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거대 세력들의 전쟁 (3)
덜덜덜….
온 몸이 격하게 떨린다.
북받쳐 오는 감정에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소중한 혈육.
수많은 추억과 그보다 많은 감정을 공유했던 하나뿐인 오라버니가 눈앞에 있었다.
아르테미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저것이 가짜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빌려온 능력과 만들어낸 껍데기로 이루어진 것이란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자신도 모르게 몸은 앞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주신 ‘아르테미스’의 감정이 흔들립니다!]
[고유 성창 ‘달들의 속삭임’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진혁이 아폴론이 사용한 것과 똑같은 활을 꺼내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모조품이다.
진짜에 비하면 형편없는 능력과 내구성을 지닌.
그러나 이 활의 목적은 유효타를 입히는 게 아니다.
극적인 상황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위함이지.
[주신 ‘아르테미스’의 감정이 매우 크게 흔들립니다!]
[고유 성창 ‘달들의 속삭임’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아아아….”
아르테미스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감정과 이성의 경계가 흐려졌고. 냉철했던 본능은 계속해서 꿈꾸었던 희망에 의해 덧칠해졌다.
결국 아르테미스는 스스로를 속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게 진혁이 아닌 자신의 오라버니라 믿으며.
“보고… 싶었어. 정말로. 다른 신들은 전부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난 혹시 모른다고 했거든. 분명, 오라버니라면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좋아.
주연 배우가 완전히 자기 역할에 몰입했다.
진혁이 표정을 180도 바꿨다.
목소리 역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왜 날 버렸지?”
툭하고 던진 말.
짧디짧은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파고들었다.
“뭐…?”
아르테미스가 그 자리에서 멈췄다.
큰 충격을 받았는지 숨을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내가 그 지옥에서 산 채로 타들어갈 때. 하나뿐인 동생은 날 버렸다. 사지에서 고통받는 날 뒤로한 채 그대로 도망쳐버렸지.”
“아니야… 난 도망치지 않았어. 구하려고… 꼭 구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구하지 않았지.”
진혁이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씩 덧붙였다.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행동에 나서진 않았어. 결국, 네가 날 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내가 죽어버렸다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을 테고.”
“……!!”
아르테미스의 두 눈을 따라 반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혁이 한 말대로 자신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비관하고 부정하기만 했을 뿐이지.
그리고 그 사실이….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까지 끊어버렸다.
[대상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복수의 감정이 절망과 좌절로 바뀌었습니다.]
[능력의 복사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쿵!
아르테미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내가….”
흐느끼는 목소리.
달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고유 성창이 해제되면서 분신들이 하나씩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으음….’
이렇게 보니 누가 악역인지 살짝 헷갈리는 것 같긴 하다.
끅끅 대며 펑펑 우는 걸 보니 0.1mg 정도 가슴이 아픈 것 같기도 하고.
활을 잡은 손이 움찔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 아르테미스를 죽이는 건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지만….
글쎄, 그것보다는 조금 더 재밌는 방법이 떠올랐다.
기왕 악역이 되기로 한 이상 아예 작정하고 콘셉트를 지키지 뭐.
“만회하고 싶으냐?”
“만회… 하고 싶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거야.”
“그렇다면,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다.”
진혁이 아공간에서 기묘하게 생긴 시계를 꺼냈다.
“이건… 설마?”
“그래. 크로노스의 태엽 시계다. 망가지긴 했지만, 몇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다시 한 번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지.”
‘회귀’의 능력이 담긴 최상급 성유물.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고대 주신의 시그니처 아이템이다.
진혁이 나름대로 정교하게 만든 황금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물론,
이게 진짜일 리는 없다.
그딴 사기적인 아이템이 있으면 진즉에 훨씬 더 요긴한 상황에 써먹었겠지.
하지만, 이미 멘탈이 나가버린 아르테미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마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위태로운 상태였다.
“내가… 뭘 해야 하는 건데?”
아르테미스의 물음에,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제 아르테미스는 완전히 미끼를 목구멍까지 집어 삼킨 꼴.
“내 영혼은 현재 강진혁이란 인간의 몸에 의탁해 있다. 그를 도와 망가진 태엽 시계를 되감을 수 있게 해라.”
적을 죽이는 선택지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적을 뼛속까지 이용할 수만 있다면 그건 더욱더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
벌써 몇 시간이나 이어진 치열한 전투.
밤을 이용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 기습에 두 세력의 피해는 가늠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러나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올림포스와 북유럽과는 달리, 천세와 에덴 쪽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상황을 관망했다.
우리엘이야 진혁과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천세 측에선 굳이 가장 치열할 때 참전해 피해를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흐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올림포스 쪽의 저력이 강하긴 강하군요.”
“모든 면에서 밀어붙이고 있어. 확실히 이전과는 달리 베리엘과 가브리엘이 지원을 하고 있진 않으니까. 무림이나 나머지 세력들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북유럽 놈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거점에서 오는 메리트를 확실히 살리고 있어요.”
“하긴, 새로 자라나긴 했어도 위그드라실은 위그드라실이라 이건가.”
천세의 신격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놨다.
대부분의 의견은 올림포스의 승리를 점치는 쪽.
하물며 올림포스 측에선 아직 사용하지 않은 비장의 수단들까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흐릿해진 영역’이 완성돼 올림포스의 본 거점을 소환한다면, 제아무리 위그드라실의 버프를 받고 있는 북유럽 측이라 하더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북유럽 측에선 제대로 된 자리를 잡으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슬슬 참전해야겠군. 이 이상 눈치만 보며 뭉그적댔다간 전과를 나눠먹지도 못 하겠어.”
