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나폴레옹의 대관식’ (1)
쿠쿠쿠쿠쿠!
몰락한 가주의 부활.
생명력을 담보로 끌어모은 순혈의 마력은 아타락시아를 이끌던 가주의 격을 다시 한 번 재현시켰다.
오싹……!
엑센시온의 피부를 타고 차가운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잊을 수가 없겠지.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가주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위용을 뽐냈던 최강의 진조를.
하지만.
‘능력이 발동된 순간을 정점으로 계속 약해지고 있어.’
애초에 저 몸으로 전성기를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아무리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하더라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다.
‘몇 합만 버텨낸다면 승산은 내 쪽에 있다.’
필요한 건 그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에너지원.
보통이라면 노예들을 가둬둔 혈액 감옥에서 해결했겠지만, 여긴 아타락시아의 영지가 아니다.
“뭐, 상관없겠지. 마침 이곳엔 먹잇감이야 썩어 넘칠 정도로 많으니까.”
엘리스가 아직까지 스스로의 힘에 적응하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 터.
엑센시온이 주변에 있던 블랙 카이저에게 손을 뻗었다.
쭈우우욱!
손바닥을 타고 대량의 혈액이 흘러 들어갔다.
“키……크오아우…….”
채 3초도 안 되는 시간.
블랙 카이저가 온 몸을 비틀다 쓰러졌다.
“무슨 짓이냐!”
리어퀸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이기기 위한 수단을 취했을 뿐이다. 고작 한 마리 가지고 뭐라 하지 말거라.”
“너희에게 협조하기로 했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나의 왕국이다. 내 허락 없이 함부로 아이들을 해치는 건 별개의 영역이란 소리다.”
“다 박살난 왕국에서도 여왕 행세인가. 뭐, 알겠다. 그리 원한다면 신경 정도는 써 보도록 하지.”
엑센시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점이 오히려 리어퀸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이렇게 계속해서 아이들을 흡수해버린다면…….
게다가 그 행동에 일말의 죄책감이나 망설임 따위도 보이지 않는다면.
마지막엔 자신마저 버림받는 게 아닐까, 라고.
하지만, 그 사실을 지금 당장 말할 순 없었다.
여기서 두 세력을 모두 적으로 돌린다면 그게 더욱 골치 아팠기 때문이다.
“흐음. 충분하군.”
몇 마리의 블랙 카이저들을 더 흡수한 엑센시온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혈액과 마력을 공급받자 검은 핏방울들이 흑요석처럼 빛났다.
엘리스 역시 완전히 마력을 갈무리했다.
“준비는 다 된 것이냐. 엑센시온.”
“스스로의 힘을 주체하지 못한 거였으면서 괜히 기다려준 척하지 마라. 표정에서 무리하고 있다는 게 다 드러나니까.”
“무리를 하고 있다라…….”
엘리스가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1분 1초마다 줄어드는 힘은 전성기 때와는 달랐다.
금세 피었다 지는 꽃처럼.
허무하고 덧없을 뿐.
그러나, 그 찰나를 얻은 것만으로도 엘리스는 만족했다.
‘기다려 계약자, 곧 구하러 갈게.’
지금까지 수도 없이 손을 내밀어주고 절망에서 구원해준 이를 위해서라면…….
남은 생명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엘리스의 눈을 타고 가느다란 핏물이 흘러내렸다.
두근!
과부화된 혈관과 몸은 이미 폭주를 시작한 지 오래였다.
두근!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지긋지긋한 악연의 종지부를 찍겠노라.”
[엘리스가 Lv?? ‘순혈무장(純血武裝) - 레퀴엠’을 발동합니다!]
수없이 많은 꼬챙이들이 사라졌다.
동시에, 엘리스의 신형 역시 사라졌다.
수백 송이 피어나는 순백의 혈화.
오롯이 근접 전투에 모든 걸 쏟아부은 형태다.
탓.
바람을 타고 가로지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엘리스의 레이피어가 공간을 꿰뚫었다.
하나의 탄환처럼. 일점을 노린 레이피어는 엑센시온의 심장을 노렸다.
콰앙!
“큽!”
엑센시온이 간발의 차로 검을 튕겨냈다.
하지만, 이건 인사치레에 불과하다.
엘리스가 엑센시온의 안쪽으로 발을 깊숙이 밀어넣었다.
이제는 호흡이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근접전에 약한 엘리스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수였다.
“스스로 무덤을…… 허억?”
비웃으려던 엑센시온이 급격히 숨을 들이마셨다.
우우우웅!
엘리스의 왼손에 맺힌 이질적인 마력.
이건 진조들의 스킬이 아니다.
