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지옥의 약혼녀 쟁탈전 (3)
천유성의 등장에 분위기가 또 다시 한 차례 반전되었다.
“넌… 바보 검성!”
“어머나, 유성 씨. 오늘 근사하게 차려 입으셨네요? 새신랑 후보에라도 오르실 생각인 걸까요?”
엘리스와 테레사가 각기 다른 반응을 늘어놨다.
“그 빌어먹을 놈에게 빚을 한 가지 져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두 사람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
카가각!
천유성이 검으로 바닥에 선을 그었다.
그 이상을 넘어오면 공격하겠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물론.
그 정도 협박이 통할 거였으면 애초에 일이 이렇게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좋은 말 할 때 저리 비키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나 바쁘단 말이야!”
엘리스가 아공간에서 레이피어를 꺼내들었다.
당장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노릴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테레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짜악.
무언가 결정한 듯 손바닥을 마주치는 모습.
“이렇게 하죠. 싸우기 전에 먼저 꼬맹이는 저와 임시동맹을 맺는 걸로요.”
“뭐어? 내가 왜 너랑 동맹을 맺어!?”
“그거야, 진혁 씨가 무언가 또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을 테니까요. 이대로 질질 끌려가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거예요.”
“그건….”
엘리스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확실히.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 자기들끼리 밥그릇 차지하겠다고 치고받고 싸웠다가 모든 걸 잃은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모든 건 진혁에게만 유리하게 흘러갈 뿐.
남은 이들은 고생만 죽어라고 하고 얻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계약자를 포획부터 하고 누가 가질지는 그때 가서 정하자는 거야?”
“후후. 꼬맹이치곤 말귀를 잘 알아듣네요. 바로 그 말입니다. 그리고….”
테레사가 복도의 한 켠을 바라봤다.
“아까 보니 또 다른 경쟁자가 온 것 같더라고요. 안 그런가요? 안드리아?”
검 끝이 정면으로 향했다.
여차하면 통로를 통째로 베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숨어 있어봤자, 이미 마력을 잡아냈어. 그러니까 좋은 말 할 때 나오렴.”
“들켰네여. 언니들. 헤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안드리아가 양 손을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뒤통수칠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니?”
“뒤통수라뇨. 전 그냥 분위기가 너무 험악하길래 눈치만 보고 있던 거였어요.”
“하여간 말은,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우리 계획에 함께 할래?”
셋이서 힘을 합쳐 진혁과 천유성을 박살내고.
그 다음은 가장 강한 자가 차지한다.
쓸데없이 힘이 낭비되는 걸 줄일뿐더러, 남은 시간 동안 가장 확실하게 진혁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저야 마다할 이유가 없죠.”
안드리아마저 동맹에 합류했다.
“……이건 내 계획에 있던 게 아닌데.”
천유성이 독박을 쓴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츳…파파팟!
천유성이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각기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
‘성가시기 짝이 없군.’
지금까지 항상 티격대기만 해서 잘 몰랐는데, 이렇게 한 가지 목적 하에 뭉치니 합을 맞추는 솜씨가 상상을 초월했다.
“왼쪽으로 몰아볼게요!”
안드리아가 구미호의 능력을 사용해 천유성을 압박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버틸 만하다.
지금껏 안드리아가 눈부신 성장을 해온 건 사실이나, 천유성은 그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개인전이 아니다.
조금 뒤에 서 있던 엘리스가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퍼퍼퍼퍼퍽!
대리석 바닥에 꽂히는 무수히 많은 꼬챙이들.
정확히 안드리아의 호흡이 느슨해지는 틈을 지원했기에, 천유성은 도무지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테레사였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 계속해서 마력을 모으던 테레사는 단 한 방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 중이었다.
“젠장. 내가 왜 그런 실수를 저질러서 이런 지옥을 겪는 건지 모르겠군.”
천유성이 양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어차피 시간이 계속 간다면 승산이 없을 터.
