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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546화 (547/653)

546화. 불의 정령왕 ‘이그니’

“크오오오!”

천지를 진동케 하는 포효소리.

구름이 갈라지고 대지가 흔들렸다.

3마리의 드래곤들이 절벽을 마주한 채 무시무시한 마력을 끌어모았다.

“감히, 드래곤의 일에 개입을 하려 하다니….”

“그리하고도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드래곤들이 ‘피어’를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쿠!

지독한 살기다.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드래곤들이 이 정도로 분노를 드러내는 건 보기 쉽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 반대편에 있는 건 전신이 이글거리는 화염에 휘감긴 거대한 존재.

불의 정령왕 ‘이그니’였다.

불로 만든 긴 장검을 들고 있는 이그니는 에이션트급 드래곤 세 마리를 홀로 상대하고 있었다.

“와아….”

“이건 대체….”

“엄청나네요.”

“드래곤들…이 이렇게나 많이….”

지켜보던 모두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과거의 기억을 엿본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게 이런 터무니없는 것인 줄이야.

콰콰콰쾅!

콰아앙!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절벽에 기다란 상처가 어지럽게 생겨났다.

거대한 두 개의 자연재해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만 같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공방전이 거듭되었지만, 균형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위대한 종족이라는 자들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짓을 하면서… 말은 잘도 지껄여대는구나. 나 역시 네놈들이 탑에 재앙을 불러올 짓만 하지 않았다면 직접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그니의 말에 진혁의 눈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드래곤들이 결코 외부로 발설하고 싶어하지 않는 비밀.

이건 그에 관한 이야기다.

이그니가 으르렁대자 드래곤들이 더욱더 다급히 움직였다.

“닥쳐라!”

“그 입을 당장에 찢어주마!”

“정령계에서 영원히 못 나오게 만들어버리겠다!”

서로 다른 세 개의 브레스가 한 개의 점으로 모여들었다.

형형색색의 마력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남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너희가 아무리 그래도 …은… 일어나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이그니가 말을 하던 바로 그때.

띠링! 띠링! 띠링!

[이 이상 진행한다면 드래곤족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만약, 드래곤족의 비밀을 알게 될 경우 모든 대상은 드래곤들의 공적이 되며, 각각의 대상에겐 ‘낙인’이 새겨지게 됩니다.(드래곤 로드가 직접 풀어주지 않는 한 낙인의 효과는 영구히 지속됩니다.)

모두의 앞에 붉은 상태창이 연이어 점멸했다.

이건 경고다.

이 이상 선을 넘는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라는.

다들 그걸 알았는지.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드래곤 족의 분노라고?”

“이건 쉽지 않네요.”

“형. 누나들. 다들 같은 생각인 거죠?”

“당연하지!”

“동감이다. 굳이 적을 늘릴 필요는 없지. 리스크가 너무나 올라갈 테니까.”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기억을 엿본 이상 연계 퀘스트 역시 일정 부분 충족됐을 터.

혹여,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더라도 이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보단 나았다.

33층이 공략된 이상 보상쯤이야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계속 진행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연계 퀘스트의 최종 결정 방식은 투표에 의한 민주제가 아니다.

퀘스트를 받은 무리를 이끄는 파티장의 고유권한이지.

“이야, 역시 남의 비밀 듣는 게 제일 재밌다니까. 진짜 어떤 거려나.”

진혁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미친….”

“안 돼애애!”

“형!”

“하아….”

“골치 아프게 됐구나. 이래야… 짐의 계약자답긴 하다만.”

모두의 입에서 처절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당연한 상식을 깨부수는 정신 나간 고인물.

진혁의 존재를 간과한 게 가장 큰 실수였다.

[기억이 다시 재생됩니다.]

이어진 건….

……브레스를 난사하는 드래곤들과.

그 모든 걸 홀로 받아내는 이그니.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보랏빛 촉수들이었다

니알라토텝.