언젠가 본 적 있는 탑 20층대 무림의 세계. 분명 그곳에 있던 거주자들이 사용하는 능력이었다.
“무……공이라고?”
엑센시온이 기겁하는 사이, 엘리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몸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기(氣).
수도 없이 진혁을 옆에서 지켜보며, 진혁이 하는 능력과 스킬들을 관찰했다.
그렇다.
이건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최강의 종족 중 하나인 진조가.
그것도 모든 진조들 중에서 최고의 재능을 지닌 엘리스가 흉내를 내는 것이다.
[흑천마황공(黑天魔皇功) 제3식.]
식과 식이 연결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진 마력이 곧 하나의 형을 이루었다.
[혈지침투경.]
아무리 강한 방어막이라도 소용없다.
혈지침투경은 내부에서 대상을 파괴하는 무공이었으니까.
콰아앙!
엑센시온의 몸이 그대로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콰콰콰콰콰…… 콰콰콰쾅!!!
벽이 송두리째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충격을 다 흡수하지 못했는지 지하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거라면 확실히 유효타를 먹였으리라.
그러나, 잠시 뒤 엘리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죽이진 못했어.’
직격은 피했는지, 연기 속에서 엑센시온의 마력이 느껴졌다.
반면, 엘리스의 마력은 소모한 것 이상으로 많이 없어져 있었다.
……이제는 무리다.
전신이 격렬하게 경고를 보냈다.
이 이상 무리한다면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거라고.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계약자만큼은 구하겠어.”
화르륵!
엘리스가 더욱 마력을 불태웠다.
새하얀 날개가 눈부신 광휘를 내뿜었다.
⁕ ⁕ ⁕
또옥……. 또옥…….
어깨를 따라 핏방울이 떨어졌다.
석화가 진행되면서 전신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아직도 버티고 있는 거야?”
“그러게. 진짜 난 놈은 난 놈이라니까.”
“안젤라. 네가 기습에서 실패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
프라임 서비스 길드.
아니, 프라임 서비스 길드의 멤버들이라 생각했던 놈들이 하나둘 모였다.
“셋이라니…….”
진혁이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가능하면 둘이었으면 했는데.
이곳에 온 플레이어 중 과반수가 올드가드였던 셈이다.
게다가 안젤라라면 올드 가드 중에서도 서열 3위에 위치한 괴물.
다행히 이 녀석들까지는 시스템의 제약을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셋이나 되는 수는 부담스러웠다.
석화의 저주를 받은 지금이라면 더욱더.
‘유성이 녀석도 아직 여기를 찾지 못한 것 같고…….‘
아마 눈앞에 보이는 모든 지네들을 다 베어버리느라 한참은 더 위에 있을 거다.
고대종과 정령수들을 꺼내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모두에게 공급할 마력이 부족했다.
특히…….
엘리스 쪽이 뭔가 이상했다.
고유 성창까지 썼는데도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왜, 그쪽이 신경 쓰여?”
강수아의 껍데기를 쓴 안젤라가 이죽였다.
“신경 쓰이긴, 오히려 그 모기 여왕이랑 싸우고 있는 상대 쪽이 걱정돼서 그런 거였어.”
“흐응. 그렇구나. 내가 볼 땐 너희 쪽 진조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봐. 거의 죽어가고 있잖아?”
안젤라가 먼지 속을 가리켰다.
그러자, 진혁의 눈에 당장이라도 쓰러지려는 엘리스가 보였다.
이럴 수가.
마력 공급엔 문제가 없을 텐데…….
어째서 저렇게 심각한 부상을 입은 거지?
설마.
“나에게 받는 마력 공급을 끊었어?”
정말이다.
엘리스는 지금 스스로를 태워가며 싸우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아무리 그래도 엘리스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킥킥. 봐. 그래서 말했잖아. 위험할 거라고.”
안젤라가 즐거워 죽겠다는 듯 키득거렸다.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네.”
화르륵!
진혁의 단검에 검은 강기가 솟구쳤다.
‘천마신공’과 ‘검의 무덤’이 동시에 발동되었다.
단숨에 뚫고 나가겠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성급하게 그러지 마.”
“우린 우리끼리 천천히 놀자고.”
“정 급하면 어디 한 번 뚫어보든가.”
올드가드들이 그런 진혁을 순순히 통과시켜줄 리 없었다.
“곱게 죽고 싶으면 꺼져라. 장난질할 기분이 아니니까.”
“어머나, 그거 아쉬워서 어쩌나. 우린 이 장난을 최대한 오래오래 하고 싶은데?”
“…….”
진혁이 검을 역수로 쥐었다.
자세가 낮춰지며 무게중심 또한 아래로 향했다.
