의한 천마, 요리하는 천마, 헌터로 활동하는 천마, 대장장이 천마, 황제가 되어버린 천마, 심지어 연예인을 하거나 재벌이 되거나 육아를 하는 천마까지 있다.
이제는 종잡을 수 없이 많아진 천마 덕에 시련의 탑에서는 그들 중 진짜를 가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오직 한 명만이.
천마(天魔)의 이름을 이을 수 있도록.
쏴아아아….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상쾌하면서 깊은 공기는 꽤나 오랜만에 느껴본다.
이곳은 무림(武林).
탑 내부에서도 가장 정순한 기가 흐르는 세계 중 하나다.
"어땠어, 그 녀석은?"
"나쁘지 않았다. 승부를 내기 전에 끝난 게 아쉽다면 아쉽군."
"너무 아쉬워하진 마. 보니까 또 덤비겠더만."
"그거야… 그렇겠지."
천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스승님들은 어디에 계시는 거냐?"
"장소는 여기가 맞고. 시간도… 맞는데. 아마, 곧 오실 거야."
진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북이 모양으로 생긴 바위 2개가 교차하는 곳. 약속했던 바로 그 장소다.
그때였다.
부스럭.
수풀이 움직이며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크하하! 드디어 찾았군!"
"제가 이쪽 길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기어코 돌아서 가더니…. 하마터면 늦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제대로 찾아왔으면 됐지. 하여간, 정파 놈들은 참을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구나."
"멍청한 마교인이랑 함께 있다면 누구나 인내심이 바닥나는 법이랍니다."
암황과 추혼사영.
무림을 양분하는 두 거물이다.
깊은 산속을 헤쳐 왔음에도 몸에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마치, 뒷산에 소풍을 나온 것처럼. 호흡 역시 흐트러지지 않았다.
"스승님!"
"스승님…."
진혁과 천유성이 동시에 외쳤다.
"오오오! 그래.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간 무탈했느냐? 좀 마른 것 같은데, 근손실 나지 않게 잘 먹으면서 수련 좀 하라니까."
"먹을 거나 좀 보내주면서 그런 말씀 해주십쇼."
"뭐라? 지금 본좌가 땡전 한 푼이 아까워 제자를 쫄쫄 굶기는 천마신교 제일의 소인배라고 한 것이냐?"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는데…."
"오냐! 알겠다! 아주 이 산에 있는 산짐승을 모조리 잡아서 먹여주마.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거라."
쿠쿠쿠쿠!
암황의 두 다리가 풍선처럼 부풀었다.
터질 듯 꿈틀거리는 근육을 보자니, 이 노친네는 염라대왕도 피해서 갈 것 같다.
"잠…깐."
진혁이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면이 쩍쩍 갈라졌다.
"크하하하! 단백질이로구나!"
암황이 미친 듯이 숲을 가로지르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능하면 제발 가는 길에 무림맹주와 정파 10대 고수들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천리 낭떠러지에 발을 헛디디거나 맹독이 든 버섯을 집어먹으면 더더욱 좋고.
"후후. 천 공자는 건강해 보이네요. 오랜만에 수려한 얼굴을 보자니 이 스승은 마냥 행복합니다."
"스, 스승님…?"
"어머나. 애정 어린 손길을 피하면 이 스승은 슬프답니다. 흑흑."
"……알겠습니다."
천유성도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
누구에게나 함부로 해댔지만, 추혼사영한테는 꼼짝을 못 했으니까.
그리고 1시간 뒤.
사냥을 끝낸 암황이 돌아왔다.
어깨에 각종 고기들을 잔뜩 짊어진 채.
"우선 배부터 채우도록 하지. 천마께선 자시(子時)는 되어야 오실 것 같다. 어쩌면 더욱 늦으실지도 모르고."
대충 자정은 넘어야 한다는 뜻.
진혁과 천유성이 적당히 야영을 할 자리를 만들었다.
화르륵!
'태초의 불꽃'으로 구운 고기 위에….
릭에게서 받은 '브루힐 사막의 소금'을 뿌렸다.
거기에 '이세계 식당'까지 사용하자 금세 기분 좋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꿀꺽….
꼴깍!
여기저기서 목구멍을 따라 군침이 넘어갔다.
이미 식욕은 초탈한 지 오래인 암황과 추혼사영이다.
