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만렙 뉴비-604화 (605/653)

604화. 불타오르는 세계 (1)

시련의 탑 50층 ‘우둔한 자의 왕궁’.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들로 가득한 건축물과 기괴한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시련의 탑을 설계한 운영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혼돈의 중앙엔 모든 태고의 존재들을 부리는 아자토스와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인물 코퍼레이션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로 깎아 만든 체스 말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체스판에선 거대한 말들이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큭큭. 그렇게 백날 워게임을 하면 뭐합니까? 정작 그쪽이 부리는 운영자들이 애지중지 펼쳐둔 결계를 강진혁이 한 방에 박살 내 버렸잖아요? 이래서야 일을 함께 할 수 있을는지….”

니알라토텝이 키득였다.

남자와 운영자들의 실패가 고소해 죽겠다는 것처럼.

그러자 남자의 곁에 서 있던 다수의 인물들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주제 파악을 못하고 주둥아리를 놀려대는구나.”

“네놈은 우리가 만들어낸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냐?”

“게다가 니알라토텝. 그대가 섭외한 인도의 머저리들 또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인 것 아닌가?”

“뭐라고? 감히 우리 보고 피조물이라고 지껄인 건가?”

“아버지께서 계시는데 건방진….”

“그깟 어설픈 조작 능력이 우리에게 통할 것 같나요?”

태고의 존재들 역시 촉수들을 일으켰다.

쿠쿠쿠쿠쿠!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마력의 물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곳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버릴 듯한 분위기였다.

바로 그때.

“흐음. 다들 신경이 날카로운 건 알겠는데, 조금쯤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싹…!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

단순히 말을 한 마디 했을 뿐인데도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이…건….”

니알라토텝마저 그 격에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이 자리에서 오롯이 아자토스 하나뿐이었다.

“이제야 조금 조용해졌네.”

쥐 죽은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남자가 생긋 웃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같은 배를 탄 한 편이지 적이 아니야. 서로 얼굴 보기 역겨운 건 알겠지만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조금만 더 으쌰으쌰해보자고. 그리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강진혁을 사냥하는 게 수월할 거라곤 애초부터 생각 안 했으니까.”

둥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체스 말 몇 개가 움직였다.

지형과 지물 역시 그에 맞춰 바뀌어나갔다.

“어차피 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움직일지는 전부 예측이 가능해. 무엇보다 판을 설계한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고 불만이야?”

변수를 창출해내는 능력이 뛰어난 건 인정하는 바이다.

다만.

세상에는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남자가 체스판의 반대편을 보며 입 꼬리를 기묘하게 비틀었다.

텅 빈 자리엔 남자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상대가 있었다.

‘자, 어서 나를 더욱 즐겁게 해다오. 이 지루하고 따분한 삶에 아주 약간이나마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분주히 움직이는 체스 말들이 다음에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그리고 무얼 노리며 어떤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지는….

너무나 뻔히 보였다.

그럼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상대가 다름 아닌 ‘강진혁’이기 때문이겠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자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진혁 하나뿐이었으니까.

⁕⁕⁕

부와아앙!

오토바이들이 시속 15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했다.

간다라의 랭커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진혁이 곧장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최단 루트를 탔다.

도로가 통제된 데다 이른 새벽 시간.

제대로만 간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순조롭던 계획에 흙탕물이 튀었다.

두두두두두!

채 1km도 벗어나기 전에 하늘에 다수의 헬리콥터들이 나타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벌써 찾아낼 수는 없을 텐데.

이유는 곧바로 밝혀졌다.

저 먼 창공에서 점멸하는 밝은 빛.

현대 정보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찰위성이다.

“…쉽게 놓치지 않겠다는 건가.”

최악의 상황에선 각성자 협회에서 보호하고 있는 언노운과 이쪽을 모두 죽여야 할 터.

그렇다면 제한 시간 내에 신병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새삼 국가 차원에서 쫓아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이 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엘리스가 즉시 피로 만든 꼬챙이들을 소환했다.

“날파리들이 귀찮게 하는구나. 모조리 떨어뜨려 주겠다.”

“아니, 그래봤자 소용없어. 헬리콥터는 아무리 박살 내도 위성을 어떻게 하지 못하면 계속 꼬리를 잡힐 거야.”

“으음. 저 멀리 있는 것까진 짐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우주까진 무리긴 하지.”

아무리 엘리스라 하더라도 추진체 없이 그런 위력의 투창을 던질 수 없다.

“형. 제가 한번 해볼게요.”

그러자 이번엔 이태민이 나섰다.

5대의 공격헬기가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히는 사이 이태민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태민이 고유 성창 ‘라스트 마이스터’를 발동합니다!]

모든 기계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힘.

시련의 탑에서도 쓸 만한 능력이긴 했지만, 현대전에 있어서는 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했다.

넓게 퍼진 파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헬기들을 덮쳤다.

위이이잉!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으아아악! 추, 추락합니다!”

쿠쿠쿠쿠쿠!

계기판이 엉망이 된 헬기들이 그대로 한강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높게 솟구쳤다.