이대로 돌파한다.
콰앙!
카카카캉!
서로 다른 검격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고유 능력 ‘트리플 매직’이 발동됩니다!]
좌에서 우로 가로지른 검격에 이어 ‘빙하조형’으로 만든 화살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올드 가드 셋으로 이루어진 진형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성급하게 움직이는 진혁의 허를 찌르며 압박해왔다.
“부상당한 몸으로 무리까지 하면 이거 너무 쉬워지잖아?”
안젤라가 단검에 묻은 피를 핥았다.
엘리스는 물론, 월영과 테레사도 각자의 싸움에 치여 발이 묶인 상황.
서서히 상대를 말려 죽이는 사냥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석화의 저주가 더욱 가속화됩니다.]
연신 떠오르는 붉은 상태창.
몸은 굳어 가는데,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남은 멤버들을 데리고 이 자리에서 탈출하는 것마저 극한의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뜻이다.
진혁이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루트가 딱 한 군데 남아 있었다.
[‘검마천령보’가 발동됩니다!]
남은 모든 힘을 쥐어 짜내 움직인다.
그런데.
그 길은 활로가 아니었다.
올드 가드 쪽에서 일부러 만들어둔 함정이었던 것.
진혁의 발이 일정 지점에 도달하자, 바닥에 펼쳐진 마법진이 눈부신 광휘를 뿜어냈다.
“걸렸구나!”
[안젤라가 고유 성창 ‘두 개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순간, 진혁이 있던 곳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반대로 안젤라는 시간을 왜곡하며 진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 단검은 두 번 찔리면 끝이야. 굉장히 까다로운 적이라고 그분께 들었는데, 역시 아무리 너라도 동료들이 위험에 처하면 흔들리나 보네.”
안젤라가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둥실하고.
단검이 허공에 떠올랐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안젤라의 손을 떠난 단검이 진혁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크……으……윽, 모……옴이…….”
진혁이 안간힘을 썼지만, 두 개의 시간은 풀리지 않았다.
어느새 칼날이 30cm도 안 되게 다가왔다.
이 안에 갇혀 있다면, ‘1초 무적’을 사용하든 ‘별의 가호’로 부활하든 몇 번이고 같은 결과가 반복될 터.
시간 자체를 뒤틀어버리는 힘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칼이 닿으려던 바로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검이 몸 속으로 파고든다.
엘리스의 입에서 왈칵 피가 솟구쳐 나왔다.
시간이…….
영원히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어……째서?”
진혁이 물었지만, 엘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빙그레 웃으며 진혁의 뺨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따뜻하면서 차가웠다.
곧바로 식어버릴 듯이.
“다행……이구나. 계약자. 다치지 않아서…….”
“당연히 다치지 않지. 내가 고작 저런 거에 죽을 거라 생각한 거야? 그리고 너야말로 이게 꼴이 뭐야? 명색이 진조라는 녀석이 빨리 상처부터 회복하지 않고.”
“후후…… 그러게. 내가 계약자 앞에서 몹쓸 꼴을 보여버렸나 보네. 그래도 그걸 무릅쓸 만한 가치는 있었어.”
“되도 않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몸이나 일으켜. 여기서 벗어나서 상처부터 봐줄 테니까.”
“응. 일단 먼저 가. 난 조금만 쉰 다음에 바로 따라갈게. 지금은 너무 졸려서…….”
살며시 감기는 눈꺼풀.
투욱.
엘리스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 ⁕ ⁕
“호오. 이건 이것대로 대어네. 아타락시아의 떨거지를 잡다니.”
“쳇! 그건 내 사냥감이었다.”
“너무 열 내지 마. 누가 사냥하든 죽이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그건 그렇지…….”
엑센시온과 안젤라가 엘리스를 두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 모든 대화내용이 진혁의 귀를 통해 똑똑히 들어왔다.
“………….”
죽게 내버려두진 않는다.
부족한 마력은 보충하면 됐으니까.
다만.
이번엔 좀 선을 넘었다.
탑을 오르면서 처음으로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조금만 참고 있어. 금방 정리하고 올게.”
언제나 철저하게 계산적으로.최선의 이익을 위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배제하며 살아왔다.
하나, 지금은 아니다.
강화를 하니 미래를 대비하니 하는 것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모두 떠나간 지 오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우우웅!
진혁이 아공간을 개방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사용하셨습니다.]
“뭐야, 저건?”
“갑자기 웬 아이템을 꺼낸 거지?”
별 것 아닌, 정말 대수롭지 않은 그림 한 장.
그러나 그 하나만으로.
뭔가…….
바뀌었다.
“……뭐지?”
한참 비웃고 있던 안젤라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