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몽상의 다리 (2)
콰콰콰콰쾅!
콰아앙!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꼬챙이들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파편과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다리 위에서 펼쳐지는 공방전. 이 엄청난 광경을 고작 두 명이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공수가 이어질수록 엘리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물리 피해와 마법 피해가 99.86%만큼 무효화됩니다.]
몽상의 다리에선 마도 공학을 제외한 모든 능력들을 꿈으로 환원시킨다.
엘리스 정도로 터무니없는 힘을 보유한 존재조차 상대의 공격을 상쇄시키는 게 고작이라는 뜻.
그렇기에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아하하! 그래서 말했잖아. 너로는 안 될 거라고.”
크리드가 더욱더 거세게 날뛰었다.
양 손에 나타난 백탁색 꼬챙이가 기괴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크리드의 어깨 너머로 수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장신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드가 Lv34 ‘몽상가의 수정무구’를 발동합니다!]
사파이어와 루비 그리고 에메랄드로 이루어진 수정들이 공명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운무가 꼬챙이들을 집어삼켰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운이 일렁였다.
마도공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수정에 물리력이 가미된 순간이다.
파츠츠!
세 개의 빛에 감싸인 꼬챙이가 가속 준비를 끝냈다.
추진체 따윈 없이 질량이 사라진 듯한 투척이 날아갔다.
콰아앙!
머리 쪽!
아니, 심장이다.
“……!”
가까스로 반응한 엘리스가 그대로 밀려났다.
‘블러드 로드’로 만든 실드는 일격에 박살난 지 오래였다.
경악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위력.
게다가 수정구의 위협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따악.
크리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다리의 아래로부터 무언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카카칵… 가가각!
절벽을 타고 기어오는 존재.
기계들로 만들어진 전갈과 지네 그리고 거미 등의 몬스터였다.
전갈의 꼬리와 지네의 다리 마지막으로 거미의 눈동자에는 각기 다른 색의 수정구들이 박혀 있었는데.
스파크가 수정구 사이를 오고가며 서로의 마력을 극대화했다.
“키에에에!”
“크오오오!”
징글징글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다.
더 이상 엘리스나 이태민이 커버를 해줄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으아아악!”
“젠장, 진짜 개미 떼처럼 기어올라오잖아?”
“이, 이걸 무슨 수로 다 막아?”
“도망쳐야 돼.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면….”
플레이어들 사이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다.
크리드 하나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진대, 이제는 공포에 떨 여유마저 사라지게 생겼다.
그렇게 모두가 패닉에 빠져있는 동안.
‘흐음. 역시 이렇게 나오는 건가.’
진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크리드가 불러낸 몬스터들이 위협적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저 녀석들을 일일이 전부 상대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크리드의 최우선 목적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와. 나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저거 결계 파훼에 특화된 수정 아닌가? 색이 반반씩 섞인 수정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진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아니 저쪽 봐. 요한네스 저 할아버지. 뭔가 열심히 하고 있잖아?”
“……!?”
잔뜩 신나서 날뛰던 크리드가 재빨리 절벽의 한 쪽을 바라봤다.
“서, 서둘러라! 어서 빨리 발동을…! 아니,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그곳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요한네스와.
“그게… 워낙 까다로운 결계라….”
“나름 애를 쓰고 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요한네스의 닦달에 난처해하는 마도공학자들이 있었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뭘 하고 있는지 뻔하다.
쥐새끼들처럼 탈출하려고 각을 보고 있던 것이다.
“어이가 없네. 대체 언제 뒷구녕으로 저런 걸 준비한 거야?”
유적의 대결계를 뚫을 수 있는 비장의 수를 갖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우리끼리 치고받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의미도 없이 우리 잡겠다고 용쓰다가 요한네스 놓쳐버리면? 그럼 완전히 바보 되는 건 너 아니야?”
“…….”
맞는 말이다.
그거야말로 최악의 경우.
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화를 풀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요한네스는 손에 넣어야 한다.
“쳇! 그래. 그것도 맞군. 넌 조금 이따 보자. 여기서 늘어난 명줄이나 즐기고 있어.”
