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33층, 마도공학의 도시 ‘리플로어’ (3)
지금의 마도공학 도시를 이룩한 건 몇몇 위대한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플로어’의 기둥이라 불리는 현자들이.
그리고 현재.
‘수정의 탑’에는 세 명의 현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무거운 침묵 속.
모두의 앞에 거대한 스크린이 나타났다.
[실시간 장면이 송출됩니다.]
영상 속에 진혁과 나머지 멤버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찬란한 문명과 마법과 기계 공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도시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수십 명의 남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똑같은 노가다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뒤에서 채찍을 든 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진혁은 악마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창의성과 아이디어를 강조하는 리플로어의 마도공학자들로서는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저, 저런 끔찍한….”
“마도공학에 대한 모욕이오!”
“허허허. 어이가 없군요.”
보통이라면 욕이나 하고 적당히 치워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저런 식으로 아무리 닦달해봤자 심오한 마도공학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했습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리플로어에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강진혁이란 인간은 너무도 술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있었다.
앞서 이곳에 들어왔던 그 어떤 외부인보다 빠르게 말이다.
몇몇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우우웅!
화면 속, 방금 막 완성된 기계들이 정교하게 맞물리며 돌아간다.
거기에 마력이 주입되자 시계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되기 시작했다.
연계 퀘스트의 달성률은 무려 38%.
F급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믿기 힘든 속도였다.
더군다나 연계 퀘스트의 일부분을 교묘하게 뒤틀며 클리어하는 건 0.01% 이하의 확률로만 도달할 수 있는 히든 퀘스트 루트.
우연인지 아닌진 알 수 없으나, 이대로 간다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요한네스.
울카라.
프라독
리플로어의 세 현자라 불리는 이들이 모조리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
좀 더 정확히는….
회의실 창가 쪽에 서 있는 저 존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블랙 드래곤 ‘팬드래건’.
드래곤 종족 중에서도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성품을 지닌 블랙 드래곤의 리더이자, 이곳 33층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흑요석처럼 새카만 흑발.
수려하다 못해 조각 같은 외모는 폴리모프 마법의 극한을 보여주는 듯싶었다.
“가장 똑똑하다는 놈들이 셋이나 모여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구나.”
팬드래건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세 현자를 보호하는 골렘들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너무나 압도적인 살기에 수정구 자체가 얼어 붙어버린 탓이다.
“기다려 주십시오. 분명 상대가 심상치 않은 건 맞습니다만, 히든 퀘스트는 그리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저희들조차도 정확한 조건을 알지 못하는데, 이제 막 33층에 들어온 놈이 무슨 수로 그걸 다 알겠습니까? 지금까지 온 것도 우연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요한네스가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절대 드래곤들의 분노를 사면 안 돼… 그것만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한다.’
팬드래건의 분노를 샀다간 리플로어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 버릴 수 있다는 걸.
요한네스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변명이군.”
팬드래건의 손끝을 따라 검은 기운이 응집됐다.
브레스.
아니, 에이션트 중에서도 이름을 부여 받은 이들만이 발현시킬 수 있는 권능인 ‘성명절기’다.
크기가 소형화된 만큼 위력은 떨어졌지만, 저토록 가벼운 손짓 한 번에도 술식이 완성되는 장점이 있었다.
“지, 진정하십시오. 위대하신 존재시여.”
“저희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걱정하시는 비밀이 새어나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요.”
울카라와 프라독 또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히든 퀘스트의 요건을 달성한 플레이어가 등장했습니다!]
[SSS급 연계 퀘스트 ‘홍염의 권좌’가 시작됩니다.]
모두의 앞에 예상치 못한 상태 메시지가 나타났다.
세 현자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
‘캬아. 깔끔하네.’
연계 퀘스트를 확인한 진혁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꽤나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데도 원하던 퀘스트로 이어지지 않아 초조했는데.
드디어 본 궤도에 오를 퀘스트를 손에 넣게 되었다.
‘탐식의 눈’이 재빨리 퀘스트의 세부 사항을 훑었다.
[홍염의 권좌 - 히든 연계 퀘스트]
난이도: SSS
내용: 불의 정령왕이 지녔던 명예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 이 퀘스트를 도전하는 자는 불의 정령왕 ‘에고니’의 숨겨진 비밀들과 봉인을 찾아야 합니다. (최소 파티 구성원 1, 최대 99)
불의 정령을 포획해 그로부터 사라진 정령왕 중 하나인 에고니에 대한 단서를 얻으십시오.
‘불의 열쇠’를 사용할 시 유적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립니다.
33층을 클리어하려면 3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켜야 한다.
첫 번째는 마도공학자로 2차 전직을 한 뒤 리플로어에 업적을 남길 것.
두 번째는 33층에 있는 유적 1개, 미궁 3개, 던전 10개 이상을 모두 공략할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연계 퀘스트 중 S급 이상을 모두 클리어하는 것이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조건들.
그 중에서도 진혁이 고른 것은 역대급 난이도를 자랑하는 루트였다.
‘물론, 그만큼 보상이 달달하긴 하겠지만.’
불의 정령왕 에고니는 리플로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존재.
그리고… 33층을 넘어 드래곤들이 결코 세상에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비밀을 지닌 열쇠이기도 했다.
“오오오!”
“돼, 됐다. 됐어!”
“SSS급이라니… 내가 히든 연계 퀘스트를 받게 됐다니!”
“어머니. 이 못난 아들내미.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크하하하! 이제 꽃길만 펼쳐질 거라고요!”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난 3일 동안.
