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폭풍을 부르는 데이트 (1)
치치칫. 치치지지싯……!
벌레가 기어가는,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미 골목 속에 몸을 숨긴 네 사람이 다가오는 것들을 바라봤다.
쿵! 쿵! 쿵!
텅 빈 투구 사이로 번뜩이는 녹색 안광.
철제 갑옷 위로는 검은색 외피를 가진 촉수가 기어다녔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괴한 몬스터다.
“탑 밖에…… 저런 게 다니고 있다니.”
“말도 안 돼. 진짜야, 이거?”
모두가 숨을 삼켰다.
단순히 외관을 떠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기존에 알고 있는 상식을 완전히 깨버리는 종류였으니까.
게다가 골목을 따라 건물들이 있는 안쪽에는 더 불길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바티칸이라 하더니…… 완전 지옥이 따로 없구나.”
유천영의 눈동자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바로 그때.
“키이?”
철제 기사 하나가 이쪽을 바라봤다.
“들켰어!”
“마력은 지웠는데 어떻게?”
기척을 간파하는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대응해야 한다.
도망이냐, 싸움이냐.
그 선택에 대답은 곧바로 강제되었다.
“키에에에에!”
“캬아아!”
세 기의 기사가 각기 다른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무거운 철제 갑옷을 입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빠르고 가벼운 몸놀림이다.
툭…… 탓!
벽을 타고 달린 기사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다들 뒤로 오거라.”
유천영의 발에 푸른 기가 응축되었다.
선풍(旋風), ‘회축(回蹴)’.
부우웅!
무시무시한 바람소리와 함께 유천영의 다리가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였다.
콰아아앙!
가장 먼저 달려들던 기사의 투구가 그대로 우그러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에 건물까지 흔들렸다.
“연화 누나 할아버지는…… 진짜 괴물이네.”
“든든하긴 한데, 이제 시작이야.”
멜레나가 채찍을 휘둘러 벽에 달라 붙은 기사들을 떨어뜨렸다.
쿵! 쿠웅!
“크오오오!”
잔뜩 약이 오른 기사들이 더욱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꿈틀하고.
갑옷 사이에 있던 촉수들이 휘몰아쳤다.
……빠르다!
“칫!”
멜레나가 다시 한 번 채찍을 휘두르려했다.
그런데.
치이이익!
채찍이 촉수에 닿자 검게 변색되며 그대로 타들어갔다.
독 따위가 아니다.
붉은색 등급이긴 했지만, 멜레나가 보유한 채찍은 성유물 중 하나였으니까.
“닿으면 절대 안 돼!”
“골치 아프네.”
멜레나의 말에, 유연화가 혀를 찼다.
건틀릿을 착용하고 근접에서 무투를 펼치는 것이 주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근접 전투가 특기인 건 유천영도 마찬가지인 상황.
계속해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희망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몸을 빼는 것조차 쉽진 않다.
“외부와 막혔어요! 통신도 안 되고…… 저 안개가 원거리 탐지 자체를 방해하는 것 같아요.”
하늘을 날고 있는 드론들도 더듬이를 잃은 꿀벌마냥 미친 듯이 제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쿵! 쿵! 쿵!
“키이이…….”
“끼릭!”
그 와중에도 골목에선 계속해서 새로운 적이 늘어나고 있다.
마찬가지로 촉수들이 기어다니는 기괴한 형상의 조각상들이 말이다.
유일한 활로는 바티칸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뿐.
“젠장. 일단 뛰어요!”
이태민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 ⁕ ⁕
가장 먼저 발할라 산의 정상에 도착한 건 고인물 코퍼레이션이었다.
“우승자가 가려졌다!”
푸달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오오!”
“타지인이 1등이라니.”
“2등보다 좋다는 1등 아닌가!”
주위에 있던 다른 장로들도 환호성을 내질렀다.
물론, 라이챠와 나머지 유력 후보들이 우승하길 빌었던 몇몇 장로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뭔가 더러운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
“명예롭고 똑똑한 바바리안이 아닌 타지인이 우승이라니…… 아아악!”
불만을 중얼거리던 장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거 좀 비키세요. 사람 지나가는데 길 막지 말고.”
진혁이 발을 밟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타점을 제대로 노렸는지 뼈에 금이 가 버렸다.
