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고인물이 거대 세력을 무너뜨리는 법 (3)
우우웅!
화면 속엔 브라흐마가 요수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정확히 말하면, 앞뒤를 적절하게 잘라낸 뒤 천세가 요수들을 공격하는 장면만을 따로 편집해 만들어둔 영상이었다.
‘악마의 편집이라고 들어나 봤을까?’
들어보긴 개뿔.
고고하고 자존심 센 놈들이 어디서 이런 장난질을 경험해본 적 있겠는가?
더군다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영상은 BJ 생활을 하며 단련한 노하우와 센스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단연코 아수라나 나머지 요수들이 위화감을 찾아낼 수 없을 거라는 소리다.
실제로 아수라와 라뭉크를 비롯한 수많은 요수들은 멍하니 영상에 나오는 비극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크으으….”
“으어어….”
무언가에 홀린 듯 텅 빈 동공.
완전히 세뇌가 되어버린 동족들이 처참하게 죽는 영상은 그야말로 말문이 턱하고 막히게 만들었다.
물론, 거기엔 진혁이 적절하게 비장하고 슬픈 BGM을 넣었고. 각종 특수 효과까지 넣은 게 한몫했다.
“이…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같으니….”
아수라의 몸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흉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걸…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적과 싸우던 도중에 우연히 손에 넣은 정보야. 당신도 알다시피 천세 쪽이 승기를 잡았고 우리는 패배하기 직전의 상황이니까. 그 다음을 생각한다면 요수들을 제거하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한 거겠지.”
천세와 아수라는 본디 적대관계.
언노운과 태초의 존재들 때문에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것이지. 좋아서 서로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비열한 놈을 믿은 내가 잘못이구나….”
처음부터 함께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적보다 더 위험한 놈에게 등을 맡긴 꼴이었으니까.
후회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깊숙이 협곡 안까지 파고든 데다, 주력 부대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이상 모든 준비를 끝낸 천세를 당해낼 순 없었기 때문이다.
독안에 든 생쥐.
자신들의 꼴을 표현하는데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으리라.
하지만.
아수라의 시선이 진혁에게 향했다.
“선의로 이런 정보를 알려주러 왔을 것 같진 않고… 굳이 우리를 도우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
확고한 목적의식이 느껴지는 행동패턴.
거기엔 자신에게 접근해야만 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었다.
진혁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누군가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받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영상이 이어서 재생됩니다.]
BJ시절부터 회사의 이익을 위해 개같이 구르기만 하던 삶과 탑에 온 이후 수많은 종족들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한 장면들이 재생되어왔다.
그곳엔 서리 칼날 부족의 카라칼과 가주들에게 배신당한 엘리스. 대의를 위해 자신들을 버린 테레사와 제물로서 살아온 안드리아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었다.
“우린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자들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집단이야.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명예와 긍지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 살아가는 게 목적이지.”
우수에 젖은 눈빛에선 지난 날에 겪어온 수많은 감정들이 묻어나왔다.
적어도 아수라가 보기엔 그래 보였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군.”
“꽤나 험난하긴 했어.”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경고를 해주려 했다는 것이냐?”
“누군가에게 절대로 굽히지 않는 성격. 요수들이 천세에게 핍박받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잖아? 거울을 마주 본 것처럼 너희에게서 우리 모습이 투영되었을 뿐이야. 적어도…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걸 또 다시 보고 싶진 않았거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가장 큰 신뢰를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그건 바로 가장 큰 시련이 닥쳤을 때. 모두가 자신들을 배신하고 목에 칼날을 들이밀 때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가장 공허함을 느끼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옆에서 고통을 공감해주며 함께 해줄 것을 표현하기만 하면 되지.
특히나 앙숙 관계가 오래되고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개연성이 뒷받침되기만 한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될 수밖에 없다.
[Lv49 ‘교감’이 발동됩니다.]
박하나를 통해 복사한 능력.
첫 번째로 시련의 탑에서 얻은 스킬이자, 수많은 이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비장의 카드다.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연기력에 얼음장 같던 아수라마저 감정이 흔들렸다.
“너희와 손을 잡고 천세와 싸우자는 건가?”
“당하기 전에 쳐야 한다는 거야. 사냥이 끝난 사냥개는 삶아져서 죽는 운명이지만, 사냥이 끝나기 전까진 반드시 사냥개가 필요한 법이거든.”
요수들이 먼저 천세를 공격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거다.
애초에 천세는 이번 전쟁이 끝나더라도 아수라를 칠 계획 자체가 없었으니까.
물론, 그걸 아는 건 이곳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확실히… 우리 둘이 동맹을 맺으면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긴 하겠군.”
아수라가 턱을 쓰다듬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기에.
“계획을 말해봐라.”
압도적인 천세의 내부에 거대한 불화가 일어났다.
***
전쟁이 시작된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대규모 병력이 맞붙은 것치곤 아직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양 세력 모두 워낙 격렬하게 싸워댄 탓에 엄청난 혈투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전쟁에 있어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형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병력 간의 차이도 차이었지만, 천세의 전술이 워낙에 뛰어났던 탓이다.
브라흐마는 협곡의 스물일곱 지역에서 벌어진 중소규모 국지전에서 모두 대승을 거두었고 그 사이에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그리고 로키가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현재. 브라흐마가 이끄는 본대는 가장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에덴을 공격하고 있었다.
콰르르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성벽.
가브리엘이 펼쳐둔 성역 ‘시온’이 브라흐마에 의해 무로 되돌아갔다.
“……어이가 없는 능력이군요.”
