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만렙 뉴비-601화 (602/653)

601화. 플레이어 언노운(Unknown) (2)

[인류는 멸망합니다.]

무미건조하면서 짧은 경고의 말과 함께. 처음으로 탑 전체를 아우르는 아포칼립스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 방송을 기점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혼란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금까지 있었던 몇 번의 아웃 브레이크. 그 모두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간신히 막을 수 있던 재앙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실패할 경우 탑에서만 존재하는 온갖 끔찍하고 강력한 존재들이 우르르 쏟아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인류가 그대로 멸망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각국에 비상이 걸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현재.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건물의 1급 기밀시설에선 10시간이 넘게 회의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여전히 도돌이표만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회의가.

“후우…. 골치 아프군.”

한국 각성자 협회를 이끄는 회장. 한상진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옆에는 단군과 발해 길드를 비롯해 새롭게 강자가 된 여러 길드의 대표들도 함께 있었다.

“외국 쪽에서 계속 압박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대는데 젠장. 우리라고 뾰족한 해법이 있는 줄 아나.”

“그래도 결단을 내리긴 내려야 합니다.”

“그렇겠죠. 남은 시간이 6일하고도 반밖에 없으니까요.”

“역시 남은 건….”

대부분 말을 아끼고 있긴 했으나 당장 인류의 멸망을 막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다.

모두가 힘을 합쳐 가짜 강진혁을 죽이는 것.

물론, 여기서 가짜란 시그니엘에 은거하고 있는 쪽이었다.

콰앙!

유천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난데없이 나타난 자의 말만 믿고 시그니엘을 공격하자니! 가면 쓴 놈의 말이 진짜라는 보장도 없지 않소? 이 늙은이가 보기엔 오히려 분란을 일으키는 그자가 가짜입니다.”

“어르신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 입장에서 현재 협회에 있는 언노운… 아니, 강진혁 플레이어는 매우 협조적인 상태입니다. 스스로 무기까지 반납한 상태이고요.”

“혹시 몰라 압수한 무기를 검사했는데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어 있는 기존 무기들과 동일한 구조와 생김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 검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음과 불 등 똑같은 스킬과 고유능력을 사용했죠.”

“반면… 시그니엘 쪽은 저희의 소환 요구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혹여, 손녀 분이 인질로 잡혀 있어 반대하시는 거라면….”

“뭣이? 지금 연화 때문에 내 판단이 흐트러졌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겐가?”

쿠쿠쿠쿠쿠!

유천영의 몸에서 노기가 터져나왔다.

줄기줄기 뿜어대는 살기 탓에 내부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께서 우릴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신 건지 잊으셨습니까?”

“저 역시 동감입니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분의 뒤통수를 칠 순 없습니다.”

맞서는 쪽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마력을 끌어올리며 팽팽하게 대치했다.

이러다간 회의는커녕 내부에서 내전이 벌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만! 그만들 하십시오. 저희끼리 싸워봤자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상황이 격화되려 하자 한상진이 모두를 만류했다.

“…….”

“쳇!”

“카악 퉤! 제기럴. 우리도 그 동안 공헌한 강진혁 플레이어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그 빌어먹을 놈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모두가 X되게 생겼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모래시계 속 모래알은 떨어지고 있다.

첫 번째 봉인이 해제된 시점에서 작은 균열들이 일어났고. 전 세계에 걸쳐 추정 D~F급에 해당하는 게이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고블린이나 오크에 해당하는. 아직은 비교적 막기 쉬운 몬스터들이긴 하지만 내일이 된다면 등급이 올라갈 것이다.

다음날에는 한 단계 더 오를 테고 그 다음 날에는 B급이 넘을지도 모른다.

거기만 가도 수많은 대도시들이 불타고 없어질 거다. A급이 넘는 시점에서는 인류의 몇 퍼센트나 생존해있을지 계산조차 하기 싫어질 테지.

그 꼴이 나기 싫다면 둘 중에 하나는 제거해야만 한다.

최악의 경우 둘 모두 제거해야만 했고.

바로 그때. 조용히 전화를 받고 있던 비서가 한상진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혀, 협회장님. 지금 밖에서…!”

비서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서걱!

기밀 공간의 문이 좌우로 갈라졌다.

쿠쿠쿵!

무너져내리는 파편 속에서 뜻밖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콜록! 먼지 하곤….”

“아무리 일이 커졌다고 해도 이런 작은 나라에까지 오게 될 줄이야.”

“한국 랭커들이 자기 일만 똑바로 처리했어도 우리까지 나설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만 징징거려라.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

연기 속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최심부에 침입한 건 명백한 도발 행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단군 길드의 랭커가 즉시 무기를 꺼냈다.

우우웅!

눈부신 빛과 함께 아공간에서 거대한 대검이 나타났다.

하지만.

카앙!

검이 채 반쯤 나오기도 전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여자가 끼어들었다.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옭매여오는 타이밍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만 해라. 카잘. 우린 전쟁을 치르려고 온 게 아니다.”

“이창희 플레이어. 멈춰주십시오. 아는 분들입니다.”

남자와 한상진이 서로 데려 온 이들을 말렸다.

“협회장님. 아는 분들이라면…?”

“인도에서 온 랭커들입니다. ‘언약’의 아포칼립스가 발동된 이후 강진혁 플레이어를 처리하기 위해 오늘 입국했다고 들었는데, 이토록 막무가내일 줄은….”