노인 공경 따윈 개나 줘 버린 행동이었지만, 진혁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앞으로 나갔다.
“오오, 그래. 고생했다.”
“뭘요. 고생은 동료들이 전부 다 했죠. 덕분에 바바리안다운 강인한 성인식을 제대로 식견했습니다. 하하하.”
“껄껄껄. 우리 제자 놈이 아주 겸손해. 몸이 좀 비실해 보여서 그렇지. 막상 힘 쓸 때가 되면 아주 장사라네.”
“역시, 그대 제자는 뭔가 달라도 다르군. 그렇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도 없지.”
[푸달락이 고유 능력 ‘어스퀘이크’를 발동합니다!]
쿠쿠쿠쿠!
힘을 조절했기 때문에 지면이 갈라지진 않았으나,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축하하네.”
푸달락이 손을 뻗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손바닥.
저걸 맨 손으로 잡았다간 마른 오징어 쥐어짜듯 납작해질 거다.
‘족장만의 방식으로 시험해보겠다는 건가.’
외부인이 우승을 해서 일어난 불만. 그걸 잠재우기 위해선 이쪽 역시 바바리안이 숭상하는 힘을 발휘하란 뜻.
‘바바리안들다운 사고방식이네.’
뭐, 좋아.
실전압축근육.
그저 풍선처럼 커다랗기만 한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지.
이미 가장 먼저 발할라의 정상에 오른 시점에서 푸달락의 능력 또한 손에 넣었다.
[고유 능력 ‘어스퀘이크’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어스퀘이크]
입수 난이도: S
내용: 폭풍의 바바리안이라 불리는 푸달락의 고유 능력으로 온몸의 기를 방출해 지진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능력의 숙련도에 따라 일으킬 수 있는 지진의 위력은 달라지며, 진동을 읽어낼 수 있는 특수 효과 또한 함께 성장합니다.
[복사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또 다시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었다.
이걸 어떻게 융합할지는 이후의 즐거운 고민거리리라.
그리고 지금 당장은…….
[고유 능력 ‘어스퀘이크’가 발동됩니다!]
[고유 능력 ‘툼 그레이브의 오른팔’이 발동됩니다!]
두 개의 고유 능력이 동시에 발동되었다.
순간, 푸달락의 표정에 이채가 스쳤다.
‘……뭐지?’
처음 느낀 건 의구심이다.
암황이 입에 발리게 칭찬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
누가 봐도 허약해 보이는 몸을 가진 진혁이 육체적으로 강할 리는 없어 보였다.
‘그 마력인지 뭔지 하는 게 강함의 비결 아니었던가?’
분명 그럴진대.
대체 뭘까?
자신보다 훨씬 더 작고 여린 남자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이 위압감은?
무엇보다 이 특유의 진동.
‘내 능력과…… 비슷해.’
아직 덜 여물긴 했지만, 이 특유의 두근거림은 자신의 어스퀘이크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진혁이 생긋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그 순간.
쿠쿠쿠쿠쿠쿠쿠!
힘과 힘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엄청난 압력이 손과 손에 전해졌지만, 거신족의 팔은 푸달락의 힘을 무리 없이 받아냈다.
당연히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도 경악스러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뭐야?”
“어떻게 저 체구로 푸달락의 악수를 받아내는 거지?”
“왕이 봐주고 있는 건가?”
“그런 거겠지. 다른 건 몰라도 힘으로는 절대 안 될 텐데.”
당연히 그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애초에 여기 있는 모든 바바리안들 중에서 힘의 정점에 있는 게 푸달락 아니던가?
마음만 먹는다면 3m가 넘는 근육질 전사조차 낑낑대는 게 그들의 왕이 지닌 힘이었다.
그러나.
“아니다. 저 봐라. 푸달락 표정. 지금 당장이라도 똥 싸려고 하고 있다.”
“혈관이 부푼 거 보면 진짜 맞는데.”
“얼굴도 아주 빨갛게 익어있다.”
반쯤 장난삼아 시작한 거지만, 어느새 푸달락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반면, 진혁은 꽤나 여유롭게 그걸 받아내고 있었고.
-외모만 보고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
모두의 머릿속에 그 다짐이 단단히 박혔다.
