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화. 34층, 껄끄러운 지원군 (4)
패닉.
지금의 상황을 표현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전황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다급하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제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을 수 없는 격노.
쿠르르…콰콰쾅!
주위에 있던 번개들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
"……."
주신들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까지 준비한 카드들은 하나같이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종류.
하지만, 심혈을 기울인 것들이 모두 박살나버리고 있었다.
"아레스…는 물론, 그 남자까지 당할 줄이야."
"엘리스를 확보하는 것도 실패했고. 크로노스를 막으려는 시도도 전부 통하질 않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당황스러움 속에 공포가 느껴진다.
자신들이 이룩한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었으니까.
평소라면 농담거리 밖에 안 될 망상들이 현실이 되어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골치 아픈 일들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재 거점 올림포스의 주위엔 '오딘의 눈'이 발동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북유럽 최고의 고위신 '오딘'.
놈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눈은 북유럽 측의 동선을 파악하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정보전에 난항을 겪게 된 것이다.
콰아앙!
콰콰콰쾅!
지금 이 순간에도 타이탄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었다.
헤라클레스는 토르와의 일대일에 발이 묶여 있었고.
아테나의 주력 부대는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정예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 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더.
헤르메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데메테르님과 아프로디테님에게 부탁해 우리엘에게 다시 한 번 압박을 넣어보겠습니다. 천세 쪽에도…."
자력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한 상황.
이제 남은 건 외부의 힘에 기대는 것뿐이다.
"에덴 쪽은 이미 등을 돌렸다. 놈들은 다시 오지 않아."
강진혁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저 꼿꼿하던 대천사 놈의 마음을 흔들어둔 게 틀림없다.
그나마 엘리스의 부재로 인해 숨통이 트인 천세 쪽에서 무언가를 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때.
우우우웅!
제우스 앞에 노란색 게이트가 열렸다.
나타난 건 천세의 신격 중 하나.
코끼리의 형상을 한 '가네샤'였다.
"끌끌끌. 이거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로구만."
가네샤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폭발음과 비명 소리에 호들갑을 떨었다.
완전히 남의 집 전쟁을 보는듯한 태도에 올림포스 주신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특히 제우스는 당장이라도 아스트라페를 꺼내들 기세였다.
“약이나 올리려고 온 건 아니겠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
최고신의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는 물음에 가네샤가 살짝 움찔였다.
“하하하, 누가 약이나 올리려고 이 먼 곳까지 왔겠습니까? 그저 우리가 뒤에서 구경만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고 온 겁니다.”
“그런 것 치곤 몸이 너무 멀쩡하군. 우리는 말 그대로 피를 흘리고 있는데 말이다.”
전력의 절반 가까운 손실.
그럼에도 타이탄들을 막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올림포스 자체가 사라져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당하면 그 다음은 너희 차례라는 걸 잊지 마라.”
제 아무리 상층부에서 탄탄하게 세력을 구축한 천세라 할지라도 홀로 그 맹공을 버텨낼 순 없을 터.
이미 한 배를 탄 천세 역시 고인물 코퍼레이션과 나머지 연합 세력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저희라고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니 이 골치 아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머리를 쓰자. 뭐, 이런 말입니다.”
“뭔가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이냐?”
“지금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건 놈들이 주도권을 꽉 쥐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선공권을 잃었기에 이 모든 사달이 난 것이다.
그걸 다시 되찾아오고 판을 이쪽이 원하는대로 짤 수만 있다면.
상황은 훨씬 더 편해질 수밖에.
“말은 쉽구나. 우리 역시 강진혁 그 건방진 인간 놈이 쥐고 있는 게 뭔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는 것 아니더냐.”
“우리엘이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지 알아낸다면. 그리고 우리가 상대의 흐름을 뺏을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그렇다면 조금 흥미가 생기십니까?”
“…….”
제우스의 얼굴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최대의 고민거리를 모조리 해결할 수 있는 걸 제시해준다?
“확실히….”
어느새 분노는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그런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군.”
입가엔 잔잔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
파츠츠!
후두둑….
부서지는 결계.
'N'이 목숨을 잃어버렸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상처 하나 없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천유성."
아테나가 조용히 그 이름을 곱씹었다.
34층의 전력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이고 강력한 능력을 보유한 것이 바로 N이었다.
유일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외부에서의 개입이었기에, 철저하게 보호했건만.
천유성의 실력이 정보보다 몇 단계는 더 위에 있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영웅급.
어쩌면 대영웅이나 하위 주신들과 같은 수준일지도 모른다.
"크아아아아! 이 몸. 아프다!"
가슴에 바람 구멍이 난 녹색 괴물과.
"쿨럭! 컥…."
한 손엔 의수를 한 채 자신의 몸보다 큰 대검을 휘두르는 검사도 쓰러져 있었다.
그 외에도 푸른 피부를 가진 이종족들 역시 무수히 많이 쓰러진 상태다.
모두 천유성 하나를 막지 못한 결과였다.
"크하하하! 과연, 같이 온 동료들도 제법이로군. 저 녀셕들은 꽤나 까다로운데 말이지."
"좋아. 이 기세로 단번에 밀어붙인다!"
"다 죽여 버려라!"
타이탄들의 기세 역시 한 층 더 끌어올랐다.
쿵! 쿠쿠쿠쿠!
콰아아앙!
"카야아아"
"크오오오!"
기계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룡들이 타이탄들과 정면에서 충돌했다.
대형급 몬스터들이 벌이는 사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광경을 자아냈다.
나무가 수수깡처럼 꺾이고.
만들어진 산사태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바꾸어버렸다.
아테나가 두 눈썹을 씰룩였다.
