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화. 올림포스, 신들의 안식처 (4)
척.
서리혼령의 창에서 날카로운 냉기가 뻗어나왔다.
이미 온갖 수를 다 써버린 하데스는 고유성창이 부서지기 직전.
마지막은 육탄돌격을 하며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 뿐이다.
그나마도 진혁이 거리를 준다는 가정을 했을 때 가능한 이야기지. 원거리에서 공격을 퍼부었다간 명예롭게 죽을 기회조차 없었다.
우우웅!
하데스가 스스로 고유성창을 해제했다.
동시에 남은 마력이 모조리 손을 향해 모여들었다.
[하데스가 모든 마력을 소모합니다.]
[최후의 스킬 '명계의 검'을 소환합니다!]
생명력까지 갉아가며 만든 마지막 무기.
검게 물든 검신을 따라 수많은 원혼들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갈 땐 가더라도 가증스러운 네놈의 팔 다리 하나 정도는 가지고 가겠다."
하데스가 원혼들을 한껏 끌어모았다.
스스슥….
검은 연기들이 하데스의 모습을 완전히 감쌌다.
본신을 그림자로 변화해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는 스킬이었다.
이거라면 원거리 공격에도 어느 정도 면역이 될 터.
촤앗!
진혁의 눈앞에 나타난 하데스가 양 손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깊고 음침한 기운이 검신에 덧씌워졌다.
"이제 제발 좀 죽어라!"
하데스가 절규에 가까운 함성을 내질렀다.
대지를 쪼갤듯한 일검.
명계의 명운을 건 최후의 일격을….
진혁은 서리혼령의 창을 비스듬히 세우는 것으로 상쇄시켰다.
검이 정확히 서리혼령의 창날의 끝 부분에 걸렸다.
콰아아앙!
마력과 마력이 한 점에 모이며 수많은 파장들이 퍼져나갔다.
얼핏 보면 완벽하게 이루어진 힘의 균형.
하지만, 둘 사이에는 치명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양손을 모두 사용한 하데스와 달리 진혁의 오른 손은 너무도 자유롭다는 것이다.
"주신답게. 그리고 마지막 일격답게 강하긴 했어."
보통 이런 장면에선 끙끙대며 땀방울도 좀 흘리고.
서로를 존중해주는 눈빛도 보내주고.
'훗. 이래야 내가 인정한 적답지' 하는 식의 대사도 날려주고 싶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건 현실이고.
정정당당한 승부보다는 틈을 보이면 가차없이 찔러 넣는 게 살아남는 시련의 탑이란 곳인 걸.
진혁이 오른 손에 쥔 단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급소를 향해서.
"크읍!"
하데스가 즉각 피하려 했으나, 단검이 복부에 파고드는 게 반 박자 빨랐다.
푸욱!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파육음이 고막을 찔렀다.
"크아아악!"
'독'은 물론 '신성력'과 '혈마기'까지 배합해 발라두었다.
모든 걸 공격에 쏟아부은 하데스로서는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의 충격이 느껴질 것이다.
"끄으으… 으어어어…."
쿠웅!
몸을 기역자로 꺾은 하데스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입에 게거품을 문 채 손을 휘적인다.
최후까지 살고 싶다는 욕망이 뚝뚝 배어나왔다.
진혁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너무 걱정마. 나머지도 곧 뒤따라갈 거야."
저승길 동료들이 많을 테니 외로울 일은 없을 거다.
서리혼령의 창이 정확히 하데스의 정수리에 닿았다.
이제 약간의 마력만 주입한다면 명계의 신이 통째로 얼어붙을 것이다.
그런데 진혁이 하데스의 숨통을 끊으려던 바로 그때.
우우웅!
심상치 않은 마력이 감지되었다.
"……!?"
건조했던 바람에 따가운 정전기가 섞여 있다.
뒤이어 눈부신 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건….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한 가지 뿐이다.
정확히 하데스와 진혁이 있는 곳을 향해 강력한 공격 스킬이 퍼부어지려 했다.
"제우스으으! 난 당신과 올림포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소…! 헌데 그 결과가 이거란 말이오!"