가브리엘이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멸’을 관장하는 왼팔과 '창조'를 관장하는 오른 팔.
브라흐마의 고유성창이 45층 전체에 흐르는 마력과 결합하자,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법 단단한 성이었다. 대천사들이 홀로 군대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
대군 능력으로는 최상급.
아무것도 없는 적지에서 자신들의 성역을 구축할 수 있는 권능은 사기적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6개의 날개를 완전히 펼 수 있는 에덴이 아니라면 신의 권능마저 빛을 바라게 된다.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우리의 목적은 강진혁. 굳이 에덴과는 적대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그대 입장에서도 집안 싸움에 더욱 집중할 때가 아닌가?”
우리엘이 이끄는 반군들은 여전히 에덴을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런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만에 하나 가브리엘이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한다면 균형이 확 무너질 터.
브라흐마는 바로 가장 중요한 본질을 파고들었다.
가브리엘과 에덴에서 온 천사들이 순순히 포기하길 바라면서.
[가브리엘이 ‘정화의 창’을 소환합니다!]
화르륵!
신성한 불길이 새하얀 창에 깃들었다.
적의 영혼마저 불살라버리는 화염이 새벽을 밝히자, 브라흐마 곁에 있던 신수들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크으으….”
“크아아아!”
보는 것만으로도 안구 속 물기가 모조리 증발해버리는 것만 같다.
그 정도로 가브리엘이 뿜어내는 신성력은 격이 달랐다.
“안 됐지만, 강진혁 그 인간은 앞으로 저에게 100년을 기도만 하는 삶을 살게 만들었어요.”
지금까지 열심히 새벽 기도를 한 보람을 0으로 만든 대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앞으로 1,00년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그 대가를 받아낼 작정입니다.”
“항복할 생각은 없다… 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브라흐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결론은 하나다.
우우우웅!
황금빛과 검은빛이 뒤섞이며 소멸을 관장하는 왼팔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빛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동시에.
콰아아아앙!
가브리엘의 창이 음속을 돌파해 뻗어나갔다.
창조나 소멸이 터무니없는 능력이긴 하나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약점이 있을 터. 손에만 닿지 않는다면 승산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속도로 승부를 한다.’
두 쌍의 날개에서 나오는 가속력이 정화의 창의 위력을 몇 배나 극대화했다.
그런데 창이 심장에 닿기 직전,
브라흐마의 눈에 연꽃 문양의 '신안(神眼)'이 개안했다.
[특수 스킬 ‘1초의 예지’가 발동됩니다!]
초단기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브라흐마의 눈은 창의 궤도와 목표까지 꿰뚫어봤다.
콰콰콰콰콰콰… 투콰아앙!
창이 그대로 튕겨나갔다.
“그대들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신성력과 만다라… 누가 우위일지를 말이다.”
브라흐마의 손이 가브리엘의 흉갑에 닿았다.
오싹!
위험하다는 본능이 최고조의 경고를 보내온 순간.
빛무리들이 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더니, 이내 폭풍이 되어 뻗어나갔다.
***
치이익!
지면을 따라 솟구치는 열기.
무시무시한 소멸의 빛이 휩쓴 곳엔 더 이상 신성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게 적당히 자기 집안이나 신경 쓰라니까, 괜히 오지랖을 부리니 이 꼴이 난 거 아니냐.”
브라흐마가 귀찮은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가브리엘에게 다가갔다.
마지막 일격을 가해 숨통을 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쿠쿠쿠쿠쿠!
또 다시 왼손이 두 가지 빛으로 물들었다.
한 줌의 신성력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 또 다시 공격을 당한다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웅!
[게이트가 소환됩니다!]
녹색 게이트가 나타나며 그 속에서 헤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입니다.”
헤임달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시계방향으로 회전시켰다. 은하수 같은 물결이 가브리엘을 부드럽게 감쌌다.
“죽여라! 반드시 지금 처리해야 한다!”
연합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 최상급 공간 왜곡 결계를 펼쳐둬도 미꾸라지처럼 틈을 찾아내는 헤임달은 이후에도 성가신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퍼퍼퍼펑!
각종 마법과 신화급 주술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헤임달이 고유능력 ‘라이트 오브 아스가르드’를 발동합니다!]
허나, 무지개로 만든 빛이 이어지는 게 한 템포 더 빨랐다.
“빌어먹을!”
“쳇!”
주신 라트리와 우샤스가 혀를 찼다.
폐허가 된 땅에 가브리엘과 헤임달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요 거점을 무너뜨린 건 분명 나쁘지 않은 성과였지만, 가장 중요한 가브리엘을 놓치다니.
이래서야 제대로 된 승리를 거뒀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불의 화신인 아그니가 한 마디를 내뱉기 전까진.
“방금 전 헤임달이 나왔던 장소. 알고 있는 곳입니다.”
아그니가 게이트 너머에서 본 지형과 지물을 되새겼다.
차원과 차원이 연결되면서 가브리엘을 구할 순 있었지만, 대신 자신들이 있던 곳의 위치가 들통나버린 것이다.
‘이슈쿠라 늪지’.
수많은 늪지 마수들이 군락을 이루어 사는 곳이다.
천세가 방치하다시피 한 장소였기에 그곳의 생태계가 현재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주신들조차도 알지 못했다.
저런 곳에 본진을 만들어놨으니….
……당연히 본진의 위치를 찾아내기가 그토록 힘들었던 거겠지.
하지만 아그니의 눈썰미 덕에 지긋지긋한 술래잡기를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