음식이란 그저 몸을 움직이기 위한 원동력일 뿐.
식도락에 빠진다는 건 무인에게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분명 그러할진대….대
체 어째서일까?
두 동공은 뚫어져라 진혁의 손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제자야."
"예. 스승님."
"크흠! 내가 재촉하는 건 아니다만, 슬슬 요리가 다 된 것 아니더냐?"
"스승님. 혹시 음식 직접 만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당연히 없다."
"그럼, 조용히 기다리십쇼. 쯧! 한창 양념 비율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정신 사납게."
"왜, 잘하고 있는 강 공자를 재촉하세요. 재촉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으면 기다리는 거라도 잘할 것이지."
"제가 보기에도 암황께선 참을성을 기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추혼사영과 천유성이 득달같이 쏘아붙였다.
"미, 미안하다.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 있으마."
암황이 머리를 긁적였다.
졸지에 죽을 죄인이 된 탓에, 근육마저 다소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역시, 맛있는 음식은 곰도 길들이는 법이지.'
진혁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평소에 갈고닦은 요리 실력 덕분에, 당분간 잔소리 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자잘한 잔심부름 역시 천유성에게 모조리 넘겨야지.
손놀림이 한층 더 빨라졌다.
"자, 이제 좀 드셔보세요. 고인물 특제 스테이크와 스튜입니다."
마침내 진혁이 잘 구운 바비큐와 스튜를 공개했다.
순간.
파팟!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젓가락과 숟가락이 오갔다.
허공에서 펼쳐진 공방전.
가장 덩이가 큰 고기를 집으려는 자와 그걸 막으려는 자들 사이의 혈투가 벌어졌다.
카카카카캉!
카아앙!
강기를 실은 젓가락과 숟가락은 이미 식기류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났다.
"어, 어떻게 이런 맛이… 잡내가 하나도 없어?"
가장 먼저 고기와 스튜를 입에 욱여넣은 암황이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사르르 녹는 게… 소고기보다 더 하군요."
추혼사영도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하군. 생긴 것 답지 않게 이런 섬세한 예술이 가능할 줄이야."
심지어 천유성까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재료가 넉넉한 덕에 많이 준비했으니까. 사양 말고 많이 드세요."
부르르….
끼고 있던 '브라함의 반지'가 강하게 떨렸다.
잔뜩 굶주린 엘리스가 날뛰고 있는 것이다.
'좀만 참아. 곧 꺼내줄 테니까.'
이 녀석도 다 좋은데 식탐은 도저히 조절이 안 된다.
회랑에 하도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더니, 맛있는 것만 보면 아주 난리가 났으니까.
그렇게 네 사람은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 * *
파츠츠!
점멸하는 붉은 스파크.
공간이 가로로 길게 갈라졌다.
"흐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곳이군."
"무림이라고 했지. 여기가?"
"그래. 멍청한 인간들이 잔뜩 모여 하루가 멀다 하고 치고받고 싸우는 세계다."
"큭큭큭! 재밌네. 마력 같지도 않은 마력을 지닌 놈들 주제에 말이야."
검은색 긴 뿔.
날렵한 체구에 아름다운 외모를 한 네 명의 남녀 마족이었다.
전원이 상위 마족으로 구성된 이들은 군타페르의 직계 혈족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옆엔 올림포스에서 온 영웅 '파리스'도 있었다.
대영웅인 아킬레우스의 뒤꿈치를 꿰뚫어 그 격이 격상된 자.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그 화살 솜씨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천마 순위 결정전이라…. 듣던 대로 골치 아픈 것만 골라서 하는군."
파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위 신격들이 결정을 내린 이상 불만을 표하거나 반발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 일이 위험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개입은 탑의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이기에, 어떤 반발 작용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종의 양날의 검.
'최악의 경우엔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 어쩌면 하스팅을 제외한 나머지 상급 관리자들이 개입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여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파리스가 바람에 섞인 기를 살폈다.
"아직 나머지 천마들이 등장하진 않았어."
최대한 많은 천마들을 포섭해, 이 무림에 있는 천마를 죽이는 것.
그리고 강진혁을 포함한 나머지 인물들까지 전부 처치하는 것.
그게 파리스가 아테나와 아레스로부터 받은 임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