“그럼그럼, 천천히 볼일 보고 와.”
진혁이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어줬다.
콰앙!
크리드가 단숨에 요한네스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것이 양쪽에게 있어 악몽의 시작이었다.
⁕⁕⁕
“우와아아악!”
“오, 온다. 놈이 옵니다!”
크리드가 다가오는 걸 확인한 마도공학자가 급보를 올렸다.
요한네스 역시 두 눈이 터져라 부릅떴다.
크리드의 성격상 눈앞에 있는 방해꾼들을 내버려두고 바로 이쪽을 노릴 리 없을 터.
특히나 완전히 사냥감을 독 안에 가둬놨다고 확신하고 있는 지금 더더욱 사냥을 서두를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런데도 이런다는 건….
‘설마….’
요한네스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개처럼 스쳐갔다.
정확히는 다리 위에서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진혁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산 채로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자연스레 욕이 솟구쳐 올랐다.
어째서 다른 층계의 신격들이 그토록 강진혁이란 인간을 죽이고 싶어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함정 하나에 의지하지 말고 플랜 B와 C까지도 준비했어야 했는데.
상대를 얕잡아본 게 최악의 실수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
콰콰콰쾅!
“끄아아아악!”
“내, 내 팔이…!”
크리드가 양 손에 든 꼬챙이를 휘두르자 짙은 피보라가 일어났다.
“날 내버려두고 어딜 가려고 그래? 우리 해야 할 이야기들이 아주 잔뜩 남아 있는데?”
“이 더러운 잡종 따위가… 유적이나 지키라고 했으면 맡은 일이나 잘 할 것이지. 감히, 우리에게 이빨을 들이밀어?”
“호오. 영감탱이가 죽기 직전인데도 그놈의 주둥이는 살아 있네? 자꾸 그러면 더 아프게 죽는 수가 있어.”
“흥! 개소리! 네놈이 괴물인 건 맞지만, 우리도 아예 아무 대비도 없이 이곳에 온 건 아니다.”
이미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사라진 상황.
요한네스가 품에서 룬어로 장식된 큐브를 꺼냈다.
우우우웅!
[‘봉인된 육각큐브’를 사용했습니다!]
[마도병기 ‘수정 드래곤(SS)’이 깨어납니다.]
[마도병기 ‘티타늄 골렘(AAA)’들이 깨어납니다.]
요한네스의 양옆으로 상당한 수의 병력이 나타났다.
압도적인 크기의 위용을 자랑하는 수정 드래곤.
“크오오오!”
진짜 드래곤에게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언데드 계열의 본 드래곤과는 견줄 수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크리드를 위협하기에 충분할 터.
더군다나 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티타늄 골렘이 무려 100기나 있지 않은가?
원래는 팬드래건과 ‘원대한 계획’을 위해 준비해둔 것들이지만….
상관없다.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당장 저 간악한 가디언을 박살내버려라!”
요한네스의 명령에 수정 드래곤과 티타늄 골렘들이 움직였다.
“크하하하! 그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거리긴 해야지. 이제야 좀 재밌어지겠네.”
이에 질세라 크리드도 군단을 이끈 채 절벽의 끝을 향해 움직였다.
또 한 차례 거대한 전쟁이 발발했다.
“그오오오!”
티타늄 골렘의 주먹이 벌레들을 짓뭉개고 수정 드래곤이 한 입에 거미 한 마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반면,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몬스터들은 골렘들을 포위해 하나씩 각개격파를 해나갔다.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르는 접전.
그런데.
콰앙!
요한네스의 티타늄 골렘에 폭발이 일어났다.
“커억 뭐, 뭐냐 이건 또?”
가까이서 골렘들을 지휘하던 요한네스가 그 폭발에 말려들었다.
로브에 붙은 불을 간신히 털어낸 요한네스가 진혁을 노려봤다.
“아, 미안미안. 실수였어. 조준을 잘못했네. 진짜 다음엔 잘 맞힐게.”
진혁이 한 손을 들어올렸다.
투쾅!
“크아악!”
