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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605화 (606/653)

605화. 불타오르는 세계 (2)

옅은 전조등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독방.

그곳에서 한상진은 언노운과 독대를 하는 중이었다.

“저희와… 거래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대로라면 인류가 멸망하게 생겼으니까요. 처음엔 여러분들을 믿고 가짜의 생포를 맡기려 했습니다만, 그게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이라면 가짜를 잡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놈은 제 특성과 기억을 그대로 복제해 만들어낸 모조품입니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사고의 흐름은 파악할 수 있죠.”

언노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상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도 순순히 협조하고 있는 강진혁 플레이어님을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직까지 각성자 협회에서 언노운을 같은 편이 아닌 포로로서 감금하고 있는 이유.

“당신이 진짜라면 어째서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당신이 아닌 가짜와 함께 하고 있는 거죠?”

이 부분이 가장 걸렸다.

특히 명망이 높은 테레사나 쉽게 곁을 안 주기로 유명한 천유성이 가짜와 함께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한상진의 말에 언노운이 무겁게 입을 뗐다.

“사실… 제 동료들이 놈을 따르는 덴 이유가 있습니다. 가짜 녀석이 오랜 시간을 들여 제 동료들을 세뇌시켜왔기 때문입니다.”

[‘기억의 파편’이 개방됩니다.]

위이잉!

상태창에서 수십 개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곳엔 지금까지 진혁이 대상을 굴복시키고 복종시키는 과정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플레이어는 물론 거주자들에게 ‘염혼의 낙인’을 찍고 평생을 복종하게 하는 것들 전부.

시기와 과정을 전부 언노운에게 유리하게끔 교묘하게 편집한 영상이었지만, ‘암굴의 눈동자’의 효과로 인해 그 위화감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협회장님께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셨습니까? 어째서 처절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대를 짓밟는 사이코패스에게 그토록 많은 인재들이 따르는지?”

“……!!”

한상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사실 몇 번이고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있었다.

자신이 보고 들은 진혁의 사건들은 어지간한 흉악범죄는 어린아이 장난으로 보일 만큼 잔혹했었으니까.

그런데 저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이제야 머릿속의 퍼즐들이 착착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언노운이 쐐기를 박는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 ??’가 개방됩니다!]

우우웅!

눈부신 빛과 함께 내부가 환하게 밝아졌다.

“이건 설마…?”

“앞으로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겁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가짜를 잡아보이겠습니다.”

설령 인류의 절반이 사라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가짜로 추정되는 진혁은 레이더에서 완전히 사라진 상황.

이제는 눈앞에 있는 언노운을 믿어야만 한다.

“……각국의 정상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

[다음 봉인이 풀렸습니다.]

4일 차가 지나면서 ‘언약’의 발동 조건이 더욱더 가까워졌다.

가까스로 질서를 유지하던 국가 기관과 각국의 각성자 협회 역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불타는 도시와 빠르게 늘어나는 몬스터들.

수도와 위성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사람이 사라진 유령도시로 변해버렸다.

마치 아포칼립스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미처 피난에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지옥과 같은 현실 속에 내던져졌다.

“크르르….”

“그오오오!”

검은 갑주로 무장한 오크들이 폐허를 뒤졌다.

특유의 검붉은 피부와 야성적인 고대 문신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콰앙! 쾅!

쌓여 있던 빈 깡통들과 선반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피와 살점이 눌어붙은 글레이브에서 비릿한 혈향이 피어올랐다.

그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지하.

십여 명의 생존자들이 온몸을 떨면서 실소를 흘렸다. 몇몇은 실금하거나 그 자리에서 졸도하기도 했다.

“히이익….”

“끝났어. 다 끝났어. 우린 다 죽게 될 거라고. 히히히.”

“쉿! 조용히 해. 입구엔 고블린들의 분뇨를 잔뜩 발라놨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어.”

“제발….”

이 중에서는 각성한 플레이어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오크들에게 맞서거나 탈출로를 뚫을 생각을 하진 못했다.

지난 며칠간의 전투 끝에 인간들은 절대로 아웃브레이크에 대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퀴벌레처럼 죽여도 죽여도 쏟아지는 몬스터들.

인류의 저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더 강하고 무시무시한 능력을 자랑하는 종족이 튀어나왔다.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홉고블린 네임드 오크와 트롤부터 언데드 오우거와 와이번까지.

지금껏 시련의 탑을 정복하면서 상대했던 몬스터들의 상위 종족이 말이다.

그 결과 인류는 전례 없는 위기에 봉착했다.

대형길드들이 몰락하고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사라진 아포칼립스가 되어버렸으니까.

“크르르…륵.”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를 제외하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식은땀을 흘리며 오크들이 이곳을 모른 척 지나가길 기도했다.

그러나.

운에 기도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 법이다.

콰앙… 콰직! 콰드득!

글레이브가 가차 없이 철로 만든 바닥을 뚫고 들어왔다.

워낙에 후각이 예민한 ‘이모탈 오크’들은 아무리 냄새를 지웠다고 해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으아아악!”

“도, 도망쳐!”

“어디로 도망치라고 밖에도 놈들이 쫙 깔렸는데?”

“빌어먹을! 애초에 이딴 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빠져나갈 곳 따윈 없다.

애초에 입구가 하나뿐인 지하였으니까.

완전히 문을 박살 내고 아래로 내려온 오크들이 군침을 뚝뚝 흘렸다.

“크르르…. 절반은 죽여서 여기서 포식하고 나머지 절반은 포로로 잡아간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이모탈 오크가 글레이브를 냅다 집어던졌다.

부우웅…퍼퍽!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남자의 등에 글레이브가 박혔다.

