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플레이어 언노운(Unknown) (3)
시그니엘의 맞은편.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 사이로 늙은 노인과 젊은 여자가 떠 있었다.
불타는 입구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우우우웅!
눈부신 빛이 연신 점멸했다.
도시 전체에 펼쳐져 있는 ‘시스템 조작’으로 인한 대결계.
완벽한 함정을 위해 운영자들이 만들어둔 사냥터였다.
“수리부엉이는?”
“추격에 실패했어요. 워낙에 시스템을 잘 알고 있는 놈이라….”
“그렇겠지. 하필이면 가장 골치 아픈 녀석이 우리와 뜻을 달리하다니.”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 운영자 중에서도 시련의 탑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 그 누구보다 탑을 탐구하고 제작하는 데 열중했던 이가 바로 수리부엉이였다.
같은 편일 때야 든든했지만, 적이 된 지금은 가장 성가신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괜찮을까요? 이미 강진혁과 수리부엉이 때문에 운영자 넷을 잃었어요. 게다가 새영언환 역시….”
“그래봤자 대세를 거스르진 못해. 무엇보다… 놈은 이번에 무너질 거다. 그렇게 된다면 수리부엉이나 나머지 놈들도 굴복하겠지.”
“그건… 그렇겠죠.”
“결계는 신경 쓰지 말고 탑 밖에서 여론을 조작하는 데 집중해라. 인류와 고인물 코퍼레이션을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일 터. 특히 천세의 신격들이 인도의 랭커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알겠어요.”
긴 생머리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시그니엘에서 솟구친 화염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퍼어엉!
인도의 랭커들이 마력을 해방함으로써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
“형! 1층 로비는 이미 점거됐어요!”
드론들을 통해 상황을 살피던 이태민이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퀘스트가 나타난 직후 시그니엘 일대는 플레이어들로 인해 포위됐고. 진혁은 만약을 대비해 이태민을 시켜 호텔 전체에 방어타워를 배치하도록 시켰다.
‘1인 군단’이라 평가받는 이태민의 능력이라면 최소한의 요새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강하네.’
적들이 내부를 파고드는 속도와 파괴력은 예상 이상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박살 나는 방어 타워와 드론들.
온갖 레이저 트랩과 화생방 함정들도 무용지물이었다.
예전에 니라샤를 상대할 때보다 몇 배는 더 까다로워진 느낌이다.
“하필이면 건물 꼭대기 쪽이라 탈출 루트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겠군. 이왕 싸우게 된 거 일점돌파를 추천한다.”
“저도…도울게요.”
천유성과 테레사가 진혁의 옆에 섰다.
“괜찮은 겁니까? 어차피 타겟은 저 하나인데, 만약 도왔다는 사실이 고국에 알려졌다간….”
“상관없어요. 누가 뭐라하든 진혁 씨가 다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 역시. 네놈이 나 말고 다른 놈들의 손에 쓰러지는 건 죽어도 못 본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이미 각자의 손에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시큰하고….
……코끝이 아려왔다.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네.
최악의 상황에서도 옆에 있어주는 동료들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좋다. 이걸로 결정됐구나. 미천한 것들이 감히 짐의 안방에 쳐들어왔으니 모조리 쓸어버려주마.”
엘리스도 손마디를 꺾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가능하면 우리끼리 전력을 깎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먼저 뺨따귀를 맞고도 가만히 있을 만큼 성인군자가 되진 않는다.
2배 아니, 10배로 갚아줘야지.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가짜 놈을 처리하는 거야.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각성자 협회의 본사 쪽으로 가야 해.”
“오빠. 우리가 남아서 시간을 끌 테니 오빠는 틈이 보이면 바로 빠져나가. 난 할아버지도 있으니 아무리 저 녀석들이 무대뽀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하진 못할 거야.”
“저 역시 층수를 제한하기만 한다면 방어를 몇 배는 더 강화할 수 있어요. 완전히 막진 못하겠지만 시간 끄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예요.”
유연화와 이태민이 유인조를 자처했다.
확실히 두 사람이라면 그 역할을 해주기에 최적의 인물들이다.
“알겠어. 부탁할게.”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모아두었던 마력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콰콰콰콰콰콰콰!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사수자리’가 깨어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운영자들이 쳐둔 결계에 균열을 만드는 것.
진혁이 결계를 파훼하는 데 최강의 힘을 지닌 사수자리를 꺼내 들었다.
눈부신 빛과 함께 거대한 마력이 손끝을 향해 모아졌다.
몇 미터에 이르는 반투명한 활의 시위가 터질 듯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고유능력 ‘배교자의 황금사과’ - ‘아스트라페’가 발동됩니다!]
거기에 제우스의 번개가 겹쳐지자 열과 빛이 밤하늘을 밝게 밝혔다.
지금이다.
파아아앙!
손끝을 떠난 화살이 폭풍이 되어 질주했다.
펜트하우스의 유리창이 한꺼번에 박살나며 황금색 빛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
“……큭!”
허공에 몸을 감추고 있던 두 운영자의 눈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결계를 파훼하려는 시도를 할 거라곤 예상했으나, 설마 그 위력과 속도가 이 정도로 강력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아니, 빠르고 강한 건 둘째 치더라도 노린 곳이 너무나 완벽했다.
이 넓은 결계 중에서 가장 마력의 흐름이 민감한 곳을 정확히 꿰뚫어봤으니까.
“막아라!”
노인이 고함을 질렀다.
“쳇!”
여자가 화살이 바로 닿기 직전 결계를 보강하는 능력을 사용했다.
바로 그 순간.
화살이 결계의 심장부에 도달했다.
대기가 갈라졌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충격파가 왜곡된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슬아슬한 균형.
그 결과는….
쩌저적!