그렇다면….
이쪽도 전력을 다해 틈을 만들어야 한다.
[고유 능력 ‘검의 노래’가 발동됩니다!]
파츠츠…!
검신을 타고 피어오르는 눈부신 빛.
모든 걸 베어버리는 검강이 천장에 닿을 듯 솟구쳤다.
“어머나. 승부수를 던지시려는 건가요? 타이밍이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실패하면 뒷감당이 안 될 텐데요?”
“승산이 높은 길은 이것뿐이다. 위험 부담이야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수하지.”
“이해가 조금 안 되긴 하네요. 그렇게 하면서까지 진혁 씨를 지키려 하는 이유가 있나요?”
“지키기는 개뿔! 그건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
테레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천유성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곤경에 빠진 동료를 내버려둘 순 없었다. 악마 같은 놈이긴 해도 우리 길드를 이끄는 마스터니까.”
“흐응. 그렇군요.”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테레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으로 묻죠. 전 유성 씨도 마음에 드는데, 어떻게, 제 신랑이 되실 생각은 없는 건가요? 양쪽에 진혁 씨랑 유성 씨를 끼고 다니면 하루하루가 꽤나 행복할 것 같거든요.”
“나중에 원래 테레사 씨가 돌아온다면 이불킥을 100번을 할 것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냥 하던 대로 덤벼라.”
“그럼 어쩔 수 없죠. 힘으로 굴복시킬 수밖에.”
테레사가 재차 자세를 잡았다.
검에 물든 오러 블레이드가 당장이라도 뻗어나갈 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추혼검무(追魂劍舞)’….
서로 다른 두 개의 검형.
‘성마검식(聖魔劍式)’
빛과 어둠이 한 개의 색으로 뒤섞였다.
⁕ ⁕ ⁕
콰아아앙!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에 진혁이 손가락으로 귀를 가렸다.
어우야.
하여간 격식도 없이 날뛰는 애들이 문제다.
공공장소에서 폭발이 뭐냐, 폭발이.
그래도 이런 난장판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유성이를 부려먹을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그 옛날 조선 시대 양반과 노비처럼.
앞으로 일주일간 아주 철저하게 굴리고 또 굴릴 생각이다.
가능하면 양면테이프를 붙여둔 스티커가 전투 중에 엘리스나 테레사에게 붙었으면 좋겠다.
천유성이 약혼식의 주인공이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여러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뒷감당 역시 녀석이 하는 거였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상황이 될 수 있을 거다.
‘새신랑 천유성과 나폴레옹 그림의 주인인 강진혁이라… 아주 마음에 들어.’
엘리스에게 들어가는 마력도 최대한 제한해 뒀으니, 그럭저럭 싸움의 밸런스는 맞을 터.
진혁이 콧노래를 룰루랄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바로 이때.
이 약혼식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방법을 시행할 때다.
도착한 곳은 저택 외각에 있는 별관.
이곳엔 더스틴을 비롯한 로젠베르크 가문의 고용인들이 머물고 있다.
승자가 가려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대기하며 저택 전체를 모니터링 하기 위해서다.
‘카메라와 드론이 없는 사각지대로만 골라왔으니, 걸릴 일은 없겠지.’
진혁이 힐끗 하늘을 살폈다.
부우우웅!
곳곳에 날아다니는 드론들이 참가자들을 관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름 촘촘하게 펼쳐둔 방공망이 인상적이긴 하다.
하지만.
‘기계 군주’를 복사해둔 이상 일반인들이 설정해둔 보안 정도야 귀여운 수준에 불과하다.
막말로 현재 이태민은 펜타곤의 보안까지 뚫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고유 능력 ‘기계군주’ - <트로이 목마>가 발동되고 있습니다.]
아주 미묘하게 사각을 만들고 동선을 지운다.
좋아.
툭!
진혁이 가볍게 담벼락을 넘어 별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안 어딘가에 약혼식 선물인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보관되어 있을 거다.