하데스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 따윈 없었다.
콰콰콰콰콰콰콰!
아스트라페가 진혁과 하데스가 있는 자리에 직격했다.
…콰아아앙!!!
***
치이이익!
최강의 투창에 당한 자리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감히, 생명이 살아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마경.
제우스의 전력은 신화 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나머지 모든 신격들을 합친 것보다 위였다.
"아, 아버지…."
옆에 있던 헤르메스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제우스가 하데스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제우스의 표정엔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올림포스에 군림하는 절대자로서 해야 할 것을 했을 뿐.
그 당연한 의무감이 그 외의 모든 감정을 몰아냈다.
"타이탄들 쪽은 어떻게 됐지?"
"예? 그, 그게…."
헤르메스가 더듬거리며 모은 정보를 뒤적였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셨던 대로 헤라클레스를 그쪽에 보냈습니다. 헤라 여신님이 지원을 해주시는 데다 헤파이토스께서 전용 무구를 새로 만들어주신 덕에 압도적인 전과를 올리는 중입니다."
설명과 함께 헤르메스가 허공에 거울을 띄웠다.
그곳엔 닥치는대로 육중해 보이는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는 헤라클레스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타이탄들이 보였다.
특히, 크로노스는 중상을 입은 채 운신조차 하기 힘든 상태였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다. 헤라클레스 외 나머지 신들과 병력들을 모두 퇴각시키도록 하거라."
하데스와 나머지 신격들을 잃은 건 아까웠지만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만에 하나 진혁이 살아있더라도 이쪽으로선 시간만 벌면 될 일.
헤라클레스가 타이탄들만 모두 정리할 때까지 버틴다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 아무리 진혁과 고인물 코퍼레이션이라 하더라도 헤라클레스와 자신의 번개를 동시에 상대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걸로 이 몸의 힘이 어떤지 똑똑히 깨달았겠지.'
헤르메스가 재빨리 자리를 비우자, 제우스가 권좌에 몸을 뉘였다,
모든 게 적막에 싸인 바로 그때.
"흐음. 방금 전 기습으로 한 방 제대로 먹였을 텐데, 끝을 보진 않을 생각인 겁니까? 당신이 저 곳에 현현한다면 완벽하게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텐데요?"
제우스의 옆으로 장신의 인물이 다가왔다.
50층의 거주자이며 크툴루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둥.
니알라토텝이었다.
"……."
제우스가 대꾸하지 않자 니알라토텝이 키득거렸다.
"아니면 혹시 겁이 나시는 건 아니겠지요? 만에 하나 놈이 숨어있다가 역공을 가한다거나 하는 경우 때문에…."
니알라토텝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 했다.
콰아앙!
옥좌의 팔걸이가 그대로 박살났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니알라토텝을 향했다.
여차하면 다 쓸어버릴 기세다.
"워워, 진정하십시오. 그냥 한 말이었습니다."
"그냥 한 말이라고? 그딴 말을 지껄이고도 말인가?"
"하하, 정말입니다. 진짜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어요. 헌데, 그리 과민반응을 보이시고 절 협박하시면…."
쿠쿠쿠쿠쿠!
살기가 더욱 강렬한 살기에 의해 집어삼켜졌다.
"제가 너무 놀라 깜빡 제우스님을 죽여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니알라토텝의 주위로 보랏빛 촉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오싹!
목덜미에 독사가 휘감겨 있는 듯한 감각.
제 아무리 올림포스를 지배하는 절대자라 해도 우습게 볼 수 없다.
“…….”
제우스의 기세가 한꺼풀 누그러졌다.
여전히 분노를 머금고 있었지만, 정면에서 맞설 의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올림포스나 저희나 서로 한배를 탄 몸. 괜히 제우스 님을 불편하게 해드릴 의도는 없었습니다.”
니알라토텝도 그 이상 제우스를 압박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목적이나 말해라.”
“후후. 별 건 아니고 이 지도 한 장을 품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지도…라고? 무슨 지도 말이냐?”
“그것까지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니알라토텝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태연스러운 모습이 제우스의 의심을 자극했다.