하늘에 조각이 떨어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고유능력 ‘시스템 조작’이 발동되었습니다.]
거의 동일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저울에 거대한 조약돌을 던진 것이다. 시스템 조작에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시스템 조작으로.
“능력 복사… 멍청한 것. 설마, 시스템 조작까지 빼앗겼단 말인가!”
완전히 허를 찔려버린 상황.
노인이 이미 죽어버린 25년을 저주했다.
하지만, 아무리 욕설을 내뱉어봤자 이미 늦었다.
시스템에 생긴 틈은 손을 쓰기 힘들 만큼 커졌으니까.
[외부와의 연락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들을 더 달성해야 한다. 이 멤버만으론 운영자와 인류 전체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균열이 빠르게 수복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최소한 몇 분간의 시간은 남아 있을 터.
진혁이 인연이 있는 세력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해줘.”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제 한 쪽에게만 더 전하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콰드득… 서걱!
아주 미세하고 예리한 충격이 발바닥을 통해 전달됐다.
보통이라면 감지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 미세한 느낌이다.
“가장자리로 피해!”
진혁이 고함을 질렀다.
쿠쿠쿠쿵!
갑자기 건물 전체가 뒤쪽으로 크게 쏠렸다.
“뭐, 뭐야?”
“건물이 기울고 있어요…!”
반대쪽에 있던 가구들이 미끄러졌다.
말 그대로 무언가 시그니엘을 통째로 베어버린 것이다.
숨이 막히는 일격. 황당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럴 때를 대비한 대비책은 없는 거냐? 네가 사는 곳이니 무슨 수라도 준비해놨을 것 아니냐?”
준비라….
“그거야 당연히.”
“있겠지?”
“없어.”
여기가 무슨 베X맨 아지트도 아니고. 호텔을 내 입맛대로 꾸며놓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이 높이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게 될 거라는 경우의 수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각자 살아서 아래서 보자.”
원체 강한 애들이니 어떻게든 목숨은 붙어 있을 수 있을 거다.
아마도 말이지….
힐끗.
진혁이 까마득히 떨어져 있는 지상을 내려다봤다.
현실감이 없는 높이.
‘으음 역시 안 되려나.’
괜찮다.
이쪽은 1초 무적이나 별의 가호를 통한 부활스킬을 가지고 있었으니.
나머지야 뭐. 강한 자만 살아남겠지.
쿠쿠쿠쿠쿠!
멤버들이 건물과 함께 자유낙하를 하기 시작했다.
⁕⁕⁕
콰아아앙!
콰콰콰콰…퍼걱! 콰직!
박살 난 파편들이 호수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만 같은 현장이다.
먼지로 가득 찬 공기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100층이 넘는 랜드 마크가 사라지면서 남긴 상처는 그만큼 상상을 초월했다.
“죽었으려나?”
“글쎄. 강진혁은 몰라도 놈들 중 몇몇 정도는 처리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가졌어도 저기서 살아남긴 힘들겠지. 적어도 다리 하나 정도는 못 쓰게 됐을 거다.”
“크하하하! 다 떠나서 이걸 박살낸 게 알려지면 한국 정부놈들이 아주 난리가 나겠구만.”
건물이 무너지는 걸 본 간다라의 랭커들이 한 마디씩 늘어놨다.
비행 능력이라도 있지 않는 한,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게 틀림없었다.
“어설프게 예단하지 말고 마력감지에 집중해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숨통을 끊어놔야 한다.”
쿠마르가 예리하게 연기 속을 꿰뚫어봤다.
작은 마력의 움직임이라도 있다면 즉각 치명타를 날릴 준비를 끝마친 채.
바로 그때.
부르릉!
뿌연 시야 너머로 밝은 라이트가 점멸했다.
요란한 시동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최신형 코인 바이크였다.
여기저기 긁히긴 했지만,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소속된 멤버들 중에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하의 강진혁이 도망칠 생각인가?”
“너희랑 놀아주기보다 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거든. 다음에 날 잡고 제대로 놀자고.”
“깔보는 듯한 말투는 듣던 대로군. 한데, 누가 순순히 보내준다고 했지?”
쿠마르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있던 안티아가 마력을 끌어모았다.
“아주 예쁘게 익혀주지.”
화르륵!
작은 불꽃들이 흩어지며 전신이 타들어갈 것만 같은 겁화가 일어났다.
수백 개의 불꽃들이 모여 이내 하나의 형을 이뤘다.
[안티아가 고유능력 ‘화염의 군대’를 발동합니다!]
아그니의 권능.
불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일제히 들고 있던 창을 집어던질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오토바이가 빠르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수의 창을 피해낼 순 없을 터.
더군다나 ‘만다라’의 능력으로 인해 창의 속도와 공격력이 몇 배는 더 상승해 있는 상태다.
피해 하나 없이 빠져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부우우웅!
겁화로 이루어진 창들이 대기를 꿰뚫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퍼퍼퍼퍽!
석촌 호수의 수면 아래에서 수백 개의 창이 솟구쳤다.
붉은 선들과 노란 선들이 서로 같은 점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
콰콰콰콰콰쾅!
콰직! 콰득! 퍽!
불의 창들이 모래로 만든 창들과 정면에서 충돌했다.
“……무슨!?”
난데없는 제3자의 개입에 안티아가 두 눈을 부릅떴다.
물속에서 검은 갑주를 입은 수많은 병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쟈칼의 형상을 본뜬 외형.
그 가운덴 또 다른 한국의 랭커 둘이 서 있었다.
“하아. 난데없이 우리가 인류랑 싸우게 된 거야?”
“흐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 이상한 낙인이 찍힌 이상 좋으나 싫으나 그 자와 한 배를 탄 것을.”
이유리와 민정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