“쿨…럭?”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흉기를 멍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피거품을 문 채 버둥거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다가간 오크가 그대로 검을 뽑아 미친 듯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퍼억! 퍽! 퍽!

완전히 곤죽이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계속해서.

도망치거나 저항하면 똑같은 꼴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엄포다.

“모처럼 만의 고기로군.”

“이 숫자면 포식하겠어.”

오크들이 순식간에 시체한테 달려들었다.

우드득. 우적우적.

살이 뜯기고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퍼졌다.

차갑게 얼어붙어버린 공기.

도망 따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모두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신이 당장 여기서 먹잇감이 되는 게 아니라 포로가 되어 1초라도 더 살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웅!

[균열이 파괴되었습니다.]

[공간이 이어집니다.]

허공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쩌적!

한 무리의 남녀가 현세에 귀환했다.

***

“휴우. 드디어 돌아왔네.”

가장 앞에 선 남자가 온몸에 묻은 피와 먼지를 털어냈다.

굴뚝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마냥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머지 인간들 역시 꾀죄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륵… 새로운 인간들인가.”

이모탈 오크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가뜩이나 온갖 종족들이 인간 사냥에 열을 올리느라, 점점 더 인간들을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이때.

새로운 먹잇감과 노예들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죽여.”

“크륵!”

대장의 말 한 마디에 또 다시 글레이브가 허공을 갈랐다.

정확히 목을 향해서 쇄도한 날붙이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만들어냈다.

카아앙!

그러나 이번에는 살이 잘리는 소리 대신 날카로운 금속음이 이어졌다.

“호오.”

“막았다고? 여긴 인간들의 수도 쪽도 아닌데 제법 쓸 만한 놈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줄이야.”

“아니, 저놈이 약해빠진 탓이지.”

“크하하! 타로취, 비실비실한 인간 한 명을 한 번에 죽이지 못하다니. 전사의 수치다.”

“어디 더 발악해봐라. 인간. 모처럼 아주 싱싱한 놈이 걸려들었군.”

구경하던 오크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계속해서 도망만 치는 놈들을 죽이느라 따분했는데, 모처럼 재미난 사냥감이 걸려들었다.

“이… 약해빠진 인간 놈이…. 나에게 수치를 줘?”

타로취라 불린 오크가 굵은 송곳니를 드러냈다.

쿠쿠쿠쿠!

[이모탈 오크가 ‘전사의 문신’을 발동합니다!]

어지간한 층계의 네임드급에 해당하는 마력.

터질 듯이 팽창한 팔근육에 글레이브에 실린 무게가 몇십 배는 증가했다.

거기에 ‘운철’로 만들어진 글레이브는 오러 블레이드가 없이도 같은 위력을 발휘하게 해줄 터.

노련한 기사들도 어찌하지 못하는 게 바로 이모탈 오크들이었다.

카가각…!

칼날과 칼날 사이에서 불똥이 튀어올랐다.

이건 막아도 막은 게 아니다.

아예 무기째로 상대를 토막내어 버리겠다는 집념까지 느껴졌다,

바로 그때.

“흐음. 이제는 오크 나부랭이들이 다 덤비고. 며칠 자리 좀 비웠다고 아주 우습게 보였나 보구나 계약자가.”

싸움을 구경하던 은발의 소녀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상한 곳에서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하고 와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달콤한 민트초코나 먹을 생각이었는데… 쩝.”

남자 역시 천천히 밀리고 있던 단검에 가볍게 마력을 실었다.

칼날의 색이.

검붉게 바뀌었다.

그 순간.

“크… 르륵?”

서걱!

오크의 상반신이 천천히 무너졌다.

어긋난 부분을 따라 새빨간 핏방울들이 맺혔다.

운철로 만들어진 글레이브 역시 너무나 깔끔하게 반토막이 나버렸다.

“그래도 뭐, 놈이 만들어준 결계 속에 있던 게 마냥 손해는 아니었어.”

진혁이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갇혀 있는 동안에는 욕이 절로 나오는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꽤 요긴한 정보들과 단서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놈이 무엇을 계획했고 어떻게 움직일지.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을 좋아하는 놈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를 말이다.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진혁의 손에 용살검 ‘발뭉’이 쥐어졌다.

“중층부에서 종종 보이는 이모탈 오크들이라… 몸 풀기로는 나쁘지 않겠네. 안 그래도 물어볼 것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아주 잘 됐어.”

“전사 하나 베었다고 너무 자신감이 가득 차 있군. 네놈이 제법 강하다는 건 알겠지만, 고작 그 인원으로 뭘 어쩌겠다는 말이냐?”

대장 격인 이모탈 오크가 품 안에서 해골로 만든 뿔나팔을 꺼냈다.

[지휘관 이모탈 오크가 특수 스킬 ‘부족의 부름’을 사용했습니다!]

녹색 빛 파장이 넓게 퍼져나갔다.

근처에 있는 모든 부족원들을 불러모으려 하는 것이다.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렸다.

오크들이 무서운 건 개개인의 전투력보다도 압도적인 숫자에서 나오는 물량공세에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살려달라고 빌면 특별히 노예로 부려줄 생각은 있다. 물론, 건방지게 군 대가로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한 뒤이긴 하겠지만.”

오크들의 눈에서 비릿한 안광이 피어올랐다.

공포에 질린 진혁의 모습을 실컷 즐기고 싶어 죽겠다는 듯이.

진혁이 대검의 끝을 바닥에 댄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그극….

칼끝이 지면을 갉아냈다.

“이야. 나랑 생각이 같아서 참 좋네.”

이쪽도 비슷하게 할 생각이다.

물론, 정보를 다 빼낸 뒤에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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