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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608화 (609/653)

608화. 언약(言約)의 전투 (2)

각성자 협회 지하 17층.

최고 보안을 자랑하는 최심부에선 언노운이 흥미롭다는 듯이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이군요.”

플레이어들과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전면전을 벌임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이제는 둘 중에 하나가 박살 날 때까지 서로를 물어뜯어야 하는 치킨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언노운의 옆에는 일전에 시그니엘에서 모습을 보인 노인과 여자가 서 있었다.

'jjy77'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던 노인과 그리고 '1인2닭'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던 여자가.

“흐음. 그래도 협회장을 구워삶아둔 덕에 움직이기가 수월하군.”

“누가 아니래요? 진즉에 이렇게 인간 대 인간 구도로 갔으면 편했을 텐데.”

jj와 2닭이 협회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스크린에 비친 화면에는 모든 전투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중이었다.

명령을 내려야 하는 지휘자로서는 정보에서 압도적인 이점을 가지게 된 셈이다.

“가진 게 힘밖에 없는 멍청한 태고의 존재들에게 일을 맡기니 그런 거겠죠. 뭐, 사실 제 주인께서 스릴을 즐기시는 성격인 게 가장 큰 몫을 했겠지만요.”

“하긴, 애초에 그분께서 처음부터 나섰더라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긴 했지.”

jj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목도한 남자의 권능은 감히 운영자들마저도 간섭할 수 없는 영역에 이른 상태.

아직 30층 대를 공략 중인 진혁이 이긴다는 상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다른 쪽은 대비한 거야? 인간들은 강진혁을 제거하는 즉시 당신도 죽이려 할 거야. 알고 있지?”

진짜가 죽었는데도 언약이 계속된다면 모든 플레이어들이 언노운을 노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는 이 튼튼한 구조물 역시 방어책이 아니라 도주로 없는 감옥으로 변모하겠지.

무엇보다 각종 구속구와 자폭 마법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몸으로는….

……제아무리 진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우리 도움을 기대하는 거라면 그건 어려울 거야. 이미 시스템 조작을 비롯해 탑 밖에서 허용치 이상으로 움직였거든.”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요.”

언노운이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우우웅!

아공간이 개방되며 보라색 광석이 튀어나왔다.

“그건 설마…?”

jj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광석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러지들이 뭘 생각하는지야 처음부터 훤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광석의 표면에 쩍쩍 금이 갔다.

동시에 엄청난 마력의 파장이 퍼져나갔다.

콰아아앙!

지하 전체가 진동할 정도의 충격이 연이어 이어졌다.

[S급 게이트가 개방됩니다!]

[S급 게이트가 개방됩니다!]

[S급 게이트가 개방됩니다!]

[A급 게이트가….]

[……개방됩니다!]

무수히 쏟아지는 상태창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영등포. 압구정. 마포. 강남과 천호까지.

애초에 이곳에 모인 인간들을 살려둘 생각 따윈 없었다.

귀찮은 버러지들을 한 곳에 모조리 몰아넣은 다음….

한꺼번에 박멸시킬 계획이었으니까.

“자, 지금부터 서로 죽고 죽이세요.”

그 어떤 승자도 없는. 오롯이 본인의 생존만을 신경 써야 하는 죽음의 무도회가 개최되었다.

***

삐비빅…! 삐비빅!

협회 내부의 마력 탐지 장치가 미친 듯이 울렸다.

“이, 이게 왜 이렇지?”

“말도 안 돼….”

기계가 고장 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화면에 표시된 붉은 점들은 그 수와 크기가 기존의 데이터를 완전히 짓뭉개고 있었다.

무려 서른일곱.

추정 A급 이상의 게이트가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특히 예술의 전당 일대엔 S급 게이트만 4개가 나타났다.

우두두둑!

일그러진 균열.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최악의 악몽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검은 로브의 대마도사가 지팡이를 휘저었다.

쿠쿠쿠쿠쿠쿠!

청록색을 띤 보옥이 맹렬하게 타오르자 게이트 속에서 수백 명의 엘프들이 걸어나왔다.

일반적으로 숲과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들이 아니다.

강함을 위해 맹세를 저버린 타락한 자들.

정령술과 궁술 그리고 흑마법을 고루 익힌. ‘크롤’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전투병들이 바로 대마도사의 권속이다.

“클클클! 그 빌어먹을 미궁에 갇혀 있느라 좀이 쑤셨는데, 이게 얼마 만에 바깥 공기란 말인가!”

시련의 탑 36층.

미궁 ‘빛의 신전’에 봉인된 대마도사 ‘아페르망’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수백 년간 제대로 된 피 맛을 보지 못했는데, 드디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쉽지 않겠…네요.”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저런 괴물까지 상대해야 하다니….”

미국 타이탄 길드와 신중화 길드의 랭커들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살가죽을 통해 전해지는 묵직한 마력.

자칫 잘못하다간 머나먼 타지에서 모조리 뼈를 묻게 될지도 몰랐다.

같은 시각.

기계화 보병사단이 대기 중인 서초 IC에서도 게이트가 나타났다.

“그롸롸롸롸!”

머리가 다섯 개 달린 이무기.

비록 용이 되어 승천하진 못했으나,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살아온 덕에 보유하고 있는 마력은 S급을 가볍게 넘어섰다.

하늘이 갈라지며 구름 너머로 길고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 사단장님!”

“쏴…라! 당장, 가지고 있는 전탄을 퍼부으란 말이다!”

한국의 주력 전차인 K2 흑표가 일제히 이무기를 조준했다.

콰콰콰쾅!

퍼어엉!

