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천재(天災), 기간토마키아의 서막 (3)
놀란 건 잠시였다.
이내 정신을 차린 타이탄들 사이에서 거대한 분노가 일어났다.
쿠쿠쿠쿠쿠쿠!
요동치는 살기.
“큭!”
“이 쥐새끼만 한 인간 따위가….”
“귀엽게 봐줬더니 분수 파악을 못하는구나!”
타이탄들이 저마다 무기를 집어들었다.
“진혁 씨!”
“진혁 님!”
테레사와 안드리아가 동시에 나섰다.
테레사는 ‘별의 가호’를 통해 신성력을 끌어모았고. 안드리아는 ‘여우불 놀이’를 발동시켜 구미호의 힘을 개화했다.
숨 막힐 듯한 대치가 펼쳐졌다.
당장 공격이 오고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바로 그때.
“크하하하!”
타이탄들 사이에서 크고 걸쭉한 폭소가 터져나왔다.
“……!?”
“……!!”
진혁에게 덤비려 했던 타이탄들이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켜라. 그자는 나와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지금까지 만난 타이탄들도 하나같이 거대한 덩치와 막대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지금 말을 하는 거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세월과 신화가 느껴지는 말투.
몸에서 풍겨나오는 마력에선 형언할 수 없는 절대자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이 녀석이 바로 크로노스.
타이탄들의 우두머리이자, 제우스 이전에 올림포스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던 주신이다.
역시나….
…먹혔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크로노스는 평범하게 굽실거리는 놈하고는 상종 자체를 안 하는 성격이지.’
아첨이나 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는 약자.
올림포스를 탈환하기 위해서 그런 떨거지들과는 말조차 섞지 않는다.
그것이 크로노스의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도발 섞인 행동들을 했던 건데.
예상했던 것처럼 크로노스가 반응을 보였다.
“근사한 동맹을 제안하러 왔는데, 손님 접대가 영 형편없네. 아! 지하감옥에 너무 오래 갇혀 있더니 사리분별이 잘 안 되는 거려나? 그럼, 이해 좀 해 줄 수도 있고.”
“건방진…! 감히, 저분이 누구인 줄 알고.”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겠다!”
“지금부터.”
타이탄들의 고함 소리에 크로노스가 낮게 으르렁댔다.
“내 허락 없이 입을 여는 놈들은 머리통을 뽑아버리겠다.”
숨 쉬는 소리마저 조심해라.
크로노스의 명령엔 그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헛바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이상 말을 내뱉을 정도로 간이 큰 놈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 당돌하신 인간은 무슨 제안을 가져왔길래 판을 이렇게 키운 거냐? 부디, 내가 흥미로워할 만한 내용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이미 알고 있는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타르타로스의 봉인을 깬 게 바로 나야. 너희들을 이 지옥에서 구해준 은인인 셈이지.”
“호오….”
크로노스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웠다.
반신반의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재밌군. 그토록 꽁꽁 숨겨져 있던 드럼을 찾아낸 게 인간일 줄이야. 허면, 그대의 목적도 제우스를 치는 것인가?”
“놈과는 여러 가지로 악연이 많거든. 이참에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이야. 물론, 그걸 위해선 든든한 동맹이 필요한 법이고.”
“우리를 이곳에서 꺼내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째서 내가 그대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 거지?”
그거야….
“당신들만으로는 절대 올림포스를 탈환하지 못할 테니까.”
냉정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헤라클레스 단 한 명에 의해 전멸해버린 게 타이탄들이었으니.
만에 하나 다시 풀려난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진 않으리라.
더군다나 이번에는 천세까지 가세한 상태 아니던가?
승산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도와준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져. 헤라클레스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제우스의 아스트라페를 버틸 수 있는 카드도 가지고 있으니까.”
“크하하하! 그것 참 오만한 말이로군. 보아하니, 다른 층계에서 제우스와 마주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우스가 올림포스에서 벗어난 덕분. 올림포스 안에서는 그 위력이 5배 이상 증가한다.”
시련의 탑 전체를 통틀어 봐도 가장 강력한 공격기 중 하나.
막거나 상쇄시킬 수 있는 방법 역시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런 아스트라페에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는 건 타이탄의 피를 이은 자들뿐이지. 인간의 몸으로는 그 광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잿더미가 되어버릴 거다.”
뭐, 크로노스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타이탄 족이 아닐 경우 아스트라페는 확실히 성가신 공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걸 보여준다면 어떨까?
진혁이 슬쩍 한쪽 팔을 들어올렸다.
“그 팔은….”
크로노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모를 리가 없겠지.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타이탄 중 하나인 ‘툼그레이브’.
과거 수많은 전쟁에서 전과를 올린 ‘위대한 전사’ 중 하나였다.
그런 그의 팔을 이어받았다는 건.
툼그레이브의 인정을 받은 자라는 뜻.
타이탄의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면 확실히 올림포스를 치기에 부족함이 없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크로노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그대를 믿어보지.”
“잠깐.”
진혁이 크로노스의 말을 끊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동맹이라는 건 서로에게 이익이 됐을 때 하는 거야. 나는 내 패를 깠지만, 그쪽은 뭘 제시해줄 거지?”
“……대가를 내놓으라는 것이냐?”
