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화. 탑 건 (1)
티모 대령.
과거 탑을 오르면서 사용했던 닉네임이며 모든 권총을 다루는 이들 사이에서 최강의 포지션에 있던 랭커의 이름이기도 했다.
11년의 추억이 배어 있는 소중한 아이디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완벽했고 마음에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과거의 추억팔이로 가끔가다가 회상했을 때에 한해서.
‘빌어먹을….‘
진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설마, 이 망할 시스템이 그때의 코스튬과 행동 플레이까지 재현하라고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수치스러운 걸 모두의 앞에서 보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멸자의 능력은 만에 하나 있을 보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종류였으니까.
실제로 이미 몸은 머리보다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우우웅!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코인거래소가 활성화됩니다.]
익숙한 옷과 모자 그리고 싸구려 시가와 라이터가 기존의 복장을 대신했다.
“후우….”
입에 문 시가에서 깊은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흡연자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솜사탕 시가였다.
“뭐 하는 짓이냐?”
사멸자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하긴, 모처럼 같은 직업을 만났는데, 이리 장난기가 뚝뚝 묻어나와서야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겠지.
이해는 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시스템이 변태 같은 걸.
불평을 하려거든 저 녀석에게 해라. 아니면 저걸 만든 놈에게 하거나.
[시스템이 모처럼의 티모 대령의 등장에 환호합니다.]
[‘그 대사’를 해달라며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보채지 마라.
안 그래도 저 녀석 잔뜩 열받아 있는데, 더 자극했다간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별거 없는 쓰레기한테 해선 안 되는 기대를 했군.”
말을 마친 사멸자가 천천히 권총을 들어올렸다.
파츠츠!
탄환에 새겨진 룬어가 주인의 부름에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총구 속에서 극한까지 압축된 마력.
타앙!
타앙!
허나 총성은 한 발이 아니었다.
사멸자의 총이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진혁이 허리춤에 찬 리볼버를 번개처럼 뽑은 것이다.
보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의 속사다.
게다가.
카아앙!
단순히 속도만 빠른 게 아니었다.
일점에서 만난 탄환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찌그러진 두 개의 탄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호오….”
사멸자의 눈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처음의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반응 대신 흥미롭다는 이채가 번뜩였다.
촤르르륵….
진혁이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총을 다시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둠! 둠! 둠! 둠! 둠!
낮게 깔리는 웅장한 브금과 피어오르는 한 줄기 시가 연기.
45도가량 기울어진 모자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완벽한 상황과 기가 막힌 연출이다.
견뎌라.
거의 다 왔다.
쪽팔림은 잠깐이고 스킬은 영원한 법.
진혁이 낮고 굵은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석양이… 진다.”
둘 사이에 참을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
[페시스가 Lv42 ‘황금 나침반’을 사용합니다!]
우우웅!
오른손에 나타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나침반.
절체절명의 순간에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일종의 성유물이다.
‘왼쪽… 다시 여기서 오른쪽.’
페시스는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올드 가드들의 집요한 추격을 떨쳐내려 애썼다.
“느린 몸뚱이로 잘도 움직이는군.”
“그래도 이 정도 거리에서 포착한 건 처음이야.”
“어지간해서 꼬리를 드러내지 않더니.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반드시 잡아야 한다. 놈은 강진혁 못지않은 주요 포획 대상이니까.”
‘우둔한 골짜기’에 들어간 길잡이.
태고의 깊은 비밀을 간직한 골짜기는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금지였다.
우연히라도 들어갈 수 없거니와 만에 하나 침입자가 있다면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내부로 깊이 들어갔는지.
그 안에서 무얼 보고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지만,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페시스는 번번이 추격대를 뿌리치고 포위망을 벗어났다.
심지어 크림슨마저 페시스를 포획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쓰디쓴 기억밖에 없는 패배.
허나.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갖은 고문을 다 해주지.’
‘편하게 실토하게 하진 않겠다.’
올드 가드들이 어금니를 갈며 추격의 고삐를 더욱 거세게 죄었다.
같은 시각.
콰콰콰콰…콰아앙!
투콰아앙!
엘리스 역시 사력을 다해 적들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자로 잰 듯 몰아붙이는 올드 가드들의 합격진도 까다로웠지만, 정말로 조심해야 할 건 브레스를 준비하고 있는 알테라와 아덴이었다.
쿠쿠쿠쿠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크기를 더해나가고 있는 황금빛 운무.
더 이상 내버려뒀다간 감당이 안 된다.
“큭!”
엘리스가 수많은 꼬챙이들을 소환했다.
최소한 브레스가 완성되는 것만큼은 막으려는 의도에서다.
문제는.
툭.
탓!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올드 가드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식간에 엘리스의 방어를 뚫고 안까지 파고든 올드 가드들이 은은한 남색 빛이 도는 병장기를 휘둘렀다.
엘리스가 종이 한 장 차이로 몸을 피했다.
동시에 혈계 마법을 발동시켜 반경 10m가량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피 보라가 보이는 모든 걸 잘게 갈아버렸다.
감히 생명체가 살아 있을 수 있을 거라곤 가늠이 가지 않는 위력이다.
하지만.
“과연, 전성기에 육박하는 아타락시아의 힘은 여전하군요.”
올드가드들은 그 지옥 속에서도 멀쩡히 걸어 나왔다.
“제법이구나. 짐의 공격에도 살아남다니.”
“하하하. 그거야 위대하신 가주께서 온전히 저희에게 집중하지 못하시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전력을 다하신다면 모를까. 그 정도에 당할 정도로 가볍진 않습니다.”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오는 긴 흑발의 남자.
가볍고 친숙해 보이지만, 다른 올드 가드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웃음 뒤에 있는 살기가 시리도록 차갑다.