“성가시군요. 설마, 이 벽이 뚫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이 되어버린 상황.
그래도 다행인 건 34층의 주요 전력을 대부분 포섭해 왔다는 점이다.
34층의 준보스급인 '배관공 형제'.
마찬가지로 준보스급인 호도의 대족장.
광선검을 사용하는 우주기사 역시 만만치 않은 강자였다.
그 외에도 각종 차원에서 활약하며 각자의 신화를 쌓아올린 거주자들이 맹렬한 투기를 발산했다. `
“빌어먹을.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군.”
그런 적들을 보며, 천유성이 혀를 찼다.
일일이 진명을 언급할 순 없지만, 하나같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만 가득했다.
지금까지 상대해온 건 준비 운동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크오오오!”
기나긴 카이주의 포효를 시작으로 전쟁의 2막이 시작되었다.
쿵! 쿵! 쿵! 쿵!
대형급 몬스터들이 즉각 타이탄들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오오오! 재밌구나!”
“나보다 큰 놈은 오랜만에 보는군. 좋아. 상대해주지!”
“크로노스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타이탄들이 도끼와 검으로 무장한 채 카이주들의 급소를 노렸다.
푸욱!
서걱!
녹색 피가 튀고 살덩이가 뭉텅이로 잘려나간다.
그럼에도 워낙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대형종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분노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몇몇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툭…!
탓!
34층의 보스급 거주자들이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을 노렸다.
어차피 타이탄들이야 천재지변이라 봐야 하니, 그보다는 가능성 있는 핵심 전력을 깎아내려는 의도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과연, 소문 만큼 강할지도 궁금하군.”
“우리 역시 한 세계의 최강자.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칠 거다.”
붉은 색과 녹색의 옷.
친숙한 이미지와 달리 내뱉는 말은 싸늘하기 짝이없었다.
[배관공 형제가 ‘신수’ - 혓바닥 드래곤을 소환합니다!]
“캬옹!”
녹색 피부를 가진 둥글둥글한 외모의 용이 나타났다.
카멜레온처럼 대상을 흡수한 뒤, 그 특성에 맞는 걸로 진화하는 능력을 지닌 신수다.
‘저건 좀 성가신데….’
그나마 약한 것들을 흡수하면 괜찮다.
문제는 절대 먹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집어먹었을 때.
혹여 저 망할 배관공 형제가 ‘그걸’ 발견한다면 일이 굉장히 복잡하게 흘러가게 된다.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은 지금 타이밍에 처리해야 한다.
두 자루의 단검에 검붉은 기운이 맺혔다.
위기를 감지한 용이 혓바닥을 내뱉었다.
촤아아아!
닿기만 한다면 ‘포획’과 ‘마비’의 효과가 즉시 발동될 터.
진혁이 반 걸음 뒤로 움직였다.
혓바닥이 옆구리 바로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하지만. 직선으로 뻗어나가던 혓바닥이 원을 그리며 기묘하게 꿈틀였다.
비정상적인 탄력.
튕기듯 요동치는 붉은 살덩이에….
배관공 형제들이 불덩이와 거북이 등껍질을 쉴 틈 없이 날려댔다.
고작 셋이서 하는 것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지독한 융단폭격이다.
하지만.
[천마신공 - ‘기문둔갑(奇門遁甲)’이 발동됩니다!]
능력이 발동되자 진혁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퍼퍼퍼퍽!
콰아앙!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소용없다.
유령을 상대하는 것처럼, 배관공과 용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다.
“큭!”
“뭐, 이런 놈이….”
열이 받고 당황할수록 공격이 단순해지는 법.
점점 더 죽이기 위해 힘이들어가는 배관공들과 달리, 완전히 패턴을 파악한 진혁은 여유를 찾아갔다.
‘한 번….’
바닥을 튕기면서 오는 혓바닥을 흘려보내고.
‘두 번….’
등을 노린 녹색 등껍질을 쳐낸다.
마지막으로 무게를 잔뜩 실은 위에서의 공격까지 피해버렸다.
콰아아앙!
회심의 일격마저 통하지 않으면서 공수가 완전히 전환되었다.
진혁이 텅 빈 배관공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눈앞에 거대한 도끼가 번뜩였다.
카아앙!
진혁이 반사적으로 도끼의 궤도를 틀었다.
묵직한 충격이 뼛속을 시큰 울렸다.
“호오. 이걸 막았다고?”
칼로 찔러도 흠집도 안날 것 같은 근육질의 몸.
경험과 세월이 누적된 얼굴에선 헤아릴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진명은 ‘노예’라는 뜻을 지닌, 현존하는 모든 차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다 평가받는 오크의 대족장이다.
“온갖 영웅들이 다 기어나오니 아주 정신이 없네.”
이쯤되면 차라리 올림포스의 주신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수준이다.
위이잉!
엎친데 덮친 격으로 광선검을 꺼낸 검은 가면이 앞으로 나섰다.
“후욱… 후욱….”
특유의 숨소리가 거슬린다.
붉은색 광선이 공기를 갉아먹으며 한층 더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 외에도 수많은 챔피언들이 리그를 벌이는 곳에서 온 영웅들과 ‘비싼 시계’의 세계에서 온 놈들도 보였다.
이들을 모두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쉽지 않겠지.
그렇기에.
저벅.
“얼추 숫자는 맞는 것 같군.”
“각자 둘셋 씩 상대하면 될 것 같아요.”
“응. 저도 힘내볼게요!”
옆에 있는 동료들이 빛을 발하는 법이다.
천유성과 테레사 그리고 안드리아가 진혁의 옆에 섰다.
그리고 같은 시각.
“아….”
탑 밖에 있던 엘리스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붉은색 동공이 주위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