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블랙 드래곤 ‘팬드래건’ (4)
지옥불을 연상케 하는 겁화.
하지만, 진혁 역시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자리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눈보라 속에서 기척을 완전히 지운 뒤, 거기에 ‘음영극살’을 더한다.
두 개의 검이 팬드래건의 발목을 노렸다.
카아앙!
분명, 발목을 통째로 잘라낼 생각으로 휘두른 거였는데.
울려 퍼진 건 날카로운 금속음이었다.
손끝을 따라 저릿저릿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그림자를 이용한 전이는 제법 신선했지만, 미세한 살기를 갈무리하는 건 잊었나 보구나. 이래서야 어디서 공격할지 훤히 보이지 않느냐?”
“……확실히 생각보다 예리하긴 하네.”
드래곤답지 않게 근접전이 익숙하다.
아니, 익숙하다 못해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쪽도 이제 막 몸풀기를 시작했을 뿐.
아직 제대로된 건 보여주지도 않았다.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단검을 따라 서로 다른 속성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거기에 ‘천마신공’의 초식이 펼쳐지자 강기들이 거센 춤으로 변했다.
사각!
눈송이들이 잘리며 검격이 폭발했다.
무수히 쪼개진 검이 팬드래건의 전신을 노렸다.
콰콰콰콰콰콰!
눈보라 속에 숨겨진 검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제 아무리 팬드래건이라도 낯빛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큭!”
나름대로 검에 조예가 있다곤 하지만, 천마신공의 초식을 정면에서 받아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팬드래건이 ‘드래곤 피어’를 발동합니다!]
마주하는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드래곤의 권위.
“……!!”
내면에 스며들어 있는 깊은 공포를 끄집어내는 능력으로 인해 진혁의 검격이 다소나마 무뎌졌다.
그리고 그 틈을….
“걸렸구나!”
놓칠 팬드래건이 아니었다.
[좌표 고정.]
[‘10서클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떨어집니다!]
눈으로 덮인 하늘이 열렸다.
곧이어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뒤덮인 거대한 운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진혁이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10서클 이상의 광역마법만은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했건만.
작은 실수가 뼈아픈 결과를 만들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이대로 지면에 적중시켰다간 고유 성창으로 만든 심상 세계 그 자체를 파괴해 버릴 테니까.
진혁이 두 개의 단검을 그대로 아공간 인벤토리에 역소환시켰다.
대신.
일그러진 공간 너머에서 새로운 무기가 등장했다.
태산마저 갈라버릴 듯한 크기.
대검 전체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마력과 살기는 그 어떤 무기와도 달랐다.
“그 검은….”
팬드래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모를 리가 없겠지.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드래곤을 상대로 최강의 상성을 자랑하며, 에이션트급 마룡의 목을 쳐 버린 신화 속 성유물을.
[드래곤의 상위 종족인 고대룡 존재를 인식합니다!]
[기본 능력에 30%만큼의 추가 효과를 얻습니다!]
[죽인 드래곤의 마릿수 당 2%의 추가 능력치를 영구적으로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연이어 올라가는 상태창.
양손으로 잡은 발뭉의 손잡이가 더더욱 뜨거워졌다.
마치, 불에 달군 쇳덩이를 붙잡고 있는 것만 같다.
이거라면….
가능하다.
진혁이 자세를 잡았다.
‘툼그레이브의 오른팔’이 검의 무게와 칼날에 실려 있는 격을 단단히 지탱했다.
연이어 사용하는 고유 능력과 스킬들로 인해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진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오히려 고통을 떨쳐내고 더욱더 날카롭게 기세를 더해나갔다.
동시에.
쿠쿠쿠쿠쿠!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운석들이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으로 치면 몇 초 남짓한 찰나.
지면에 닿은 발뭉이 횡으로 가로질렀다.
거기엔 화려한 초식도.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검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횡으로 움직이며 검이 지닌 본연의 의미를 이행할 뿐.