그 와중에 조종사들이 탈출하게끔 안전장치는 풀어뒀으니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진짜 든든하긴 든든하네.’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태민으로부터 능력을 복사하긴 했지만, 저 정도로 정교한 컨트롤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특수한 마력 파장을 이용해 위성의 추격으로부터도 몸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

이걸로 시간을 잠시 벌게 된 것이다.

“이 틈을 이용해 협회로 가면 되겠군.”

천유성이 재차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목적지까지는 앞으로 5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콰콰!

한강으로부터 검은 빛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솟구쳤다.

마치 해일처럼. 수십 미터의 높이를 가진 끈적끈적한 액체가 몰려들었다.

‘저건 또 뭐지?’라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도 잠시.

치이익!

만약을 대비해 한참 앞에 발동시켜둔 테레사의 ‘성호’가 액체에 닿는 순간 그대로 녹아내렸다.

황금빛 장막이 사라지며 검은 액체가 스멀스멀 차올랐다.

“피, 피해야 돼요!”

테레사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Lv30 신성 스킬이 저토록 허무하게 파훼됐다는 건 절대로 맨몸으로 맞아서는 안 된다는 뜻.

엘리스는 몰라도 다른 이들은 한 줌의 핏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조건이 추가로 충족되었습니다.]

두두두두두…!

붉은 상태창과 함께 갑자기 도로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움직이고 건물들의 위치가 달라진다.

영화 속에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격변이었다.

‘결계’와 유사한 종류.

그것도 최소한 12성급에 이르는 무언가다.

“형, 능력이… 더 이상 고유 성창이 통하질 않아요!”

“여긴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오빠! 왼쪽에서 기분 나쁜 액체들이 막 쏟아지고 있어!”

완전히 변해버린 세계로 인해 나머지 멤버들 사이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빌어먹을….”

진혁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설마 이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스킬이 발동될 때까지 눈치를 못 채다니. 이건 고작 며칠 사이에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몇 달…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준비해 왔을 것이다.

‘설마, 내가 이쪽으로 움직일 거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허나, 그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153구역’에 대한 소거가 시작됩니다.]

[제한 시간 0h : 19m : 59s]

콸콸콸콸콸!

엄청난 양의 검은 액체가 몰려들었다.

153구역은 무얼 의미하는 거지?

서울을 전부 153개의 카테고리로 쪼갰다는 뜻인가?

20분이란 제한 시간의 기준은 무엇이고. 그걸 통해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단서는 또 무엇일까?

온갖 경우의 수와 가능성들로 머리가 복잡했으나, 우선은 고지대로 가야 한다.

“뛰어!”

진혁이 바뀐 도심 속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

진혁과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레이더에서 사라진 지 3일.

그 기간 동안 전 세계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언약’의 카운트가 시작된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엄청난 수의 아웃브레이크들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리 운석이라도 떨어지는 게 나을 것 같군. 그건 다 같이 힘을 모아 대응이라도 해보든가 하지.”

한상진이 연이어 들려오는 보고에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웃브레이크의 발생 빈도도 빈도였으나, 더욱 골치 아픈 문제는 게이트의 랭크였다.

4일 차에 접어들면서 랭커들도 감당하기 힘든 강력한 몬스터들이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니까.

미국, 유럽, 남미, 중동, 서아프리카.

20개가 넘는 대도시들이 네임드 몬스터들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수백 개가 넘는 도시엔 대피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시련의 탑이 처음 나타난 이후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국 역시 부산과 대전을 잃었고 영등포, 용산 일대와 성남, 분당 일대를 빼앗기기 직전이었다.

붉게 표시된 지도에서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이지 않았다.

화상 회의를 통해 모인 이들도 입을 굳게 닫은 채 뾰족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때, 귓속말을 전해 받은 직원 중 하나가 새로운 속보를 전했다.

“협회장님…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천안에 나온 B급 아웃브레이크가 A급으로 상향되었다고…합니다. 블랙 오우거들이 오크들 사이에 다수 섞여 있다고….”

판교에 동원된 공격대는 총 셋.

부족한 인력난 속에 가까스로 쥐어 짜낸 플레이어들이었다.

오크들이라면 어찌어찌 상대할 수 있는 멤버들이었지만, 어지간한 공격은 맨몸으로 받아내는 블랙 오우거한테는 어림도 없을 터.

천안 역시 가망이 없다고 봐야 한다.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지?”

“앞으로 88시간 정도가 남아있긴 합니다만, S급 게이트가 나오는 시점이 온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걸 고려한다면 데드라인은 최대 36시간이라고 봐야겠죠.”

고작 36시간.

그게 인류에게 남아 있는 전부였다.

“강진혁 플레이어에 대한 단서는 여전히 없는 건가?”

“……예. 미국의 위성까지 전부 동원하고 있습니다만, 올림픽대로 이후 아예 흔적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역시 그쪽이 가짜라고 봐야겠지.”

“그게 아니라면 숨을 이유가 없겠죠.”

진짜와 가짜가 누구인지 파악한 건 좋았으나 문제는 가짜를 찾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걸로 끝이군.’

한상진이 체념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모두가 희망의 끈을 놓고 있을 때.

[언노운이 화상통화를 요청했습니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언노운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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