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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617화 (618/653)

617화. 선봉전(先鋒戰) (2)

루드라가 쓰러지고 가루다가 도망간 시점에서 선봉전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당연히 승자가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찜찜한 뒷맛이 혀 속까지 스며들었으니까.

“우리가 끝낼 수 있었다.”

“……한 방 싸움이었어.”

헤라클레스와 토르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정정당당한 승부에 제3자가 개입한 데다, 충분히 승리할 가능성이 보였기에 더욱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이건 개개인의 명예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탑의 모든 운명을 뒤바꿔버릴 수 있을 만한 승부.

그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허! 이게 뭐 저 하나 좋자고 그러는 겁니까? 저라고 좋아서 악역을 도맡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냐고요.”

진혁이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다 모두를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대를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려고 노력하는데, 여러분들도 조금씩은 자신의 명예를 내려놔야 형평성에 맞지 않을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대를 조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철저하게 심리적인 면을 파고들고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게 핵심이다.

물론.

“그리고 일이 다 잘 풀리면 제가 다른 신격들보다 라그나로크와 올림포스에게 가장 먼저 왕관 제조법을 알려드릴 생각입니다. 이렇게나 가장 앞에서 고생하시는데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거기에 적절한 보상까지 뒤따른다면 효과는 배가 된다.

“정, 정말인가?”

“우리를 우선 순위로 해준다고?”

두 대영웅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도장 1개씩 찍어드리고 최우선으로 고려하겠습니다.”

“……크흠! 흠!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어쩔 수 없군.”

“그래. 이미 끝난 일이기도 하고. 절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대가 세계를 염려하는 데 감동해서 동의해주는 것뿐이야.”

이렇게 신화 속 존재들이 세태와 야합했다.

⁕⁕⁕

뿌드득….

“저, 저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 같으니라고.”

“설마, 루드라 님이 당할 줄이야.”

“지금 대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아는 거냐 네놈!”

콰앙!

여기저기서 분노가 터져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화 간에 전쟁 때마다 해온 숭고한 의식. 선봉전은 단순히 승부를 내는 것 이상으로 의미가 있었다.

특히 브라흐마의 표정은 꽤나 볼 만하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당장 죽여 버리겠습니다!”

가네샤가 양 발을 굴렀다.

지면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하지만.

“기다려라.”

브라흐마는 진혁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분노로 속이 활활 타고 있지만, 애써 삼키며 차분하게 전략을 재구상했다.

루드라가 죽은 것은 큰 손해인 건 사실이다.

허나, 전체적으로 보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손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중앙군은 상태를 지켜보고 우익을 펼쳐 적의 측면을 공격해라.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이후에 대응을 지시하겠다.”

연합의 우측은 에덴과 마계가 주를 이룬 곳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여전히 서로에게 깊은 앙금이 남아 있는 불완전한 동맹.

그곳을 날카롭게 찌른다면 분명 허점을 보일 것이다.

“후후. 알겠습니다. 그 역할은 제가 맡도록 하죠.”

작은 체구의 소녀가 구름에 올라탔다.

선봉은 인드라와 그녀를 따르는 10만의 뇌신병.

전원이 요술을 익힌 마법 병단이었다.

[인드라가 Lv??? ‘뇌운질주(雷雲疾走)’를 발동합니다!]

작은 번개들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아주 매콤한 맛을 보여드리겠어요.”

뇌신병들의 장기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원거리 공격.

거기에 환수들로 구성된 탱커진형은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온다!”

매섭게 파고드는 공격에 베리엘이 고함을 질렀다.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르다.

“다들 신성력을 발현시켜라!”

가브리엘도 질세라 서둘러 천사들을 독려했다.

각종 신성력이 눈부신 광휘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악수로 작용했다.

“크아악! 이 빌어먹을 닭대가리들이 어디서 더러운 냄새 풍겨대는 거냐?”

“눈이 안 보이잖아. 젠장할!”

마족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그들에게 있어 신성력은 완전한 상극.

천사들에겐 버프를 걸어주는 것일지 몰라도 이쪽으로선 고통 속에서 싸워야 하는 저주받은 빛에 불과하다.

“하여간 지옥에서 온 놈들은 불평불만만 많군요.”

“누가 누구보고 더럽다고 하는 건지. 쯧.”

천사들 역시 마족들에 대한 적대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신경전이 일어났다.

“예상대로군.”

그 틈을 놓칠 인드라가 아니었다.

기묘하게 생긴 벼락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마족들과 천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파치칙…!

“크아아악!”

“아아악!”

인드라의 번개에 적중한 자들은 피부가 타들어가는 대신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밀집대형을 유지하고 있던 탓에 피해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1열이 무너지면서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크오오오!”

거대한 환수들이 그 틈을 넓히기 위해 투입됐다.

크기만 해도 10m에 이르는 대형종.

덩치와 무게에서 나오는 파괴력은 일전의 중갑기병들을 뛰어넘었다.

콰콰콰콰쾅!

콰아앙!

전투 해머가 미친 듯이 허공을 가로질렀고. 각종 마법들이 천사들의 날개를 꺾어버렸다.

순조롭게 무너지는 진형.

“크하하! 역시 조잡한 군대는 단결력이라는 게 아예 없군.”

전투를 지켜보던 가네샤가 광소를 터뜨렸다.