그것으로 충분하다.
콰드득!
직경 수십 미터가 넘는 운석들을 반으로 쪼개는 장면은 경탄을 넘어 그로테스크해 보이기까지 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광경에 싸움에 공백이 생긴 것이다.
“후우….”
진혁이 발뭉을 가볍게 휘둘렀다.
칼날에 묻은 흙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말도 안 되는….”
팬드래건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발동시켰을 때만 해도 이변은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
방금 전 응수를 보며 그 확신이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그뿐이랴?
발뭉까지 손에 넣었다면 리스크는 말도 안 되게 높아진다.
더 이상 만만하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군.”
한 번 뱉을 말을 어기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 대상이 인간이라면 더욱더.
그러나, 이대로 싸운다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설렁설렁하는 건 그만두겠다. 널 먹잇감이 아닌 적으로 인정해주지.”
파츠츠!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흉흉한 기운.
검은 불을 관장하는 고대룡이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
“크오오오!”
포효하는 것만으로도 대기가 쩌렁쩌렁 울린다.
고유성창으로 만든 결계에 금이 쩍쩍 갔다.
‘간만에 보니 엄청나긴 하네.’
오싹…! 오싹…!
솜털이 모조리 솟구치고 피부가 아린다.
최강의 생명체를 눈앞에서 마주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과연, 드래곤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답다.
[흑염룡 ‘팬드래건’이 현현합니다!]
눈송이들이 흑염에 덮여 검붉게 변했다.
단순히 현현하는 것만으로도 공기 중에 녹아 있는 마력을 재분배할 수 있는 권능.
“어떠냐? 이게 바로 내 본신이다.”
드래곤의 형태로 돌아간 이상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는 없게 됐지만, 그걸 아득히 뛰어넘을 마력을 손에 넣었다.
용언의 질도. 그걸 통해 발동시킬 수 있는 마법진의 수도.
레벨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팬드래건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손가락 끝에 맺힌 빛이 점멸했다.
퍼억!
“……!?”
심장에서 몇 센티미터 떨어진 지점.
그곳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손가락의 끝을 보고 방향을 예측한 거지. 빛이 어느 궤적으로 날아오는지는 인지하지도 못했다.
쿨럭하고.
진혁의 입에서 굵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곧바로 ‘별의 가호’가 상처를 복구하기 시작했으나, 방금 전 한 방으로 마력이 뭉텅이로 깎여나갔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또 다시 빛줄기가 점멸했다.
콰아앙!
진혁이 발뭉을 위에서 아래로 올려쳤다.
검에 닿은 빛줄기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했다.
[‘탐식의 눈’이 발동된 상태입니다.]
[다음 공격은 ‘머리’입니다.]
심장을 노릴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에 대응이 가능했다.
‘탐식의 눈’이 지닌 사기적인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정확히는 탐식의 눈과 ‘간극’ 그리고 ‘행운’ 스탯이 합쳐진 덕분이었지만.
‘간만에 고대룡이랑 노니 스릴이 넘치다 못해 심장마비가 걸릴 것 같네.’
이미 본체로 현현한 이상 모든 제약이 풀린 셈.
드래곤과의 마법전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된 공략법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다.
[고유 능력 ‘트리플 매직’이 발동됩니다!]
마법 연산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며 형형색색의 원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소롭군. 감히 마법의 창시자인 이 몸과 마법전을 하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이길 생각까지는 아니고.”
진혁이 완성된 마법진에서 푸른 번개들을 꺼내들었다.
제우스의 아스트라페를 연상케 하는 번개들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성가시게 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깟 반쪽짜리 마법으로 말인가?”
“반쪽짜리인지 아닌지는 확인해보면 되겠지. 그런데 너야말로 왜 이렇게 마법을 좀 안다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지 모르겠네. 데스티아에 비하면 한참이나 급이 떨어지지 않나?”
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한 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말로 인해 팬드래건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너… 지금 뭐라고 지껄인 것이냐. 데스티아…보다도 내가 급이 한참이나… 낮다고?”