층계를 부유하는 태고의 존재가 이그니를 막아섰다.

“정말이지 성가시기 짝이 없군요.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뜨거운 불덩이를 마주하려니까 아주 죽을 맛입니다.”

니알라토텝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태함과 귀찮음이 가득 묻어 나오는 말투에선 자신을 이곳까지 부른 드래곤들에 대한 짜증까지 느껴졌다.

“무능한 것들만 있는 게 문제죠. 안 그렇습니까?”

드래곤들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저희 선에서 처리해보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불의 정령이라 브레스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탓에….”

“됐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내가 나섰어야 했는데. 쯧.”

니알라토텝이 기다란 지팡이를 꺼냈다.

[‘태고의 권능’ - 무언(無言)이 발동됩니다.]

쿠쿠쿠쿠쿠!

촉수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보랏빛 물결이 거대한 파도를 이루기 시작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신은 너무 선을 넘었어요.”

“추잡한 커튼 뒤를 본 게 죄라는 말이더냐? 하긴, 드래곤 로드 자리를 드래곤들이 아닌 네놈이 정해준다는 게 알려진다면 큰 파장이 일어날 테니까.”

이그니가 이에 맞서 거대한 장검에 화염을 불어넣었다.

화르륵!

불길이 검신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검의 흐름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유려하게 허공을 가른 검이 하나의 형을 갖췄다.

“게다가 로드를 상징하는 영혼석을 만들기 위해선 1,000명이라는 거주자의 생명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알려져선 안 되겠지. 고귀한 드래곤들과 절대적인 50층의 권위가 무너질 테니까.”

“후후후.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기는. 뭐, 그래도 정확한 말입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네요. 때문에… 왜 당신이 이곳에서 죽어줘야 되는지도 알고 있겠군요?”

“허무하게 쓰러질 생각은 없다. 아무리 상대가 네놈이라 해도.”

“다들 그런 식으로 말하곤 하죠. 한 번 촉수 맛을 맛보기 전까지는요.”

곧이어 거대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절벽에 거북이 등껍질 같은 금이 가며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박살나기 시작했다.

거기까지가 모두가 볼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기억이 종료됩니다.]

[비밀을 엿본 대가로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불의 파편’을 +1개 획득하셨습니다!]

상태창이 재차 점멸하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

***

까맣게 물든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땐 치열한 전장이 아닌 세월이 지나간 이후의 풍경이 펼쳐졌다.

“크으! 드래곤들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진혁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반면, 나머지 멤버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비밀이고 나발이고.

앞으로는 드래곤 종족은 물론, 50층의 추격을 추가로 받게 되었다.

가뜩이나 적이 많은 상황인데 신경 써야 할 게 몇 배는 늘게 된 것이다.

“하아… 진짜 네놈 때문에….”

천유성이 속에서 나오는 욕을 간신히 삼켰다.

말해봤자 소용없다.

화내봤자 손해 보는 건 언제나 이쪽이다.

“됐다. 말을 말자. 말을. 난 머리 좀 식히러 갈 테니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나중에 이야기하든가 하지.”

“나도 오늘은 푹 좀 자야겠어. 일어나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네.”

“후우. 형도 쉬세요.”

유연화와 이태민도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으음. 다들 저렇게 착잡해 하니 양심에 난 융털이 살짝 찔리긴 한다.

그래도 나중엔 다들 고마워할 거다.

태고의 존재들과 일찍부터 적대관계를 맺어두면 이후에 받는 보상의 폭이 훨씬 더 커질 테니까.

‘그나저나….’

진혁의 시선이 주먹만 한 불덩이로 향했다.

활활 타오르는 파편은 이그니가 남긴 ‘불의 파편’.

이것만 가지고 있는다면 이그니 쪽에서 먼저 접촉을 해올 것이다.

드래곤과 태고의 존재라는 공동의 적을 공유하게 됐으니.