이번엔 크리드의 머리가 그대로 꺾였다.
“어이쿠. 많이 아팠어? 미안해. 요새 영 명중률이 형편없네. 노안이 와서 그런가. 크흠.”
진혁이 이번에도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러더니 야금야금 양 쪽의 병력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대놓고 티가 나진 않지만, 조금씩 신경이 쓰일 정도로.
-설마, 내가 저 놈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건가?
-그럴듯한 말로 이간질이나 시킨 다음 이대로 양쪽의 전력을 깎아먹을 작정이라면….
의도는 알겠다.
문제는, 의도를 알아도 대처가 안 된다는 점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원수를 박살내는 게 관건인 만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요한네스만 죽이면 바로 저 녀석 차례다.
-크리드만 박살낸 다음에 제대로 요리해주마.
두 명이 모두 어금니를 씹으며 조금 뒤를 기약했다.
⁕⁕⁕
이걸로 시간은 조금 벌었다.
둘 중에 하나가 죽기 전까지 이 다음 수를 생각해내야 한다.
“아무래도 우리도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저놈하고 싸우는 건 시간 낭비밖에 안 돼.”
엘리스가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판단했다.
그 말대로 이 다리에서 크리드를 상대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높다.
단순히 마도공학으로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 외에도 크리드는 대인전과 대군전에 특화된 능력을 모두 가진 만능형 가디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죽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틈을 만들어줄 계기가 필요하다.
가장 선두에서 크리드의 모든 걸 받아줄 수 있는 존재가.
이태민.
과거 시련의 탑에서부터 함께 해 왔던 소중한 동료이자 이번 층계 공략에 핵심을 쥐고 있는 카드이기도 했다.
‘각성을 시키려면 역시 그 방법이 제일 좋을 텐데….’
진혁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루트를 곱씹었다.
정말로 확실한 방법.
단점은 나중에 모든 사람들에게 쓰레기라 비난 받을 수 있는 위험이 높았다.
‘각성과 욕받이 둘 중에 하나라….’
뭐, 별로 어렵지 않은 문제다.
욕먹는 거야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동화 듣는 것처럼 자장가로 들어줄 수도 있다.
진혁이 슬쩍 단검을 허벅지에 갖다 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깊숙이 찔렀다.
푸슉!
허벅지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계약자? 지금 뭐하는 거야? 미쳤어?”
엘리스가 깜짝 놀라 치료를 해주려 했지만, 진혁은 손을 드는 것으로 엘리스를 제지했다.
‘이걸론 부족해.’
서걱!
한 번.
슥!
다시 한 번.
이태민과 유연화가 몬스터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최대한 ‘치명상’을 늘려야 한다.
“키에에에!”
“캬아아앗!”
거대한 덩치를 지닌 몬스터들.
정신이 없는 요한네스와 달리 크리드 쪽에선 병력의 일부분을 다시 이쪽으로 돌려둔 상태였다.
“이쪽 조금만 더 막아줘요! 드론들 다 운용하려면 아직 마력이 부족해서….”
“알겠어! 다들, 들었죠? 멍하니 구경만 하지 말고 살려면 밥값 해야죠?”
“젠장. 해보자고.”
“고인물 코퍼레이션에게만 모든 짐을 맡길 순 없지. 나도 간다!”
“우아아아아!”
이태민과 유연화를 필두로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진형을 갖췄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수성전의 서막이 오른 순간이다.
그 사이.
“캬아, 완벽해.”
진혁이 할로윈 뺨따구 때릴 만큼의 분장을 완성시켰다.
여기저기 얼룩진 피와 상처.
누가 보더라도 중상을 입은 거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다.
이미 상처는 ‘별의 가호’를 통해 다 회복된 뒤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옷을 홀딱 벗기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걸 알아볼 리는 없을 터. 핏자국만으로도 전시효과를 노리기엔 충분했다.
코스튬 테마는 어디 보자….
‘동료…와 숭고한 희생으로 해볼까?‘
클리셰적인 왕도 소년물에선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진혁이 본격 이태민 각성을 위한 연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