어떻게 인간이 48층에 있는 데스티아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이 맴돌고 있었으니까.
“아, 너무 대놓고 말했나? 미안미안. 내가 속에 담아둔 말을 내뱉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
“그 주둥이.”
“응?”
“해선 안 될 개소리를 지껄이는 그 입부터 막으마.”
팬드래건의 주위로 검은색 칼날들이 나타났다.
촤촤촤촤!
번개와 칼날들이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그것도 잠시.
칼날이 번개를 꿰뚫고 진혁의 안면으로 향했다.
그런데.
스슷!
난도질을 당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진혁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철저하게 공간이동을 방해하는 왜곡장까지 펼쳐뒀건만. 그걸 파훼해버릴 줄이야.
그건 말도 안 된다.
술식에 누군가 끼어든 흔적 따윈 없었는데….
팬드래건이 당황하는 사이 진혁이 한 단계 속도를 올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이건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이영환휘.
단거리 순간이동이라는 점은 같았지만, 마법을 이용한 블링크와는 발현 방식 자체가 다르다.
마력의 흐름을 쫓는 것에 익숙한 팬드래건으로서는 다소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도 몇 초 남짓한 찰나를 벌었을 뿐이다.
고대룡 역시 무림인을 포함해 다양한 능력을 지닌 놈들과 싸워봤을 테니까.
서걱!
“크아악!”
발뭉이 실드를 뚫고 팬드래건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젠장.
얕다.
최대한 깊숙이 박아 넣는다고 했는데, 짧은 틈 동안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까진 불가능했다.
“크아아아! 내 몸에… 감히, 내 몸에 … 이 쥐새끼가아아!”
분노가 임계점을 넘은 팬드래건이 거대한 다리를 들어올렸다.
마법이고 자시고.
육탄공격으로 으깨버리겠다는 생각에서다.
워낙에 큰 동작으로 대검을 휘두른 터라 빠져나가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중력장까지 깔려 있었기에 몸을 가누기가 훨씬 더 힘들었다.
“큭!”
진혁이 ‘별의 가호’와 ‘만다라’를 통해 최대한의 방어태세에 돌입했다.
콰아앙!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이 전신을 짓눌렀다.
온몸의 뼈가 모조리 박살나버리는 느낌이다.
팬드래건이 재차 다리를 들어올렸다.
저걸 연속으로 받아냈다간….
그런데 바로 그때.
[나노리프가 ‘나노테크놀러지’ - 봉인 전이를 발동합니다!]
기다리던 나노리프의 지원이 이어졌다.
촤르르륵!
굵은 쇠사슬들이 회오리치며 거대한 팬드래건의 몸을 휘감았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가뭄에 단비 같은 타이밍.
드디어 나노리프가 마력 분배를 끝낸 모양이다.
진혁이 한숨을 돌렸다.
”이까짓 거!”
팬드래건이 쇠사슬을 단번에 박살내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힘을 주면 줄수록 쇠사슬의 구속력이 더더욱 강해졌다.
우우웅!
룬어들이 빛나며 팬드래건이 발동하려는 마법진에 균열을 만들었다.
아주 작은. 너무나 미세하여 육안으로 식별이 안 된다.
그러나, 완벽함을 추구하는 마법에 있어 작은 균열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펜드래건이 강제로 사슬을 푸는 걸 멈췄다.
”…그래. 제법 굵은 밧줄을 준비해뒀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걸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나노리프의 마력도 무한정한 게 아닐 터.
시간을 벌었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마력이 급속도로 빠르게 소모됩니다!]
“뭐든 빨리…! 이제 얼마 못 버텨!”
나노리프가 고함을 질렀다.
그래. 알고 있다.
이런 걸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쯤은.
그러니.
준비해주면 된다.
고대룡에게 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호적수를.
그리고 그 순간.
“모기이이이!”
새로운 고대룡의 포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