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동이 틀 무렵 (1)
탐스럽게 생긴 각양각색의 열매들.
보석을 닮은 빛깔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과육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맞다. 이게 있었지.'
이건 여러 가지로 재밌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시치미를 뚝 뗀 진혁이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진 않겠네요."
때마침 쉬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캠프파이어.
툭!
천유성이 근처에서 잡은 사슴과 토끼들을 바닥에 내려놨다.
"이거면 되는 거냐?"
"응. 그 정도면 고기는 충분할 것 같아."
다른 곳도 아니고 올림포스 내의 풀과 이슬을 먹고 자란 짐승들이다.
탑에 존재하는 모든 고기 중에서도 최상의 육질을 자랑할 수밖에.
화르륵!
'태초의 불꽃'이 나무에 닿자 순식간에 뜨거운 모닥불이 만들어졌다.
진혁이 아껴두었던 소금과 향신료들을 꺼내 고기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주위를 가득 채워나갔다.
꿀꺽!
테레사와 안드리아는 물론, 천유성까지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자 어서 먹어보세요."
진혁이 고기에 따온 과일을 곁들여 나눠줬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 게요!"
"흠. 못 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군."
다들 의심없이 고기와 열매를 가져갔다.
1분 1초라도 빨리 먹고 싶다는 열망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딱 한 명.
진혁만은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삼색 열매: 세 명에게 서로 다른 열매를 복용시킬 경우 열매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단, 요리를 한 자는 절대 열매를 먹어선 안 됩니다.]
붉은색 열매: 정열을 상징하며 처음 열매를 준 사람에게 강한 호감을 느낌입니다.
푸른색 열매: 우울감을 상징하며 복용 시 자신감이 대폭 하락합니다.
검은색 열매: 흑화를 상징하며 내재되어 있는 강한 욕망을 한꺼번에 폭발하게 됩니다.
제한시간은 3시간.
열매의 발동 시점은 복용시키는 자의 마음에 따라 다르다.
'그냥 먹으면 단순히 맛만 좋은 열매에 지나지 않지.'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멍청한 올림포스 놈들.
하여간 워낙에 뱃대지가 처불렀으니 이런 걸 세세하게 알아볼 생각도 않는 거다.
이쪽으로서는 덕분에 달달한 기회를 손에 넣게 되었지만.
"고기가 좀 질긴 것 같은데… 향신료도 호불호가 갈리겠군. 그나마 잡내를 잡으려면 와인이라도 몇 병 내놓지. 쯧 항상 생각하지만 센스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놈이라니까."
천유성의 불평불만 소리가 계속에서 들렸다.
열심히 요리한 사람 생각도 안 하고.
먹기만 하는 주제에 잔소리가 많다.
하지만 괜찮다.
녀석이 저리 기어오르는 만큼.
잠시 뒤에 짓밟는 맛이 클 테니까.
진혁이 마력을 집중해 체내에 흡수된 열매를 활성화시켰다.
['푸른 열매'가 발동됩니다!]
[우울감이 최대치까지 증가합니다.]
우우웅!
복부를 따라 퍼지는 이질적인 기운.
순간, 천유성의 표정이 변했다.
우울하고 역한 감정이 목구멍까지 솟구치더니, 이내 전신에 참을 수 없는 오한이 들었다.
"나… 나는…."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른다.
자괴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얼굴에선 절망과 후회가 가득했다.
"이리 훌륭한 요리를 먹고도 볼 멘 소리나 하다니… 미안하다."
"유, 유성 씨?"
"천유성 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테레사와 안드리아가 토끼눈을 떴다.
절대 천유성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사과.
그것도 대상이 다름 아닌 진혁 아니던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바엔 차라리 죽는 걸 택하는 게 천유성다운 태도였다.
"크흠!"
진혁이 목을 가다듬었다.
효과 한 번 즉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 맞아. 넌 항상 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하질 않더라.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얼굴값도 못 하고. 어? 세상에 너 혼자 살아?"