진혁이 불의 파편을 아공간 인벤토리 한켠에 잘 보관해두었다.

이제 33층에서의 급한 불은 대충 끈 셈.

다음으로 할 건 올림포스와 라그나로크의 전후처리다.

[상위 세력 ‘라그나로크’에게 대화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우웅!

스크롤을 찢자 눈부신 빛이 점멸했다.

동시에.

파츠츠…!

하늘에서 푸른 낙뢰가 떨어졌다.

“어으으…. 삭신이 다 쑤시는구만.”

현현한 것은 근육질의 체구를 가진 거한.

천둥의 신 ‘토르’다.

방금 전까지 어디서 날뛰고 있었는지, 전신이 먼지와 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전쟁은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누가 보면 최후의 전쟁이라도 일어난 줄 알겠다.

“큰 건 끝났지. 하지만 자잘한 전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빌어먹을. 이게 다 그 더러운 놈들이 깨끗하게 승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순순히 물러날 성격이 아니긴 하죠.”

주신을 둘이나 잃긴 했지만, 제우스를 비롯한 나머지 신격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올림포스라는 거대 거점에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대 도움이 절실해. 분노한 전사들이 올림포스로 쳐들어가려는 걸 막는 것도 이제 한계거든.”

하긴. 발할라로 가고 싶어 환장한 전투광들이 도발을 잠자코 넘길 리 없겠지.

토르가 저리 말할 정도면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아슬아슬한 모양이다.

“회담 장소는 제가 말씀드렸던 곳으로 잡아두신 겁니까?”

“아무렴. 시키는 대로 전부 다 준비해두었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도록 하죠.”

“좋아. 커흠! 헤임달! 듣고 있나? 어이!”

토르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하늘에서 또 다른 신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청 떨어지겠습니다. 그리 세게 말하지 않으셔도 다 들려요.”

“크하하하! 난 또 그새 사라진 줄 알았지.”

“가시는 건 토르님을 제외하고 두 분뿐인가요?”

헤임달이 진혁과 엘리스를 바라봤다.

“예.”

“맞느니라.”

[헤임달이 ‘차원을 연결하는 다리’를 소환합니다!]

전사들의 도시 ‘신(新) 아스가르드’로 가는 무지개 다리.

드디어 북유럽 신화의 새로운 터전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두 눈으로 볼 시간이 찾아왔다.

⁕⁕⁕

구름이 발 아래에 드리운 산.

올림포스의 심장부에서도 몇몇 신격들이 움직일 준비를 끝마쳤다.

타닥…탁.

모닥불 너머로 보이는 건 전쟁의 신 아레스. 그리고 아폴론을 잃고 괴로워하는 아르테미스였다.

마지막으로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아테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드디어 시작이군.”

아레스가 흥분한 기색을 살짝 내비쳤다.

반면.

“…….”

아르테미스는 아레스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을 보였다.

움찔하고.

화살을 잡은 손이 떨렸다.

지독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게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만 같았다.

“아르테미스!”

아테나가 고함쳤다.

“……!”

“당신이 화가 나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시키신 임무까지 망각해선 안 됩니다.”

“…….”

아르테미스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올빼미들의 눈을 통해 진혁과 엘리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다 잊고.

다 엎고.

모두를 죽여버리고 싶어질 만큼.

하지만, 그런 감정마저 억누르게 만드는 게 바로 제우스의 명령이었다.

이번 회담은 앞으로의 판세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도 있을 터.

그렇기에 모두가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천세와 에덴 쪽에서도 아스가르드로 떠났습니다. 저와 당신 역시 올림포스를 대표해 그곳으로 가게 되겠지만, 아레스 오라버니가 신호하기 전까지 절대 먼저 공격을 해선 안 됩니다.”

“원수 놈을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건가요?”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반드시.”

탑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흔들면.

아무리 철벽같던 놈이라 할지라도 틈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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