단서와 단서가 취합되며 머지 않아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너 정도 되는 자가 직접 움직여서 굳이 나에게 이걸 맡긴다는 건….”
설마.
갑자기 제우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니알라토텝이 의도하는 바가 뭔지를 깨달은 탓이다.
“그런 거였나. 나에게 강진혁이란 인간을 꾀어낼 미끼를 심을 셈이었어.”
“호오.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과연, 한 신화를 이끄시는 분 답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쿠르릉!
번개가 격하게 요동첬다.
자신이 진혁에게 쓰러진다면 품고 있던 지도가 드랍될 터.
만에 하나 올림포스가 무너지더라도 니알라토텝에겐 또 다른 계략을 심어둘 수 있는 셈이다.
감히, 올림포스의 최고주신을 이따위로 취급한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50층을 지배하는 괴물.
최강의 창이라 일컫는 아스트라페라 할지라도 통하지 않는다.
“물론 기분은 나쁘실 수 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보험일 뿐. 제우스께서 저 인간만 처리해주면 될 일입니다."
제우스가 지든 이기든, 어느 쪽이라 해도 상관없다.
진혁은 결코 네크로노미콘에게 도달하지 못할 테니까.
***
"분명 이쯤일 텐데…."
"여기… 여기에요!"
"언제나 손이 많이 가는 놈이군."
몽롱한 시야.
나른거리는 권태감은 이내 다급한 목소리들에 의해 지워졌다.
익숙한 얼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진혁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어디보자….
그 무자비한 주신 놈이 번개를 집어던지는 장면이었다.
‘진짜 무식한 자식 같으니라고.’
방어막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반사적으로 ‘1초 무적’을 사용했다.
그러나 대상이 완전히 불타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 제우스의 번개는 1초 정도의 무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죽진 않았지만, 워낙에 정통으로 얻어맞은지라 피해가 상당했다.
“헤헤. 살아계실 거라 믿고 있었어요.”
안드리아가 기분 좋게 웃으며 반겨줬다.
“정말 다행이에요 무사해서…. 저희는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고….”
테레사는 언제나 그러듯, 따스한 눈으로 바라봤고.
“다행은 무슨. 저 지독한 놈이 그깟 거에 죽을 리가 없지. 정말 생명력 하나 만큼은 바퀴벌레 만큼이나 질기다니까.”
천유성이야 디오니소스한테 제발 좀 혼쭐이 나줬으면 했는데, 역시나 그런 자그마한 소망은 이루워지지 않는 법이다.
진혁이 조심스럽게 구덩이에서 기어나왔다.
"내가 몇 시간이나 기절해 있던 거야?"
"반나절은 족히 넘었다."
"뭐!?"
이번엔 진혁이 놀랄 차례였다.
제법 오래 기절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12시간이 넘었을 줄이야.
허나,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가 전투불능이 됐다면 우리 쪽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주신급들이 여럿 쓰러져서 부담스러웠던 건가?
아니면 설마….
진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 타이탄들이 있는 곳에 헤라클레스를 데리고 왔다."
천유성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불길했던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을까.
상대의 전력을 상당부분 갉아먹는 데 성공했지만, 대신 이쪽도 치명상을 입었다.
타이탄들은 올림포스를 공략하는데 있어 핵심 카드였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보다 오늘 밤은 이대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기왕 이렇게 된 거 푹 쉬는 게 어떨까요? 뜨거운 물에 샤워도 하고요."
"맞아요. 진혁 님. 여기 근처에 맛있어 보이는 것들도 많이 있어요."
테레사와 안드리아가 기대가 가득 담긴 눈을 반짝였다.
계속된 전투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몸과 마음.
회복할 시간을 갖는 게 그 무엇보다 절실했다.
흐음.
진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저기 박살나 있긴 했으나, 여전히 고풍스럽고 웅장한 신들의 저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테레사와 안드리아의 말처럼 맛있어 보이는 것들도 많았고.
바로 그때.
"어…?"
진혁의 시야에 뜻 밖의 것들이 들어왔다.
탐스러운 색을 띠고 있는.
'열매'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