“고작 저 정도 공격으로 허둥지둥대는 꼴이라니. 이번 싸움은 안 봐도 뻔하겠네요.”

칼리 역시 키득거리며 죽어나가는 적들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마찬가지로 전투를 지켜보던 브라흐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명, 허를 찌른 것은 사실이다.

허나 진형이 무너지는 속도와 타이밍이 지나치게 빨랐다.

아무리 반목이 있었다고 한들 이 정도로는….

“멈춰라!”

브라흐마가 다급히 소리친 바로 그때.

거침없이 파고들던 인드라의 병사들 사이에 이변이 생겼다.

꿀렁하고.

지면을 밟는 느낌이 달라졌다.

“뭐야?”

“이건…?”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엔 이미 모든 게 달라졌다.

[오시리스가 고유 성창 ‘대사막의 진노’를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쿠!

딛고 있던 지면이 모조리 모래로 변하더니 이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이 전신이 집어삼켰다.

엄청난 열기는 숨을 쉬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커억…켁…케엑….”

“끄르…륵….”

워낙에 깊숙이 들어온 터라 빠져나갈 수도 없는 상황.

인드라의 부대가 완전히 사막 한복판에 갇힌 꼴이 되었다.

[아누비스가 고유 성창 ‘죽은 자들의 군대’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그 정면으로. 수많은 쟈칼의 병사들이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렸다.

“그러게 남의 집 안방을 제 집마냥 들어오면 쓰나?”

진혁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제는 건방진 놈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해줄 시간이다.

⁕⁕⁕

같은 시각.

심상 세계 밖에 있는 현대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크아아악!”

“으아악!”

검은 이리들과 뱀파이어들이 한 자리에서 뒤엉켰다.

피와 살이 튀기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

전투가 길어질수록 양측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젠장. 뭐 이리 지독한 놈들이 다 있어?”

오필리아가 질렸다는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비교적 검은 이리들과의 전투가 적었던 데카서스 가는 검은 이리들이 얼마나 호전적인지 알지 못 했다.

반면, 가장 최전방에서 검은 이리들과 영역 분쟁을 했던 아타락시아의 혈족들은 이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차분하게 진형을 유지했다.

“성가시긴 하군요. 아무래도 락타크를 죽이지 않는 이상 이 기세를 꺾긴 힘들 것 같습니다.”

벨루스가 무미건조한 얼굴로 얼굴에 묻은 피를 훔쳤다.

가장 오랫동안 싸워왔음에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겠지.”

엘리스가 벨루스를 잠시 동안 바라봤다.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내부의 적.

왜 이토록 조용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는지. 목적과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곁에 두고 지켜보고 있었건만….

벨루스는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묵묵히 아타락시아의 혈족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벨루스가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락타크를 제거해야지만 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문제는 저 여우 같은 늑대놈이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혈족들 사이로 몸을 피하며 장기전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계속해서 불어나는 게이트 특성상, 시간만 끌면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고유 성창 ‘개벽의 계시록’ - ‘갈망의 화살’을 소환합니다!]

꽈드드드득….

핏방울들이 수백 겹으로 꼬이며 2m 크기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각종 고대 룬어들이 맹렬하게 빛나며 화살에 마력을 더했다.

“길을 열겠다.”

“예. 로드시여.”

“로드를 따라라!”

엘리스가 모든 마력을 한 점에 모았다.

그리고 한순간에 폭발시켰다.

콰콰콰콰콰콰!

붉은 혈풍이 검은 이리들 사이를 후벼팠다.

화살이 주위에 있는 늑대들의 피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반경 10m 이내에 있는 적들을 포식하는 특성상,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발생시켰다.

“가, 가까이 하지 마라!”

“거리를 벌리고 공격해라! 말려들지 말란 말이다!”

터무니없는 위력의 공격에 검은 이리들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락타크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그런데.

[심연의 마법 - ‘에테르 스트라이크’가 발동됩니다!]

퍼어엉!

거침없이 뻗어나가던 화살이 무언가에 격추당했다.

빙그르르하고.

화살이 방향을 틀어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이런 거엔 근접형보다는 원거리가 제격이지.”

대형 길드의 랭커들을 궤멸시킨 아페르망이 엘프들을 이끌고 전장에 합류했다. 절반 가량은 이태민의 드론들과 싸우고 있었지만, 애초에 이태민 혼자서 이 모든 적들을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너희들도 인간들을 끝장내려고 온 건가?”

락타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근사한 보상이 걸렸는데 어찌 마다하겠나? 온갖 금은보화니 뭐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는 점이다.”

“하긴, 저 토굴 속에서 사는 것도 지겹긴 했지. 모처럼의 달밤이 이토록 달콤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아페르망과 락타크가 천천히 자신들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점점 더 성가시게 되네요.”

“더 늦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우리 쪽이니.”

테레사와 천유성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짰다.

체력과 마력이 고갈되어가는 지금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였다.

그나마 아직까진 고유 능력을 발동시킬 여력이 남아 있었으니까.

신중하게 한 방을 준비한다면 아직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있으리라.

하지만.

모래 시계를 박살내 버릴 수 있는 변수가 발생했다.

“흐음.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아페르망이 예술의 전당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푸르게 빛나는 동공.

대마도사의 예리한 감각이 무언가를 포착했다.

[‘심상세계로 가는 틈’을 발견했습니다.]

브라흐마가 일부러 열어둔 심상세계의 백도어.

그 희미한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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