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만렙 뉴비-511화 (512/653)

511화. 태양의 마차 (1)

뿌드득…….

고디락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네……놈.”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런 개무시를 당했으니, 당연히 화가 솟구칠 수밖에.

하지만, 벤디비아가 있기에 무력시위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이를 갈고 두 눈으로 죽어라 노려보는 게 고작일 뿐.

“흐음. 반대표가 나와 버렸군요.”

벤디비아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턱을 쓰다듬었다.

이 상황이 재밌어서 견디기 힘들다는 것처럼.

웅성웅성!

다시 한 번 소란이 일어났다.

적합성 판정은 어디까지나 통과 의례에 가까운 절차.

상대 세력과 원수가 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반대를 하지 않았다.

반대표를 던지는 쪽에서도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리자나 거주자도 아닌 인간이.

저리 도발적인 반대표를 던질 줄이야.

[중소 세력 ‘베드라미움’이 당신에게 강한 호기심을 보입니다.]

[중소 세력 ‘치우’가 당신과 대화하고 싶어 합니다.]

[중소 세력 ‘잉카의 저녁’이 고인물 코퍼레이션과의 협력을 제안합니다.]

진혁의 눈앞에 여러 개의 상태창들이 점멸했다.

악랄하기로 유명한 고디락을 상대로 이런 대형 사건을 터뜨렸다는 게 꽤나 관심을 끈 모양이다.

‘뭐, 대부분은 상층부에서 도움이 안 되는 떨거지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세력도 몇 군데 있네.’

특히 한 개의 세력은 그 중에서도 격이 달랐다.

굳이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더라도 이쪽에서 찾아갔을 만큼 말이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예상은 했지만요. 진혁 씨가 가만히 있을 리 없죠.”

“이래야 내 계약자답지. 그럼, 저놈들이랑 한 판 붙게 되는 것이냐?”

천유성과 테레사 그리고 엘리스가 각자 한 마디씩 내뱉었다.

그러지 않아도 몸이 근질거렸다는 듯. 관절을 우두둑 꺾었다.

고디락의 시선이 릭에게 향했다.

“릭……. 저 인간의 뜻이 곧 그대의 뜻인 겁니까?”

반대의 최종 결정권은 초대를 받은 자가 아닌, 그를 데리고 온 관리자에게 있다.

다시 말해 이 싸움의 개시를 결정짓는 건 릭 헤네시라는 이야기다.

“나도 이 정도까지 소란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나? 둘 중에 하나는 박살나야 하는 게임이 시작된 것을.”

“킥! 후회할 텐데……?”

“그럴 리가.”

고디락과 릭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댔다.

이걸로 관리자들끼리의 합의도 끝났다.

짝!

벤디비아가 손뼉을 마주쳤다.

“자, 이걸로 결정됐군요. 그럼, 어떤 경기로 승부를 볼 건지부터 이야기해 보죠. 두 분이서 특별히 생각해두신 종류가 있습니까?”

“경기는 무슨,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우리 쪽 관리자를 후보로 추대하겠다.”

촤륵…….

가펠리우스가 채찍을 늘어놨다.

화르륵!

순간, 엄청난 열기와 빛이 뿜어졌다.

홍염을 머금고 있는 채찍이 금방이라도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태울 것만 같았다.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단순히 일대일로 싸우면 기대하는 관중들이 너무 허무하지 않겠어?”

“허무하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너무 유리한 게임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는 이야기야. 일대일에서는 져본 적이 없거든."

“……뭐……라고?”

진혁의 말에, 가펠리우스의 곱상한 얼굴이 구겨졌다.

고작 인간에게 일대일로 싸우면 시시하다는 말이나 듣다니.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죽고 싶은 것이냐!”

콰아앙!

가펠리우스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에헤이. 너무 열 내지 말고. 발끈하면 오히려 더 긍정하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니까? 그러지 말고 내기의 종류를 조금만 바꿔보자고.”