바로 그때.
정원 쪽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엘리스에게 질척대던 플레이어 ‘루시우스’다.
‘아니,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게다가 아까 전에 엘리스한테 한 방 얻어맞고 기절하지 않았나?
아주 복부와 안면에 제대로 꽂혔었는데….
그래도 랭커라고 금세 회복한 모양이다.
‘잠깐, 잠깐만….’
순간, 진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헤이. 여기야. 이쪽.”
진혁이 풀숲에서 조심스럽게 루시우스를 불렀다.
“……?!!!”
두리번거리던 루시우스가 진혁을 발견했다.
“너… 넌!”
“쉿! 소리 지르지 말고 일단 일로 와 봐.”
“웃기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내가 뭘 믿고 네 쪽으로 간단 말이냐?”
“엘리스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괜히 경비들에게 걸려서 다른 경쟁자들에게 동선이 알려지면 곤란하지 않아?”
“뭐? 엘리스 씨에… 관한 이야기라고?”
당장이라도 날뛰려고 하던 루시우스가 목소리를 줄였다.
다른 건 몰라도 엘리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기세가 완전히 누그러졌다.
“무슨 일이냐? 엘리스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흥분해서 보채기는.
“지금 경쟁자들이 잔뜩 몰려왔거든. 딱 보니까 엘리스는 널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다른 녀석들을 일일이 거절하다 보니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나도 확실히 본 건 아닌데… 네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더라고. 그게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크읍!”
“그럴… 수가.”
루시우스의 머릿속에 한 편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장르는 대충 로미오와 줄리엣.
비극의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기다리면서 온갖 역경에 맞서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에 본인을 이입하자, 루시우스의 두 눈에 불꽃이 튀어올랐다.
‘자… 가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당장 그녀를 구하러 가겠다!”
“응. 저쪽이야.”
진혁이 별관의 서쪽 끝을 가리켰다.
드론들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그림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동쪽일 확률이 높았다.
비교적 강한 마력을 지닌 이들이 죄다 동쪽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우오오오! 레이디. 제가 가겠습니다!”
검을 뽑아든 채 달리는 루시우스.
저렇게 고함을 질러대는 걸 보니 조만간 경비원들이 잔뜩 몰려들 거다.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의 그림을 지키고 있는 쪽의 경계는 느슨해지겠지.
진혁이 루시우스가 있는 방향을 잠시 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즉각 반대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각종 보안 장치들이 가로막았다.
물론, 이런 것 정도는 방해 거리라 하기도 힘들다.
파훼 난이도가 너무나 낮았으니까.
[고유 능력 ‘고대 결계’가 발동됩니다!]
시야를 가린 채 전자기기들을 하나둘씩 돌파했다.
하지만. 그림이 있는 방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최악의 난관이 가로막았다.
“후후후. 새신랑이 너무 늦으신 것 아닌가요? 기다리다 목이 빠질 뻔했어요.”
저택의 비밀 통로를 모조리 알고 있는 테레사와.
“역시, 우리는 쏙 빼놓고 보상만 노릴 줄 알았어. 예상했던 대로네.”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엘리스.
“우선 묶어놓으면 되는 거죠?”
마지막으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안드리아가 있었다.
젠장.
당연히 셋이서 경쟁구도를 펼칠 줄 알았는데.
설마, 동맹 전선을 펼칠 줄이야.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건데….’
먹잇감을 두고 맹수들이 힘을 합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지금을 기점으로 완전히 박살났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예상이 틀린 대가를 치러야할 시간이다.
“먼저 본인 의사부터 들어보죠. 뭐,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신부는 저이지만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타락시아의 가주이자 귀… 귀염둥이인 이 몸이 있는데! 됐고. 빨리 말해. 누굴 선택할 거야!”
“당연히 저죠? 진혁 님! 정신병동에서 저랑 같이 함정들을 통과했던 추억!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세 명이 동시에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