상위 주신 격인 시바가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거점에 침입자가 들어옵니다.]
천세의 신격들 앞에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저벅.
툭.
“아… 진짜 멀리도 자릴 잡았네. 진짜. 더럽게 덥기도 하고.”
“인도 특유의 기후 조건을 고려해 거점을 잡았을 확률이 82.55%야. 응.”
천세의 신격들 앞에 엘리스와 프레이가 나타났다.
진혁과 떨어진 직후 즉각 천세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고. 최대한 서두른 덕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간을 보고 있을 거라 했던 말이 맞았네. 대체 계약자는 천세 쪽이랑 접점도 그리 많지 않으면서 어떻게 속마음을 그리 잘 파악하고 있는 거지? 놈들의 거점이 정확히 이쪽에 있을 거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고?’
엘리스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쯤 되면 천세 쪽과 계약한 적이 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반면, 자신들의 위치를 간파당한 천세 쪽은 당황한 감정을 숨기지 못 했다.
“엘리스…. 네가 어떻게 여길?”
“호문쿨루스까지? 빌어먹을 올림포스 놈들. 고인물 코퍼레이션은 자기들이 발을 붙잡아 둘 거라더니. 이게 무슨 상황이냐!?”
아타락시아의 진조에 알파급 호문쿨루스는 성가신 방해물이다.
이쪽의 전력을 상당 부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시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우웅!
황금빛 파장이 나무로 만든 왕좌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서서히 퍼져나갔다.
“예전부터 줄을 잘못 서는 건 한결같구나.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가서 고생을 하고도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냐?”
“멍청한 가주들로부터 등을 돌린 일을 말하는 거라면 짐은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다시 같은 상황이 닥친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엘리스가 시바의 마력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그리고… 계약자의 편에 서는 것 역시 잘못된 선택이 아니니라. 이 또한 짐이 선택한 길이니까.”
“벽이랑 대화하는 기분은 언제나 짜증나는군. 좋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될 터.”
쿠쿠쿠쿠쿠!
시바가 마력을 끌어 모았다.
“두 놈 다 죽여라.”
차가운 말을 끝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
[고유 성창 ‘달들의 속삭임’을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달들의 속삭임]
입수 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달의 힘을 몸에 깃들이게 할 수 있으며, 달빛을 응축시켜 다양한 형태의 무구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능력에 대한 이해도가 일정치 이상 도달할 경우 본신의 일부 스탯을 가진 분신체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복사된 능력을 확인한 진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으, 능력들을 하나둘 모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니까.’
아르테미스의 고유 성창은 특히나 더 탐이 났던 능력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능력과 융합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였으니.
진혁이 서고에 저장된 능력을 불러왔다.
추가로 고른 것은 두 가지.
[고유 성창 ‘달들의 속삭임’과 고유 능력 ‘별의 가호’, 고유 성창 ‘백야(白夜)’가 융합합니다.]
별과 달의 가호에 새하얗게 물든 세계가 접목된다.
마력이 요동치며 세 개의 능력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강한 빛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워낙에 강한 마력이 범람하는 탓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지만,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찮은 실수 때문에 융합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한 달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우우웅!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푸른빛 상태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성공이다!
[고유 성창 ‘잔류월광(潺流月光)’이 저장됩니다.]
달과 별의 가호에 백야로 인한 고유 결계가 추가되었다.
황도십이궁보다 높은 12성급 결계에 대천사에게도 밀리지 않는 최상위급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고. 거기에 기존 아르테미스가 사용했던 ‘달들의 속삭임’의 효과 또한 업그레이드 된 버전으로 발현할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압도적인 상위 호환 버전의 고유 성창을 손에 넣게 된 셈.
두근! 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두망방이질 쳤다.
진혁이 기분 좋은 고양감을 느끼며 융합된 능력을 ‘세계의 기억’에 잘 저장해 두었다.
융합까지 마치자 비로소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저택이 반파되다시피 했으니 당연히 기별이 올 것이 틀림없었다.
때마침.
[헤임달이 ‘게이트’를 개방합니다!]
눈앞에 게이트가 나타났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아무래도 다들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곧이어. 헤임달을 필두로 토르와 로키 그리고 발두르가 걸어 나왔다.
“다행히 무사하셨군요.”
헤임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하하! 내가 뭐라 했어? 올림포스 놈들은 이 친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니까?”
“그래도 안심하긴 이릅니다. 최대한 저지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올림포스의 거점이 절반 이상 이쪽으로 넘어온 상태입니다.”
토르와 발두르도 한 마디 덧붙였다.
“잠깐, 저자는 아르테미스가 아닙니까?”
로키가 한쪽을 보더니 깜짝 놀라 외쳤다.
워낙에 존재감이 없어서 몰랐는데, 한쪽 구석에 아르테미스가 주저앉아 있었다.
다행히 고함 소리를 듣고도 싸우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목줄을 단단히 채워놨으니까요.”
텅 빈 동공과 중얼거리는 입술,
한 눈에 봐도 아르테미스는 정상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일이 있던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지금은 그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넘쳐났다.
“상황이 시급을 요합니다. 움직이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착용해주십시오. 위그드라실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는 성유물입니다.”
발두르가 태양의 형상을 한 반지를 건넸다.
북유럽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 이가 주신들과 동일한 가호를 받으려면 반드시 이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진혁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반지를 받으려는 그 순간.
“잠깐,”
로키가 발두르를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