“보아하니 꼴에 자신 있는 종목이라도 있나보군. 어디 한 번 말해봐라. 뭘 제안하든 찍어눌러줄 테니까.”

“그래? 그럼…….”

진혁이 슬쩍 부유하는 섬들 사이를 살폈다.

이쯤이면 분명…….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놈들 역시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마차 경주 어때. 이 주위를 크게 돌아서 먼저 도착하는 걸로. 아, 당연한 말이지만, 경주하는 동안엔 상대 마차에 뭔 짓을 해도 괜찮아.”

“하……하하하…….”

가펠리우스가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진혁이 하고 있는 말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뭉개버리는 종류였으니까.

“그러니까…….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는 헬리오스 님께 선택을 받은 이 몸에게. 마차 승부를 하겠다는 말이더냐?”

“그 정도는 되어야 밸런스가 좀 맞을 것 같다는 거지.”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니까 올림포스에 소속된 신격들도 도착한 것 같은데, 이 정도까지 판을 깔아줬는데도 거절할 생각은 아니지? 그건 기다리는 관중들한테도 실례야 실례.”

단상의 반대편.

일반 신격들이 아닌 상위 신격들이 머물 수 있는 부유석에서 새로운 존재감이 드러났다.

어느새 상급 관리자 선출식을 지켜보러 온 올림포스의 신격들이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중엔, 가펠리우스가 마음을 두고 있는 여신 ‘아프로디테’도 있었다.

움찔하고.

가펠리우스의 눈가가 흔들렸다.

아프로디테가 보고 있는 마당에 개망신을 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이제는 무슨 수를 쓰든 이겨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뭔가 말려드는 느낌인데…….’

계속해서 상대가 판을 쥐고 흔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관없다.

매일 새벽. 태양을 나르는 헬리오스를 동경해 수없이 많은 세월동안 태양마차를 몰았던 게 자신이었으니까.

“내기를 받아들이마.”

“후후. 아주 박살을 내 드리죠.”

가펠리우스와 고디락이 동의한 것으로 경기가 성립됐다.

⁕ ⁕ ⁕

경기 시작은 약 1시간 뒤.

각자가 준비를 마치는 시점에서 두 개의 마차가 하늘을 가로지르게 된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때문에 그런 거라면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대로 진행할 겁니다. 대관식의 복원을 도와주는 대신 상급 관리자가 되게 도와드린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거겠지.

이미 올림포스와는 척을 진 상태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대놓고 선전포고를 날리진 않았다.

다소 기분이 나쁘지만 관계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과.

면상에 주먹을 날리는 것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터.

릭은 그 점이 염려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알고 지낸 정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고인물 코퍼레이션은 장기 고객에 대한 특별 서비스를 해드리고 있거든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대신.”

진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제가 묻는 말에 한 가지만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

릭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인자한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미묘한 경계심이 묻어나왔다.

“질문이라면…… 어떤 종류를 말씀하시는 거죠?”

“글쎄요. 그건 그때 가서 들어보시면 알 거예요. 아니면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죠.”

릭을 상대로 떠 보는 것 따윈 무의미하다.

어설프게 건드리면 오히려 더욱 꽁꽁 숨어버릴 테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대 놓고 공략하는 편이 나으리라.

적어도 내가 아는 릭 헤네시는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성격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상급관리자가 된다면 진혁 님이 묻는 게 무엇이든.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라면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뵐게요.”

생긋 웃은 진혁이 뒤편에 있는 공터로 걸어갔다.

그곳엔 낡아빠진 마차와 각종 자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차를 끌 말들 역시 이리저리 방황하는 중이었고.

“젠장. 이것들을 데리고 무슨 경주를 하라고……. 아!”

안간힘을 쓰며 고삐를 당기던 천유성이 다가오는 진혁을 발견했다.

“빌어먹을 강진혁!”