정말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면서 개같이 일만 했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만큼. 정말 노예처럼 마도구를 만들어댔다.
그리고 마침내.
고난 끝에 오는 달콤한 열매를 맛볼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시련의 탑을 오르면서 고작 100명 남짓한 극소수에게만 찾아온 SSS급 퀘스트를 받았으니까.
성공 여부는 둘째치고. 그 위대한 여정에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다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전부 여러분 덕분이에요.”
진혁이 모두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드디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할 수 있는 건가.”
“전 배 터질 때까지 고기랑 술을 먹을 거예요!”
“푹신한 침대에서 저녁까지 자는 것도 잊지 말아야죠.”
모두가 꿈에 부풀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적어도 하루는 쉴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예? 지금 다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진혁은 모두를 쉬게 해 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이제야 본궤도에 올랐는데, 무슨 휴식이 필요하단 말인가?
세상은 오롯이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 법.
진혁은 모두의 희망을 짓밟은 채 연녹색 열쇠를 허공에 갖다 댔다.
[유적 ‘어두운 화산’이 개방됩니다!]
[플레이어 강진혁 님의 파티에 소속된 모든 인원들이 강제로 유적에 소환됩니다!]
“아, 안 돼!”
“으아아악!”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화르륵!
쿠쿠쿵!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마그마와 반쯤 녹아버린 톱니바퀴들.
빛을 잃은 수정구들만이 거대한 분화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다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난데없이 유적의 입구에 떨어졌으니 당연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무엇보다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탑의 유적을 이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오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엘리스와 유연화 그리고 이태민만이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무기와 장비들을 점검했다.
“역시, 형답네요.”
“어쩔 수 없지. 우리 스타일대로 몸으로 부딪쳐야겠네.”
“흐응. 이번엔 화산지대로구나.”
[이태민이 Lv21 ‘기동순찰’을 발동합니다!]
위이잉!
드론들이 날아다니며 지형지물을 스캔했다.
“……어? 누나!”
그런데 이태민이 고함을 치던 바로 그때.
“꾸루룩….”
바위 뒤편에서 액체가 꿀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돌덩이들이 그대로 녹아내리며 검붉은 마그마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마그마 골렘.
골렘 중에서도 상위 종으로 마도공학의 산물로 탄생한 일종의 기계 병기다.
당연히 기본 레벨이나 공격력 또한 평범한 골렘과는 차원이 다를 터.
콰콰콰콰콰콰!
화산탄이 즉각 유적에 침입한 플레이어들에게 쏟아졌다.
엄청난 불꽃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으아아악!”
“피, 피해!”
“빙계 마법을 익히고 있는 사람은 빨리 나서라고!”
“젠장할!”
주로 솔플로 활동하던 용병들 사이에서 연대가 잘 될 리 없다.
하지만,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이들답게 호락호락 당하지만도 않았다.
툭!
탓!
탱커들이 ‘도발’을 통해 마그마 골렘의 시선을 끌고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이 ‘수속성’ 마법과 ‘빙계 마법’을 캐스팅했다.
퍼어엉!
콰아앙!
얼음 파편이 비산하고 각종 마법들이 작렬했다.
그런데.
“뭐, 뭐야?”
“이럴 수가….”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던 플레이어들이 경악에 가득 찬 비명을 흘렸다.
“꾸루룩….”
마그마 골렘의 몸엔 그 흔한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상극의 스킬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처음 마주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한 채 침입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력이 부족했다는 건가?”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입구에 있는 몬스터가 저런 게 말이 돼?”
“으으으… 뭐,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역시, 이곳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한 명도 없나 보네.’
그런 모습을 보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하기야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반응이긴 하다.
공략법을 모른다면 저 마그마 골렘를 죽이기란 더럽게 어려웠으니.
‘마도공학과 관련된 능력을 사용해야지만,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있지. 나조차도 이 유적에선 본래 능력의 절반 정도 밖에 발휘하지 못할 테니까.’
다시 말해.
이태민의 가치가 급부상하는 순간이었다.
[마그마 골렘이 Lv20 ‘리퀴드 보밋’을 발동합니다!]
쩍 벌어진 입에서 굵은 마그마가 뿜어졌다.
마그마로 범벅이 된 거대한 화산탄이 순식간에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하아압!”
유연화가 가장 앞에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푸른 빛으로 물든 다리에서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일어났다.
[유연화가 Lv22 ‘가위 차기’를 발동합니다!]
콰직!
반으로 조각난 화산탄.
너무도 깔끔한 발차기는 마치 검으로 허공을 가른 것만 같았다.
“뒤로 피해요 누나! 말려듭니다!”
그 뒤를 잇는 건 이태민이 발동시킨 드론들의 융단폭격이었다.
[이태민이 Lv23 ‘콜 오브 듀티’를 발동합니다!]
퍼퍼퍼펑!
수정구를 박은 빙결탄이 폭발하자 마그마 골렘의 몸이 통째로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그토록 두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던 놈이 일격에 침묵해버렸다.
‘좋아. 기대 이상이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
그것은 이태민과 유연화의 고유성창을 개방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33층을 공략하는 것 외에도, 그 뒤에 있는 검은 도마뱀 녀석과 나머지 고대룡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쪽의 전력을 최대한 보강시켜 둘 필요가 있었다.
‘예상대로 잘 흘러가면 조만간 고구마의 진명 역시 해방시킬 수 있겠지.’
급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모든 변수와 가능성을 가늠해야 한다.
전투를 직관하면서도 진혁은 계속해서 머릿속에 탑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한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이 유적이 상층부 공략과 앞으로의 일을 결정짓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