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신화 속 전쟁 (2)
“뭐, 뭐야?”
“올림포스 쪽에서 이런 식으로 움직일 줄이야…….”
“제정신인 건가?”
“여기서 이런 짓을 벌인다고?”
올림포스의 선전포고로 인해 모든 게 혼란에 빠졌다.
중소 세력은 물론, 관리자들까지도 넋이 나간 채 현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순수한 의도에서 온 관리자 선출식이 갑자기 전쟁터로 변했으니,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벤디비아만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기함했다.
“해테이스! 이게 그대가 바라던 거였나! 가장 균형을 지켜야 할 상급관리자가 어쩌다 올림포스의 개가 되었냐는 말이다!”
“흐음. 저도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갈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의 개니 뭐니 하는 억측은 적당히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그걸…… 변명이라고 지껄이다니. 내가 그런 되도 않는 소리를 믿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믿고 안 믿고야 자유입니다만, 그보다 지금 당장은 진위 따위를 가릴 때가 아닌 듯싶은데요?”
해테이스가 요동치는 하늘을 바라봤다.
올림포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천지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쿠쿠쿠쿠!
조각 조각 나 떨어지는 부유석.
이대로라면 관리자 전용 층계 하나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층계 자체보다 더 큰 피해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중급관리자들은 당장 각자가 담당하고 있는 하급관리자들에게 명령을 내려라! 각 신화에 소속된 신격들에게 지원을 보내라고!”
벤디비아가 즉각 고함을 질렀다.
이 엄청난 전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중세 신격들이 완전히 쓸려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
“진짜 제정신이 아니긴 하네.”
진혁이 여기저기서 깨어나는 몬스터들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친 놈들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경기가 끝난 이후에나 움직인다는 상식은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히 막무가내였다.
“크오오오!”
머리가 아홉 개 달린 히드라가 아누비스의 전사들이 있는 한복판으로 파고들었다.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히드라의 먹성과 파괴력에 밀집 병대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거기에 신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네임드 몬스터들 역시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이…….”
“아예 대놓고 전쟁을 시작하자는 말이더냐!”
아누비스와 베리엘이 분노가 가득 실린 음성을 쏟아냈다.
설마, 이 정도까지 극단적으로 나설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올림포스는 그런 외침에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계획에 맞춰 빠르게 중소 세력들의 거점을 박살낼 뿐.
“크하하하! 모처럼 시원시원하구만!”
창과 방패를 든 아레스도.
“모조리 심해 밑바닥에 처박아주지.”
범람한 물을 이용해 소용돌이를 만드는 포세이돈도.
“인근에 공간 왜곡 마법과 원거리 통신 차단막을 펼쳐뒀습니다. 이제부턴 지원을 부르는 것도 불가능하겠죠.”
하늘을 날아다니며 결계를 살피는 헤르메스도.
저마다 맡은 임무에 따라 철저하게 이득을 취해나갔다.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말고 나에게 집중해라. 어차피 날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테니까.”
헥토르가 창끝을 다시 한 번 겨눴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
바로 그 순간.
파아앙!
창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누가 보내준다고 했지?”
그런데.
진혁의 목을 노리던 창이 허공에서 그대로 튕겨 나갔다.
카아앙!
붉은 불꽃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덴 눈이 시린 칼날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허락했다.”
천유성이 마차와 헥토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
천유성에게 뒤를 맡긴 진혁이 곧장 마차의 방향을 돌려 베리엘과 아누비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베리엘!”
“오! 드디어 왔군!”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
베리엘과 아누비스가 동시에 외쳤다.
둘 다 방금 전 공격으로 마력을 상당히 소진했는지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둘 다 워낙 광역기를 남발해댔으니까…….
“몸은 좀 어때?”
“아직은 버틸만하다. 잡몹들을 잡는 거야…… 문제될 건 없는데, 저 덩치들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어.”
“우리 쪽에서도 동급의 환수나 신수들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불러올 수 있는 길이 모두 막혀버렸다.”
헤르메스가 단단히 장난질을 쳐놨기에, 이제 와서 빈틈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 일을 예상하고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좌표라도 따 놓는 게 아니라면.
“계약자!”
엘리스의 외침에 대화가 멈췄다.
어느새 올림포스에서 보낸 전사들이 이 주위까지 도달한 것이다.
“크크크…….”
“이거, 아주 대어들만 잔뜩 있군.”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소속된 목 하나당 금화 한 상자다.”
“거기에 코인도 500만씩 주신다고 하셨어.”
“강진혁은 일반 보상의 3배야. 반드시 잡아야 해.”
근육질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낄낄댔다.
숫자만 해도 서른.
베리엘의 토네이도에서 살아남은 걸 보면 이들 역시 만만하게 볼 놈들이 아니다.
거기에…….
“크하하하! 그래, 보상은 아주 꾹꾹 눌러 담아줄 테니 걱정마라. 저놈의 목만 친다면 말이지.”
전사들 사이에 아예 규격이 다른 놈이 하나 섞여 있었다.
아레스.
올림포스의 주신 중 하나이자 전쟁의 신이다.
헤라클레스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전투를 해야 하는 중전사라면.
이 녀석은 피와 살이 튀는 전장 그 자체를 즐기는 광전사다.