“응?”

“내기를 하는 건 좋다. 그것까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이런 걸 데리고 대체 무슨 수로 저 괴물을 이기라는 소리냐? 게다가 이 많은 수의 말들 중 어느 게 쓸 만한지는 또 어떻게 판별하고!”

천유성이 저 멀리 떨어진 가펠리우스의 마차를 가리켰다.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치장된 거대한 마차.

태양의 기운을 그대로 머금은 불꽃 바퀴에선 연신 거센 화염이 솟구쳤다.

게다가 그 마차를 나르는 건 다름 아닌 네 마리의 페가수스.

경주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시작 전부터 저 있는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저희……는 제한 시간 내에 그럴 듯한 마차를 만들 수나 있을지 의문이에요.”

테레사도 양 손에 나무판자를 든 채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의 반응을 보니 상황이 안 좋긴 한 모양이다.

항상 투덜거리는 천유성이야 둘째치더라도. 테레사까지 이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바로 그때.

“계약자. 짐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스가 ‘엣헴’거리며 콧대를 세웠다.

왠지 모르게 묘한 기대가 된다.

그래도 가주라고. 숨겨둔 비책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 엘리스 말해봐.”

“이 시합은 그냥 상대보다 먼저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럼 짐이 그냥 계약자를 안고 나서 저 마차보다 빠르게 날면 되는 거잖아? 둘이서만 가면 훨씬 더 기동성도 좋고…… 나도 좋고…… 헤헤.”

사심이 가득 들어간 제안이 튀어나왔다.

물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지만.

“마차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건 벌써 잊어먹었어?”

“그, 그건…… 그냥 짐이 마차 역할도 같이한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되겠냐?”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시무룩해진 엘리스가 우물쭈물 뒤로 물러섰다.

“그럼, 결국 우리끼리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이군. 그래서. 우리가 골라야 할 말은 어떤 거냐? 당연히 가능성 있는 말들이 있긴 한 거겠지?”

들판에 있는 수많은 말들당연한 말이지만, 이 중에서 가펠리우스의 페가수스를 이길 만한 말은 없다.

애초에 페가수스가 아닌 평범한 말들일뿐더러, 혈통 자체도 비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없어.”

“뭐?”

“여기 있는 말들로는 승산 자체가 없다고.”

“그냥 져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 그것도 아니야.”

‘여기에’ 있는 말들 중 우승마가 없는 건 맞지만, 꼭 주어진 말들 중에서 골라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가펠리우스가 자신만의 페가수스를 가지고 왔듯. 이쪽도 이쪽에 맞는 말들을 준비하면 그뿐이다.

⁕ ⁕ ⁕

언제나처럼 계약자의 부름에 응해 아공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눈앞에 놓여 있는 맛있는 마정석을 덥석 움켜쥐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단지 그것뿐인데…….

마정석을 먹고 있는 사이 목에 고삐가 채워져 있었다.

“모기?”

“미요?”

“크아아아?”

“허허. 아이큐 300이나 되는 고고한 사신수인 이 몸이 함정에 걸리다니. 엄청나게 특별한 마법을 걸어둔 게 분명하다.”

고구마와 후라이드 그리고 하벨리안과 말랑흑두루미.

네 마리의 말이 준비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진혁이 개인 상태창을 활성화해 다른 층계에 있는 자를 불렀다.

[화상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런데.

[대상이 화상대화를 거부하셨습니다.]

단호한 의지가 느껴지는 메시지.

호오.

이것 봐라?

진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화상대화를 재차 시도합니다.]

[이번에도 거절할 경우 사지를 분해해 무기로 만들어버리겠다고 경고합니다.]

사채업자도 저녁에 연락을 하지 못하게끔 법이 바뀌었으나,

시련의 탑에선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상관없다.

죽기 싫으면.

당장 받는 게 이로울 거라는 말이다.

[대상이 대화를 수락하였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