백 개가 넘는 주포에서 불이 뿜었다.

탑에 있는 존재들에게도 통용이 되게끔 마력을 주입한 특수탄을 장착한 상태였다.

하지만.

우뚝…!

포탄이 이무기에 닿기 직전, 강력한 염동력이 발동되었다.

거침없이 뻗어나가던 포탄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것도 잠시 포탄이 서서히 방향을 틀어 왔던 곳을 바라봤다.

“피해애!”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아무리 기동성이 좋다고 한들 육중한 탱크가 포탄을 피할 순 없었으니까.

콰콰콰콰콰쾅!

융단폭격이 탱크들이 밀집한 지역을 강타했다.

고속도로가 그대로 불지옥으로 변했다.

“으아아악!”

“아아아악!”

산 채로 타버린 병사들의 시체는 그 수를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우두둑!

“끼르르… 취이잇!”

콰득!

“제물이 넘쳐나는구나!”

계속해서 나타나는 게이트들과 상급 보스들은 자유를 만끽하며 살육에 열을 올렸다.

***

“빌어먹을!”

이창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게이트들로 인해 플레이어들은 통제 불능에 빠졌고. 초기 대응을 놓친 탓에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 게이트가 완전히 개방되는 걸 막는 게 최우선이다. 그게 프로토콜에 나온 정상적인 대응조치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상황이었을 때의 이야기.

지금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뿌리 뽑는 게 우선이었다.

S급 몬스터들에 의해 모든 게 잿더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초조해진 건 간다라 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물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시간을 질질 끄는 통에 약이 바짝 올랐던 것이다.

쿠마르가 진혁을 정면에서 노려봤다.

“인류의 영웅들이니 뭐니 잘난 척은 실컷 하더니. 정작 위기의 순간엔 자기 목숨만 신경 쓰기도 바쁘군. 네놈들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다는 걸 모르는 건가?”

“뭐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게이트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고 민간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 가짜를 죽이기 전까진 상황이 더욱더 악화되겠지. 이런 악몽이 계속될 진데 자기 한 목숨을 희생해 모두를 구하는 길을 택할 생각은 없냐 이 말이다!”

“무슨 그런 망언을…. 당신들 양심이 있기는 한 거예요?”

보다 못한 테레사가 고함을 질렀다.

유연화와 이태민도 표정 관리를 하는 데 실패했다.

가장 크게 격노한 건 엘리스였다.

콰아앙!

붉은 마력이 일제히 뿜어졌다.

아까 전 자신이 공격당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살기가 도로 전체를 잠식해 나갔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대는구나. 계약자가 없었다면 네놈이 소중히 여기는 그 인류 따위 이미 한참 전에 멸종해버렸을 것이다.”

90일 안에 다음 층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대전제. 그걸 가능케 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진혁이었다.

그런데 은혜도 모르기를 유분수지.

스스로 낯부끄러워서라도 말하기 힘든 개소리다.

그러나 정작 진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대가 있어야 실망도 있는 법.

BJ를 처음 했던 그때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해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착취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타인을 짓밟는 게 인간의 본성이었으니까.

그래.

이런 기분이었구나.

이제야 아주 조금쯤 강진혁이 걸어온 길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진혁이 천천히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이 정도면 시간 벌이 정도는 충분히 됐겠지.”

더 이상 머저리들의 헛소리를 들어주기엔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서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인피면구’가 해제됩니다.]

“너, 넌…?”

쿠마르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당연히 진혁이라 생각했던 인물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안 됐지만 그 거머리 같은 고인물은 이 자리에 없다.”

천유성이 얼굴에 붙은 껍데기를 툭툭 털어냈다.

모든 시선을 이쪽에 집중시킨 뒤, 상대의 킹을 잡는 것.

그것이 진혁이 계획한 노림수였다.

***

띵…띵… 띵!

고속으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최하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며 진혁이 협회의 최심부에 입장했다.

‘조용하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인원은 내부가 아닌 밖에 배치해뒀다.

방어에 신경 쓸 만큼 여유가 있을 리 없을 테니까.

[‘고유마력 체인지 캔디’의 발동시간이 다했습니다.]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3가지 아이템 중 하나.

‘인피면구’로는 외형을 바꾸는 게 고작이었지만, 이 사탕을 복용할 경우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마력파장까지 바꿀 수 있다.

덕분에 완벽하게 천유성을 대역으로 내세울 수 있었고.

“그래서….”

진혁이 스크린으로 가득 찬 내부에 서 있는 인물을 천천히 훑었다.

“내 초상권을 세게 갔다가 쓰고 있다는 놈이 바로 너야?”

가면을 쓴 채 폼이란 폼은 다 잡고 있는 플레이어.

드디어 그 망할 놈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거 참… 거래불가 품목 중에 있는 아이템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이건 한 방 먹었군요. 당신이 결국 이곳까지 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반쯤 시체에 가까운 몰골일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멀쩡한 모습이 아니라요.”

언노운의 가면이 격하게 들썩였다.

저건 아마 웃고 있는 거겠지.

“팔팔해서 미안하게 됐어. 이쪽도 궁금한 게 많으니까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하지 말자고.”

“호오. 마치 일대일 상황만 만들 수 있으면 다 이겼다는 것마냥 말씀하시는군요.”

파츠츠…!

언노운의 주위로 붉은 마력이 일어났다.

흉흉하면서 불길한 마력이다.

그동안 탑을 오르면서 마주했던 그 어떤 거주자나 신격들하고도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그러나. 진혁은 바늘처럼 예리한 살기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다.

“왜, 아닐 것 같아?”

싸늘하게 식어버린 음성.

일방적인 장단에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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