“헤라클레스 놈이 하도 안달을 내서 맛있는 먹잇감을 죄다 뺏기나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나. 네놈이 이곳으로 와줘서.”
진혁의 위아래를 훑은 아레스가 말을 이었다.
“꽤나 여리여리하게 생겨서 싸우는 맛은 좀 덜하겠다만…… 대신 괴롭히는 맛이 있겠어. 천천히 팔 다리 하나씩 뽑아내며 살려달라고 애걸하게 만들어주지.”
특유의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향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저벅.
“감히…… 누가 누구의 팔다리를 뽑는다는 것이냐?”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네요.”
엘리스와 테레사가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은 채 앞으로 나섰다.
“호오. 엘리스로구나 그래. 최근 엑센시온을 죽이고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았다는 말은 들었다. 꽤나 감동적인 이야기였어.”
“그걸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주둥이를 털어? 그것도 내 계약자에게?”
“푸하하! 아주 독이 바짝 올랐나보군. 계약자가 아니라 애인이라도 되는 모양인가 본데…… 정 그리 기분이 나쁘면 힘으로 덤벼보거라. 이곳의 룰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나?”
“개소리 중에서 유일하게 공감할 만한 말을 했네. 맞는 말이야. 굳이 입 싸움이나 할 필요는 없겠지.”
[엘리스가 고유 능력 ‘블러드 로드‘를 발동합니다!]
엄청난 수의 꼬챙이들이 아레스의 정면을 향했다.
가만히 있다간 고슴도치…… 아니, 아예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잘게 찢겨 나갈 것이다.
아레스는 제자리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방패를 앞으로 세운 채 엘리스를 정면으로 응시할 뿐이다.
마치, 들어올 테면 들어와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꿈틀하고.
엘리스가 즉각 손을 휘저었다.
곧바로 붉은 피로 된 폭풍이 몰아쳤다.
콰콰콰콰콰!
꼬챙이들이 지면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성에 차지 않은 듯, 계속해서 추가적인 꼬챙이들이 떨어졌다.
“크아아악!”
“피, 피해라!”
미처 사정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꼬챙이에 잘린 팔과 다리가 날아다녔고. 꼬챙이에 꿰인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났다.
그렇게 약 3분이 넘게 이어진 붉은 비가 멈췄을 땐 주변의 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 정도인가.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겠군.”
정작 아레스는 엘리스의 집중 포화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아레스가 고유 능력 ‘전장의 사신’을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
긴 창과 방패가 순식간에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전쟁터에 있는 모든 병력의 수를 파악합니다.]
[합산 완료, 능력치 산출.]
[공격력과 방어력이 각각 560% 만큼씩 상승합니다!]
전장의 사신이 지닌 능력은 단순하지만, 확실하다.
바로, 전쟁터에 있는 병력의 수와 질에 따라 아레스의 전체 전투력이 결정되는 것.
가뜩이나 기본 스펙도 터무니없는데, 거기에 560%의 추가 버프를 받게 된다면 어느 정도 괴물이 될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실제로 아레스는 넘쳐나는 힘에 취한 듯 연신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래서 강자들이 넘쳐나는 전쟁터가 제 맛이란 말이지.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아!”
“그래?”
엘리스가 피로 만든 꼬챙이들을 하나로 응축했다.
한 겹…… 두 겹, 그리고 오십 겹.
“어디 한 번, 이것도 막아 봐.”
더 이상 꼬챙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창이 아레스의 방패를 강타했다
콰아아앙!
“……!!??”
아레스의 몸이 그대로 밀려났다.
저릿저릿한 충격이 방패를 따라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내…… 힘은 몇 배나 증가했는데,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같은 신격들이라 해도 설설 기어야 정상이었으니까.
“원래 힘이 워낙 약해빠졌다 보니 강해져도 티가 안 나는 거겠지.”
“다 죽어가던 뱀파이어 따위가…… 운 좋게 한 번 공격에 성공한 것 가지고 너무 기고만장해 하는구나! 좋다. 그 오만한 콧대부터 꺾어주도록 하지.”
아레스가 목에 찬 고둥을 꺼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숨을 불어넣었다.
뿌우우우!
마력의 파장을 탄 고둥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크오오오오!”
“케에에에!”
히드라와 티폰 그리고 외눈박이 사이클롭스들이 그 부름에 응답했다.
조금 전까지 아누비스의 군대를 휩쓸며 포식을 하던 신수들이 하나둘 아레스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레스에 이어 만만치 않은 신수들을 동시에 상대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다가오고 있는 적들 중엔 나머지 주신들과 영웅급의 전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굉장히 힘든 싸움이 되겠군.”
아누비스가 어금니를 드러냈다.
이렇게 된 이상 무리를 해서라도 더 많은 군대를 소환하는 수밖에 없다.
“전부 죽여라!”
아레스가 명령을 내렸다.
둥글게 포위망을 펼친 몬스터들이 길고 긴 포효를 내지르며 일제히 돌격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다리다가 똥줄 탈 뻔 했잖습니까.”
지금껏 잠자코 있던 진혁이 허공을 향해 툴툴거렸다,
바로 그 순간.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미리 준비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허공을 따라 몇 번인가 들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우우웅
[차원이 이어집니다.]
있을 수 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헤르메스에 의해 완전히 단절된 공간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