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유적, ‘어두운 화산’ (1)
쿠우웅!
콰앙!
“크르르….”
“꾸룩… 꾸르륵….”
마그마 골렘들이 여기저기 쓰러졌다.
유연화와 이태민. 두 사람의 완벽한 공수 교대에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일곱 마리의 마그마 골렘이 전부 박살나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강…하다.”
“강진혁 플레이어랑 자주 다니지 않아서 저렇게 강할 줄 몰랐는데….”
“얼마나 괴물들만 모여 있는 거야. 저긴?”
지켜보던 이들이 연신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광경이다.
툭….
골렘의 머리를 걷어찬 유연화가 속에 있던 수정구를 꺼냈다.
이태민의 드론들도 분주하게 다니면서 드랍된 아이템들을 수거했다.
“형, 따로 단서 같은 게 나오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이쪽도 꽝이야. 입구 쪽에 있는 놈들은 다 잡은 것 같은데… 아니면, 좀 더 안쪽까지 뒤져볼까?”
불의 정령을 포획하라는 단서가 주어졌지만, 정작 불의 정령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남은 길은 유적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것뿐.
허나, 레인저나 다른 정찰대의 투입 없이 맨몸으로 부딪치기엔 리스크가 너무 높았다.
드론들 역시 다룰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고.
“그 부분은 걱정 마. 최고의 안내자가 있으니까.”
진혁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아공간이 개방됩니다.]
공간이 벌어지며, 그곳에서 익숙한 정령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쉬익! 쉭!
살라맨더가 혓바닥을 낼름거리면서 주위를 훑었다.
“힉?”
진혁을 보고 흠칫 떨었지만, 이내 익숙한 마력을 감지했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주인, 여긴 어디야? 굉장히 포근하고 좋은 느낌이 드는데. 마치….”
“네 집에 온 것 같지?”
“응! 맞아. 고향에 온 기분이야.”
살라맨더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화산지형인 걸 떠나서 정령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마력이 배어 있던 탓이었다.
특히 불의 정령왕 ‘에고니’의 마력은 살라맨더에게 있어 뿌리칠 수 없는 마약과 같은 종류였다.
“마력이 짙어지는 곳을 향해 안내해줄 수 있겠어?”
“응,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만 따라와 주인.”
살라맨더가 코를 킁킁거리며 앞장섰다.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불의 정령을 찾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미 내 주머니 속에 든든한 정령수가 종류별로 다 있는데?
⁎⁎⁎
살라맨더 덕분에 초반 유적 공략이 한결 쉬워졌다.
수십 갈래의 길 중 최단거리를 찾아내는 건 물론, 화염 계열 몬스터들과도 최대한 전투를 피하게 만들어줬으니까.
그래도 워낙 몬스터들의 숫자가 많은 데다, 함정들까지 즐비해 이곳까지 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원정이었다.
“잠시만 숨 좀 고르고 가죠. 피곤한 사람들은 잠시 눈을 붙여도 됩니다. 제가 불침번을 설 테니 걱정 마세요.”
“사, 살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조금만….”
다들 감사의 인사와 동시에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졌다
진혁과 엘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탈진하기 직전의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포기하겠다고 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조금 놀랍긴 하다.
솔직히 말해 이쯤이면 절반 정도는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도 최초 공략자의 칭호가 가지고 싶었던 건가.’
흐음….
이번에는 정말로 큰 마음 먹고 보상을 공유해줄 생각이 있긴 하다.
만약, 정말로 끝까지 따라오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진혁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큼지막한 한정판 샌드위치를 꺼냈다.
‘기간트 버팔로’로 만든 스테이크에 데리야키 소스를 첨가해 만든 고급 음식이었다.
“짐의 것은 어딨느냐?”
“어허. 한 개 밖에 못 샀어. 거주자 놈들이 입찰 전쟁 벌이느라 이것도 간신히 구한 거란 말이야.”
“한정…판?”
한정판이란 말에 엘리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부유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여왕님이었으니 당연히 소유욕이 남다를 수밖에.
“계약자가 산 가격에 두 배를 지불하겠다.”
“이미 프리미엄이 2배 넘게 붙은 거야. 여기 용천수 철갑상어의 알 보이지? 탑 밖에서 먹는 건 캐비어라고 부르면 안 돼. 이게 진짜거든.”
“아, 알겠다. 3배. 아니, 5배를 주마.”
“좀 곤란한데… 진짜 열심히 구한 거라서.”
진혁이 계속해서 뜸을 들였다.
“그럼 대체 뭘 주면 되는 건데!”
결국, 참다 못한 엘리스가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모기 여왕이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순간이다.
“아니, 별건 아니고. 네 피 조금이랑 교환해준다면 이걸 넘기도록 할게.”
“내 피를?”
“항상 내 쪽이 빨리기만 했잖아. 이번 기회에 헌혈 좀 해 봐.”
진조의 피는 드래곤 블러드에 버금가는 최상급 아이템이다.
무기를 강화할 때도. 혹은 연금술이나 각종 마법에 사용할 때도.
극한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는 뜻.
‘그동안 몇 번이나 얻으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었지.’
진혁의 머릿속을 따라 과거의 안 좋은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잠을 쿨쿨 자고 있을 때나.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혹은 일부러 부상을 유도하게 해 코피를 얻으려고도 해봤다.