"……미안하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구더기 아니, 곱등이라고 하는 거야. 자, 따라해봐. 나는 곱등이다."
"나는 곱…등이다."
"그렇지. 좀 더 크게!"
"나는…! 곱등이다!!!"
캬아….
천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기분이다.
처음 열매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 순간만을 꿈꿨는데, 이걸로 모든 고생이 보상받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평소에 상상으로만 하던 걸 마음껏 해보자.
그렇게 결심한 진혁이 온갖 종류의 일을 실천에 옮겼다.
채찍까지 꺼내 찰싹찰싹 때리거나.
천유성의 무릎을 꿇린 뒤 발을 머리에 갖다 대거나.
옆에서 음식과 술시중을 들게 하거나 등등.
"아, 그리고 넌 항상 지면서 왜 자꾸 덤비는 거야. 지겹지도 않아? 응? 지겹지도 않냐고. 검은 옆집 검도학원 다니는 꼬맹이보다 못 다루면서 자존심은 또 더럽게 세요."
"아닙니다. 다시는… 덤비지 않겠습니다. 저에겐 검 같은 것보다 말씀하신 것처럼 지팡이가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미 온갖 핍박에 시달린 천유성은 더더욱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이제는 자신이 검을 들어야하는 이유조차 망각해버렸다.
……지금이다.
진혁이 천유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천유성이 흠칫 몸을 떨었다.
"에헤이. 너무 그렇게 우울해하진 말고. 다 나니까 너 같은 애를 받아주는 거 아니야? 앞으로도 너는 내가 확실하게 챙겨줄 테니, 이 형만 믿고 따라와."
"날…버리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러엄. 내가 왜 널 버려. 오히려 검 쓰는 법도 알려주고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는지도 알려줄 거야. 단, 앞으로는 내가 하는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해. 넌 툭하면 길이 어긋나니까. 이 편이 가장 확실한 거야. 알았지?"
"예…."
처음으로 따스한 토닥임을 받은 천유성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좋아.
가스라이팅이 이래서 효과적인가 보다.
대상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었으니.
"그럼, 우리 댕댕이 앞으로 잘 해보자는 차원에서 힘차게 짖어보자."
복명복창은 '멍'.
혼나면 '깨갱'이다.
진혁이 뒷짐을 진 채 대답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뒤에 서 있던 천유성이 조용했다.
"뭐하고 있어? 주인이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고?"
"……."
여전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대신, 무언가 이상한 위화감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유, 유성아?"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엔….
"멍…이라고? 그리고 주인?"
복수심과 모멸감에 가득 찬 검성이 서 있었다.
진혁이 벼락이라도 맞은 양 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버, 벌써 3시간이 지났다고?"
말도 안 돼.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마치, 게임을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그만 좀 하라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시간이 총알처럼 지나가 있었다.
상대성원리가 뭔지 온몸으로 느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다.
진혁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오싹!
피부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마력.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살기다.
하데스나 다른 주신들이 보였던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아스트라페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때도 이 정도로 공포에 질리진 않았다.
"테레사 씨! 안드리아!"
진혁이 다급히 둘을 찾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인과응보예요."
"하하 진혁 님… 솔직히 이번엔 너무하긴 하셨어요."
너무하기는!
내가 그동안 당한 게 얼만데!
이건 그저 그동안에 있던 것들 중 만분의 일 정도만 돌려준 것 뿐이라고!
억울하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공감이 되질 않는 모양이다.
스릉!
천유성이 검을 뽑았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농담이 아니고 은유적인 표현도 아니라. 말 그대로 죽게 될 거다.
"유성아… 다 장난인 거 알지? 그냥 밤을 보내면 심심할 것 같아서 가볍게 진실게임 같은 걸 해본 거야. 원래 이럴 때 남자답게 속 터놓고 말하면 더 친해질 수 있잖아. 절대 널 우습게 보거나 괴롭힐 생각은 없었어. 내 맘 알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이, 이해해주는 거야?"