“네놈이 대장인가 보구나.”
“인사드리도록 하죠. 니알라토텝 님의 오른팔이자 올드 가드들을 이끄는 ‘크림슨 렌 페이지’라고 합니다.”
흑색의 창을 다루는 기사.
얇은 갑주에선 지금까지 수많은 괴물들을 사냥해 온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 렌 페이지를 본 엘리스는 절대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직감했다.
“크림슨이라….”
“들어본 적 없으실 겁니다. 보통 제 이름을 들은 대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요. 뭐, 물론 몇몇 예외도 있긴 합니다만….”
가장 강하고 까다로운 강자만을 사냥해온 사냥개.
렌 페이지의 창끝이 엘리스의 심장을 겨눴다.
“그래도 한때 절대자에 대한 예우로 선택지 정도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있는 드래곤의 브레스에 죽을지 아니면 제 창에 꿰뚫릴지를 말이죠.”
“이 정도 난관은 수도 없이 겪어왔고 또 헤쳐왔느니라. 고작 50층의 심부름꾼 따위에게 당할 정도로 아타락시아라는 이름이 가볍지 않다는 걸 알려주마.”
엘리스가 레이피어를 꺼냈다.
한 쌍의 붉은 날개가 한계까지 펴졌다.
콰앙!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달린다.
크림슨이 양손으로 창을 꼬나잡았다.
비스듬히 꼬아진 창.
회전이 가미된 창끝이 엘리스의 궤적을 따라 발사됐다.
마치, 한 줄기 섬광처럼.
눈 부신 빛이 점멸했다.
빠르다의 차원이 아니다.
공간이동을 연상케 하는 창술은 엘리스의 방어 스킬을 모조리 박살 내며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근접전의 달인이 아니라면 받아낼 수 없는 필살의 일격.
허나.
진조의 동체 시력과 그동안 훈련해온 레이피어의 기술은 이미 엘리스를 달인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타고난 재능과 혈통이 뼈를 깎는 노력과 세월을 따라잡은 것이다.
카가가각!
엘리스가 레이피어로 창의 측면을 훑으며 궤도를 빗겨냈다.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한 엘리스가 무기의 특성을 살린 찌르기를 퍼부었다.
창의 간격 상 바로 회수가 불가능할 터.
그런데.
카앙!
크림슨은 오른손의 얇은 건틀릿으로 레피이어를 가볍게 받아냈다.
아니, 받아냈다고 생각했다.
검이 건틀릿의 표면에 닿는 순간, 칼날의 각도가 기묘하게 휘었다.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튕겨 나간 칼날이 크림슨의 안면을 아슬아슬하게 훑고 지나갔다.
후두둑.
잘린 흑발 몇 가닥이 바닥에 떨어졌다.
몇 방울의 피와 함께.
마지막 찰나에 미친 반응을 보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검술에는 조예가 없다고 들었는데, 잘못된 소문이었나 봅니다.”
“짐 같은 천재는 뭐든지 금세 배우느니라.”
“하하. 그런 천재들이 있긴 하죠. 허나 잊고 계신 건 아니겠죠? 저 하나만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툭… 탓!
두 명의 올드 가드가 엘리스의 뒤를 잡았다.
곡선 형태의 단검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자동반사 격으로 꼬챙이들이 쏟아졌지만, 그 정도 방어책으로 올드 가드들을 막을 순 없었다.
더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큭!”
신경이 살짝 분산되자 이번엔 크림슨의 창이 재차 번뜩였다.
파아앙!
엘리스의 머리 옆으로 폭풍이 지나갔다.
고착화된 열기가 창이 지나간 후에도 공기 중에 눌어붙어 있었다.
정통으로 맞았다간 재생할 틈도 없을 거다.
게다가 위협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알테라와 아덴이 ‘브레스’를 발동합니다!]
두 개의 입을 통해 하나로 모인 빛.
쿠쿠쿠쿠쿠!
인간 형태에서 발동하는 브레스는 본신보다는 확연히 그 위력이 떨어진다.
기껏해야 1/10이거나 그 이하로 말이다.
대신, 브레스를 모으는 속도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텀이 짧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걸 정통으로 맞았다간 도저히 버틸 수 없다.
엘리스가 마력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한 쌍의 날개를 중심으로 피로 만든 육망성이 연이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콰콰콰콰콰콰콰!
한 줄기 브레스가 대기를 격동시켰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금빛으로 물든다.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한 곳에서 충돌했다.
***
“흐음.”
한 편에서는 이 모든 걸 관망하는 이가 있었다.
태고의 존재 ‘니알라토텝’이었다.
니알라토텝이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꽤나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판이다.
친위대 격이라 할 수 있는 올드 가드들은 물론, 드래곤 로드를 미끼로 골드 드래곤까지 동원했으니까.
그중에서도 비장의 카드라 할 수 있는 사멸자는 격이 다른 힘을 보유한 괴물이었다.
‘놈을 처리하느라 올드 가드 중 절반이 죽었었지.’
지나치게 비싼 값을 치렀다.
속이 쓰릴 만큼 말이다.
이제는 투자한 것을 회수할 시간이다.
‘이번에야말로 저 골칫덩어리 인간과 골짜기에 침범한 겁대가리 없는 길잡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겠어. 놈들이 하나둘씩 모아가는 단서는 이제 위협적인 수준이니까.’
한낱 인간이나 주신들 따위야 아무리 모여봤자 자신들의 적수가 될 순 없다.
기껏해야 조금 성가시고 짜증이 나는 날파리들일 뿐.
그러나 딱 한 가지.
네크로노미콘.
유일하게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동시에 태고의 권능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가증스러운 게 바로 저 책이다.
그것만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면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니알라토텝 님.”
올드 가드 하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