“처음 뵙겠습니다. 인도 ‘간다라’의 마스터 쿠마르라고 합니다. 예전에 저희 쪽에서 크게 신세를 졌었죠.”

니라샤.

한때 정상급 랭커였지만, 고인물 코퍼레이션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간다라는 그대로 해체되었고 인도는 구심점을 잃은 채 경쟁에서 도태되었다.

완전히 탑의 등반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른 이들의 빛나는 광경만을 바라만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유럽과 올림포스와의 전쟁 이후 모든 게 완전히 변했다.

사라졌던 천세의 신격들이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사도들을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난관을 뚫고 정상급 랭커들이 탄생했다.

주신 ‘브라흐마’의 가호를 받는 쿠마르.

주신 ‘비슈누’의 가호를 받는 데쉬무크.

주신 ‘인드라’의 가호를 받는 카잘

주신 ‘아그니’의 가호를 받는 안티아.

이 넷이.

“당신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외에도 세계 각국에서 자신들이 보유한 랭커들을 보낼 테니까요.”

쿠마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엇보다 이번엔 사리사욕만 채우려 했던 니라샤 때와 달리 정의도 명분도 우리 쪽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개개인은 분명 강진혁을 뛰어넘을 수 없다. 아무리 주신들의 가호를 받는다고 한들, 홀로 주신들을 쓰러뜨린 괴물의 상대가 되진 못할 테니까.

그러나 하나의 목적으로 뭉친 집단이라면….

……그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

⁕⁕⁕

같은 시각.

시그니엘에서는 진혁과 나머지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어이가 없네.”

진혁이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방송을 시청했다.

모습과 마력은 물론 사소한 버릇까지 판박이다.

완벽하게 자신을 겨냥하고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뜻.

‘거기에 마안까지 가지고 있단 말이지.’

혼돈의 눈은 탐욕의 눈과 마찬가지로 최상위에 속하는 눈 중 하나. 굉장히 복잡한 조건을 연이어 달성해야지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종류다.

엘리스야 워낙에 상위종이니 언노운에 관한 기억이 변질되는 일이 없었지만, 나머지 멤버들 역시 기억에 혼선을 겪고 있는 모양.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이 정도니 일반인들이나 어중간한 플레이어들이야 말해 봤자 입만 아프리라.

‘이 타이밍에 언약을 발동시킬 정도면 태고의 존재…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놈들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봐야겠지.‘

운영자 중 하나가 움직인 게 틀림없다.

그것도 굉장히 까다로운 놈이.

‘인류를 인질로 잡은 데다, 시간이 7일밖에 없으니 이쪽이 쓸 수 있는 패가 몇 개 없네.’

그마저도 읽히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아픈 곳만 파고들고 있는 만큼 어지간한 변수가 아닌 한, 상대 쪽에서 전부 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여간 독박을 써도 아주 제대로 쓰게 생겼다.

“우움. 어떡할 셈이냐? 우물. 이대로… 꿀꺽! 둔다면 저 가짜가 더욱 기세등등하게 날뛸 텐데?”

엘리스가 후식으로 딸기타르트를 한입 가득 베어 문 채 웅얼거렸다.

“잘못하면 인류랑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드론들에 잡힌 플레이어 숫자만 백이 넘고 있어요. B급 이상으로만요.”

“랭커들도 꽤 섞여 있다. 마력을 숨길 노력도 하지 않는군.”

“하여간 이 자식들. 진혁 오빠가 구해준 건 벌써 다 까먹고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이빨부터 드러내는 것 봐.”

나머지 멤버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놨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다들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번 위기는 지금까지 넘어온 그 어떤 위기와도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탑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아니라 같은 인간과 싸워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모르는 것도 한몫하려나.’

대결계 안에서 툴차와 싸웠다는 게 유일한 팩트이며, 누가 이겼는지 그 안에서 어떠한 거래와 모략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나머지 멤버들 중에서 가짜 녀석의 말을 믿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진혁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 상황을 만든 운영자들에 대한 짜증도 솟구쳤지만, 그보다 심한 건 태세 전환을 해대는 인간에 대한 환멸과 염증이었다.

우선은 상대와 접촉해 보는 수밖에.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파악하려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눠보는 게 가장 중요했다.

“태민아.”

“네. 형.”

“그 자식 지금 각성자 협회에 있는 거지?”

“아마 그럴 거예요. 마력을 억누르는 대규모 시설은 거기뿐인 데다, 요 몇 시간 새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보안이 몇 단계는 올랐거든요.”

“그렇다면… 지하 어딘가에 있겠네.”

대충 후보군이 떠오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콰아앙!

시그니엘의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붉은 폭염과 함께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진혁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이 마력은….”

특유의 연꽃향이 맴도는 청아한 투기.

간다라의 랭커들이 첫 개시를 알렸다.

“성가신 놈들이 왔군. 굳이 상대하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도 방법이다.”

천유성이 검집에 손을 갖다 댔다.

도발을 하면 물불 안 가리고 눈이 뒤집어지는 놈이 웬일로 이럴 때는 이성적이네.

물론, 녀석의 말처럼 거머리들이랑은 상종을 안 하는 게 답이긴 하다.

하지만.

마음 편하게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차단되어 있었다.

[현재 이 일대에는 ‘시스템 조작’이 펼쳐져 있는 상태입니다!]

간다라의 플레이어들이 공격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감춰져 있던 또 다른 함정이 드러났다.

운영자 중 하나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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