"속을 터 놓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
"응."
"그 말 그대로… 네놈의 몸 속이 어떤지 구경하면서 대화하도록 하지."
"응?"
놀랄 새도 없이 푸른 빛을 머금은 참격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부우웅!
0.1초라도 늦었더라면.
정말로 머리가 꿀단지처럼 개봉되었을 거다.
"지, 진짜 죽을 뻔 했어. 진짜로!"
"알고 있다."
천유성이 반쯤 맛이 간 눈동자를 한 채 다가왔다.
카가각….
검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기다란 선을 만들었다.
호흡이 가빠진다.
도망칠 곳은 매우 제한적이다.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상상도 할 수 없다.
죽음. 절망. 좌절. 공포.
모든 경우의 수가 한 가지 결말만을 가리켰다.
"아아아악!"
진혁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올림포스에 가득 울려퍼졌다.
***
동이 틀 무렵.
해가 비치고 나서야 각지에서 펼쳐진 전투의 참상이 드러났다.
하룻 밤 사이 서로가 잃은 병력의 수만 해도 4만이 가볍게 넘었고. 부상자는 그 몇 배에 이르렀다.
워낙 호전적인 두 세력이 마주쳤기에 벌어진 결과였다.
본대 간의 싸움은 거의 호각.
그러나 주신급들과 대영웅들이 활약한 지점마다 그 피해의 정도는 확연하게 달랐다.
먼저 가장 큰 전환점은 고인물 코퍼레이션을 이끄는 진혁이 올림포스의 주신들을 다수 처리했다는 점이다.
일반 병사들도 아니고 주신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대전력.
그걸 잃었다는 건 올림포스 측으로서 막다른 벽에 몰린 셈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림포스 역시 마냥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에 의해 크로노스와 타이탄들이 쓸려나간 건 무시할 수 없는 변수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리고.
외부에서 벌어진 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아직 승부를 마무리 짓지 못 했다.
"후우…."
엘리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모처럼 거리낌없이 날뛴 덕에 개운하기까지 한 기분이다.
꿀렁꿀렁!
쿠쿠쿠쿠쿠!
여전히 혈액들이 혈기를 주체하지 못한 채 용솟음쳤다.
피로 만든 구체들과 꼬챙이들이 마계의 흐린 태양을 가렸고. 수많은 천사들이 내뿜는 신성력까지도 집어삼켰다.
그야 말로 압도적인 격.
때문에 엘리스를 상대하는 적들은 뼛속까지 공포를 새길 수밖에 없었다.
"이 괴물 같은 놈…."
"대체 혼자서 몇 명을 박살낸 거냐?"
"주력인 2연대와 7중장천기병단이 전멸했어. 에덴 제일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는 돌격 부대가…."
"지천사들도 절반 이상이 전투불능이야. 차라리 마계랑 전면전을 치르는 게 더 손해가 적을 뻔 했어."
놀라움을 넘어 경외의 감정까지 든다.
자신들만으로도 마왕급의 절대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결과는 엘리스 한 명을 상대로 반나절도 버티지 못 했다.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예전에 사라졌고.
이제는 자신이 선두에 서지 않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그때.
푸욱!
"크으…어?"
가장 뒤에 있던 천사가 가슴에 난 상처를 바라봤다.
원래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엔 무식해 보이는 철퇴가 튀어나와 있었다.
"도망치지 마라. 저 흡혈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누구에게나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날개가 모조리 잘려나간 우리엘이 시퍼런 안광을 쏟아냈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잃을 것도. 물러설 곳도 없다.
수많은 병력만 잃은 뒤 마계 정복마저 실패한다면 자신의 몰락은 정해진 수순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엘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엘리스의 핏방울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는 게.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디아블로와 나머지 마족들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
철퇴로 저 가증스러운 진조의 머리통을 부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