물론, 불순한 의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엘리스의 무시무시한 블러드 로드 보복이 뒤따른 건 덤이었다.
“…….”
엘리스가 순간 멈칫했다.
눈동자가 샌드위치와 진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것도 잠시. 엘리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진혁에게 역제안을 던졌다.
“좋아. 피는 줄게. 대신.”
“잘 생각했… 응? 대신?”
“내가 피를 섭취하는 거하고 똑같이 가져가. 그러면 인정해 줄게.”
엘리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젠장.
이건 완전히 말려들었다.
평소에 피를 섭취할 때와 마찬가지로 목덜미에 입을 갖다 대라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싫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진조의 피를 얻는 건 에고니를 비롯해 33층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대전제였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어느새 엘리스가 완전히 여유를 되찾았다.
“하아….”
뒷목을 주무르던 진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그럼 부드럽게 부탁하마.”
엘리스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피를 빨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다.
부드러운 은발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게 뭐라고.
묘하게 긴장까지 된다.
진혁이 입속에 마력을 주입했다.
파츠츠.
송곳니 위로 푸른 강기가 덧씌워졌다.
아주 천천히….
진혁이 엘리스의 목에 입을 갖다 댔다.
따뜻한 감촉이 입술 전체를 타고 퍼져나갔다.
‘피를 흡입하는 순간부터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야 해.’
워낙에 순도가 높은 탓에, 방심하다간 오히려 내부에 있던 마력과 반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내공까지 쌓아 놨기 때문에 주화입마에라도 빠진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야기하게 될 터.
“아야야….”
살짝 아팠는지 엘리스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또옥…. 또옥.
뜨거운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체내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는 마력.
순도 높은 진조의 피가 혈관을 따라 흘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영구적인 게 아니다.
같은 혈족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방금 들어온 피를 빠르게 사용해야만 한다.
진혁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
[‘세계의 기억’을 개방합니다.]
등 뒤로 수많은 스킬들이 기록된 서고가 나타났다.
어떤 능력을 고를지는 이미 정해두었다.
[‘태초의 불꽃’과 ‘다운 폴’, ‘카스카 디아슬라브’가 융합합니다!]
[아타락시아의 피로 인해 ‘암(暗)’과 ‘혈(血)’ 속성이 추가됩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
능력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눈부신 빛이 점멸했다.
[고유성창 ‘플레어 이클립스’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플레어 이클립스]
입수 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거대한 태양의 힘을 한 손에 모아 발현시킬 수 있게 됩니다. 100만 K에 달하는 온도와 X선. 그리고 눈을 멀게 하는 광휘는 고유 성창을 상대하는 적들에게 악몽을 선사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융합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화염 속성 능력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결과물.
그 능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걸로 또 하나의 카드를 손에 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웅!
왔던 길을 따라 흰색 드론 한 대가 날아왔다.
이태민의 것이 아니다.
훨씬 더 진보되고 강한 코어를 가진 정찰 드론이었다.
“형!”
“오빠!”
이태민과 유연화가 낯선 마력에 반응해 달려왔다.
쉬는 와중에도 날카롭게 기감을 유지하는 걸 보니 세삼 대견스러웠다.
반면, 엘리스는 뭐가 부끄러운지 아직까지 헤롱대는 중이었다.
‘그래, 슬슬 놈들이 올 타이밍이긴 하지.’
리플로어 ‘수정탑’의 현자들.
히든 연계 퀘스트가 개방됨에 따라 아주 똥줄이 탄 놈들이 참다 못해 먼저 움직인 게 틀림없다.
그 말을 증명하듯.
저벅.
어둠 속에서 흰 제복을 입은 이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열둘.
선두에 선 노인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전부 2030대의 젊은 남녀였다.
이태민와 유연화가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가장 선두에 있던 노인이 양 팔을 위로 들어올리며 적대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허허허. 그리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는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 리플로어에서 온 마도공학자들입니다. 이 유적은 33층에서도 꽤나 위험 지역인데…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이 입장하셨길래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돕기는 개뿔.
기회를 봐서 뒤통수나 날리려는 생각이겠지.
애초에 이쪽은 최단 루트로만 왔는데도 그걸 따라잡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수정의 탑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게이트를 오픈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까발릴 필요는 없다.
뒤통수치려는 놈의 뒤통수를 치는 게 가장 짜릿한 법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 앞을 통과하는데 머릿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는데… 잘 됐네.‘
어떤 의도인지는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거기에 어울려주지.
먼저, 바보연기를 하는 것부터다.
진혁이 표정을 180도 바꿨다.
정말로 고맙고 다행이라는 듯. 그리고 위대한 마도공학도시의 지원군이 와 줘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침 다들 지치고 힘들어서 곤란하던 차였는데…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불필요한 희생을 막는 게 마법과 기계의 조화를 이루는 자들의 사명인 법.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 제 이름은 요한네스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수정의 탑의 현자라는 과분한 직책을 떠맡고 있죠.”
“이름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전 강진혁이라고 합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허허. 그럼, 유적에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유. 저야말로요.”
서로가 다른 꿍꿍이를 품은 채.
새로운 인물들이 한 배에 합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