진혁이 천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크읍…… 크으으음. 제, 제법 쓸 만하군. 성인식을 가장 먼저 통과한 무리를 이끌 만하다.”
푸달락이 반쯤 찌그러진 손을 애써 감췄다.
피가 안 통해 첫눈처럼 하얗게 변한 손은 어쩐지 조금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31층에서의 볼 일 역시 모두 끝났다.
이제는 탑 밖에 나가 잠시 쉬어갈 때이다.
⁕ ⁕ ⁕
-고인물 코퍼레이션 31층 공략 성공.
-언노운의 마계 입성, ‘미지의 층계에 관한 22가지 추측’.
-시련의 탑 한 주간의 특별 이슈 대공개.
각종 기사들이 쏟아졌다.
화두는 단연 마계와 31층 공략.
아직까지 한 번도 정보가 알려진 적 없던 마계 진입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아주 불더미에 마른 장작을 넣은 꼴이네.’
당분간은 이 두 가지 이야기로 온 커뮤니티가 도배될 거다.
72시간만 존재하는 모래시계를 찾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건 또 다른 방식으로 대비할 수 있으니 상관없겠지.
‘그건 그렇고, 태민이랑 연화 쪽에서 소식이 없네. 요즘 해외 입국 절차가 많이 까다로워졌다곤 하지만, 이렇게나 늦는 건 뭔가 좀 이상한데…….’
오늘 밤까지. 그 이상도 연락이 없으면 먼저 접촉을 시도해봐야겠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 짐이 많이 늦었지? 미안하구나. 준비할 게 좀 많아서.”
엘리스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호오.
진혁의 동공이 살짝 팽창했다.
한참을 뜸을 들인 데다, 절대 준비하는 걸 보면 안 된다고 난리를 떨었는데.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화려한 검은색 블라우스에 실크로 만든 하얀색 치마.
과하지 않으면서 본래의 얼굴을 잘 살리는 화장까지.
그야말로 완벽하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보석들 역시 잔뜩 빛을 발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다시 돌아볼 지경이었으니,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이야, 오늘 예쁘게 하고 나왔네.”
“저, 정말이냐? 다행이다. 내가 이거 준비한다고 어제 새벽부터 얼마나…… 크흠! 이 아니라, 그냥 평소대로 가볍게 하고 왔을 뿐이다. 별거 아니니라. 흥.”
엘리스가 가볍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그래서, 오늘은 인간 세계의 어느 곳을 구경시켜줄 거냐. 그동안 온갖 고생을 다 했으니, 짐이 만족할 만큼 제대로 된 곳이어야 한다.”
“뭐, 나쁘진 않을 거야. 사람이 조금 많아서 걱정이긴 한데…… 일단 가보자.”
진혁이 엘리스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응? 으응…….”
엘리스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고양이 카페.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 가르릉대며 돌아다녔다.
청담동에 위치한 곳답게 내부 또한 일반 카페와 달리 굉장히 고급스럽고 세련됐다.
“호오 오오오. 귀, 귀엽구나.”
“마음에 들어?”
“털복숭이들 주제에 아주 기품 있고 교양 있다. 아얏. 깨물지 말고. 그거 먹는 거 아니야! 계약자. 어서 츄르라는 것을 내놓거라. 이것들을 단숨에 짐의 권능 아래 굴복시키겠다.”
엘리스가 연신 고양이와 눈싸움을 했다.
고양이와 고양이 간에 서열 다툼이라도 보는 기분이다.
“투덕거리면서 노는 것도 좋아 보이긴 한데, 그보다 먹을 것부터 시키자. 여기 쇼콜라 케이크 맛도 일품이거든. 아인슈페너도 호평이고.”
“오오! 어서 시켜다오. 어서!”
달달한 디저트와 커피에, 엘리스의 얼굴이 한층 더 상기됐다.
그런데.
“어서 오십시오. 카페 ‘에비트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알바생이 뭔가 이상했다.
익숙한 이목구비와 목소리는 지긋지긋하게 알고 있는 종류였으니까.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너 여기서 알바했어?”
진혁과 천유성의 목소리가 동시에 교차했다.
“어머나, 진혁 씨? 엘리스 씨도 있으셨네요.”
그 옆엔 메이드 복과 비슷한 유니폼을 입은 테레사 역시 함께 있었다.
이거 어째…… 이번 외출이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