“당연하지.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
“어이가 없군. 나에게 대가를 요구하다니… 하하.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대 말대로 이 몸과 동맹을 맺으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허면, 바라는 게 무엇이냐?”
“우라노스를 벤 낫과 부서진 시계 파편. 두 개를 넘겨주는 조건이야.”
“……터무니없이 비싸군.”
“글쎄, 올림포스 전체를 저울에 올린다면 그렇게 바가지는 아닌 것 같은데?”
“…….”
아무리 값비싼 성유물이라 할지라도.
평생의 숙원에 비할까?
높이 날았던 만큼, 지하에 처박힌 지금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크로노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구름 위의 왕좌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래. 아무래도 합리적인 가격인 것 같군.”
크로노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으로.
고인물 코퍼레이션과 타이탄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 ⁕ ⁕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입술 밖으로 새어나오자마자 이내 산산이 부서졌다.
붉게 충혈된 눈과 떨리는 손가락.
극심한 피로로 인해 의식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상태 이상이 악화됩니다.]
[계약의 족쇄가 급속도로 헐거워집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계…약자.”
엘리스가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이성과 감성이 미친 듯이 싸워왔다.
‘이해할 수 없어.’
어째서 단순히 계약이 끊어진 것만으로 이토록 괴로운지.
진혁을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을진대, 왜 타는 듯한 갈증이 샘솟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이 순간에 진혁을 만난다면….
…그 때는 소중한 사람이 아닌 피에 굶주린 흡혈귀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최대한 멀어져야 해.’
그나마 이성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지금.
할 수 있는 한 거리를 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생각보다 더 멀리 왔군.”
숲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짙은 위화감.
플레이어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탑에 거주하는 이도 아니었다.
주신들이나 관리자들과도 완전히 결이 달랐지만, 몇 배는 더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자였다.
"누구…냐!"
엘리스가 즉각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워워.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고.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거니까.”
남자가 양 손바닥을 보이며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돕…는다고? 나를?”
“그래. 내 이름은 수리부엉이. 진혁과는 예전부터 각별하게 알고 지내던 사이다. 뒤에서 그를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중이기도 하지.”
수리부엉이….
언젠가 진혁이 그 이름을 언급하는 걸 들은 적 있다.
적대적이 아닌 우호적인 뜻으로.
“내가 왜… 이러는 거야? 난 분명히… 그 누구보다 계약자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우리 중 하나가 발두르의 반지에 장난질을 해놨기 때문이지. 아, 정확히는 내 예전 동료라고 하는 편이 좋겠군.”
수리부엉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태양의 반지에 걸린 저주는 단순히 계약을 파훼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매우 강렬한 적대심과 욕구를 함께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결국, 계약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점으로 둘은 적대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
“계속해서 도망친다고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절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이중 삼중으로 장치를 쳐놨으니까. 애초에 이 계획은 엘리스 그대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거든.”
“오래전…? 이번 전쟁보다 더 이전을 말하는 거야? 설마, 계약자와 만났을 때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엘리스의 말에, 수리부엉이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보다 더 이전이다.”
탑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점.
모든 게 시작되기 이전부터 계획된 일이다.
“애초에 처음 회랑에서 그대가 진혁의 피에 그토록 빠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유독 그에게 빠진 이유가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엘리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충격.
그러고 보니….
……왜 자신은 틈만 나면 계약자의 피를 탐하려 했던 걸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의문점이 채 해소되기 전에 수리부엉이가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너무도 익숙한 모습으로.
“벨…루스?”
아타락시아 가문의 일원이며 자신의 혈족 중 하나.
회랑에 갇히기 이전에도. 그리고 회랑에서 나온 지금까지도.
언제나 든든하게 자신의 곁에서 함께해준 뱀파이어였다.
“이 자는 벨루스가 아니라 내 예전 동료 중 하나다. 벨루스라는 뱀파이어 행세하며 그대의 곁에서 오랫동안 그대를 중독시켜왔지.”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시간과 공을 들이며 천천히.
엘리스가 진혁의 피를 원하게끔 만들었다.
“모든 가주들이 그대를 배신하여 회랑에 밀어넣었을 때. 수족들을 전부 도려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본 적은 없는 건가? 매번 감당하기 힘든 전투가 일어났을 때마다 벨루스가 죽지 않고 임무를 수행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구심도 갖지 않았고?”
엘리스야 너무도 강대하기에 죽이기 힘들었다고 치더라도.
그녀를 따르는 혈족들은 모조리 쓸어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후환은 최대한 남겨두지 않는 게 상식이었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던 거다.”
그 긴긴 유배 생활 동안 곁에 있는 내부자가 있어야 했기에.
엘리스라는 진조를 온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정했을 뿐이다.'
“……이유가…뭐야? 무슨 이유 때문에 날 그렇게 만든 거냐고!”
엘리스가 감정에 북받쳐 악을 썼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했단 사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수리부엉이의 감정엔 동요 따윈 없었다.
그저 묵묵히 현실을 전할 뿐이었다.
수리부엉이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강진혁이란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검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는 최강의 고인물.
그를 저지하기 위해서 운영자들이 고안한 안전 장치가 바로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다.
제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진혁이라 할지라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를 벨 순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