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만렙 뉴비-624화 (625/653)

624화. 고인물이 거대 세력을 무너뜨리는 법 (4)

헤임달의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상황이 또 한 번 뒤집어졌다.

이슈쿠라 늪지는 몸을 숨기기에는 용이하지만, 위치가 들킨다면 그 만큼 탈출구가 없는 지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을 구하려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비밀을 들키다니."

"우리로서는 오히려 기회인 셈이었군요."

"크하하하!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끝나겠군. 하여간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니까."

신격들 사이에서 조소가 터져나왔다.

이제는 넓게 펼쳐둔 결계와 각종 주술들을 이슈쿠라 늪지 쪽에만 집중한 뒤, 천천히 몰이사냥을 하며 상대의 숨통을 조이기만 하면 된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상황이었기에 주위는 온통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일부러… 보여줬을 수도 있지."

브라흐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리 이곳이 에덴이 아니더라도 대천사인 가브리엘이 일격에 쓰러진다는 것도 무언가 이상했다.

오래 전 싸웠던 경험으로는 대천사들이 이 정도로 약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저기로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했다고 가정해야 한다.

'계속된 패배도 고의성이 섞여 있다고 봐야겠군.'

늪지 쪽에 함정을 파뒀다고 보긴 어렵다.

전 병력을 매복한다고 하더라도 병력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으니까.

몇 배 수준이면 몰라도 수천 배의 차이를 전략이나 전술로서 메울 순 없겠지.

결국 상대가 노리고 있는 부분은 전혀 다른 곳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동료들을 구하려하는 건가.’

소수정예로도 거대 신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저력. 그 깊은 원천에는 바로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조력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걸 통해 다시 한 번 변수를 만들려하는 게 틀림 없으리라.

설마 제 아무리 정보력이 괴물 같은 놈이라고 해도 사원에 있는 또 다른 걸 알고 있진 않을 테니까.

"인드라."

브라흐마가 사원에 남겨진 주신을 향해 말을 걸었다.

⁕⁕⁕

“더럽게 넓군.”

천유성이 사원 내부를 헤매다 혀를 찼다.

벌써 이곳에 잡혀온 지 반나절이 훌쩍 넘었지만, 사원의 전체 규모를 파악하지 못 했다.

얽히고설킨 미로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1분1초라도 빠르게 적의 잔여 병력을 제거하고 거점을 점거해야 할 터. 하지만, 마주치는 것들은 잡졸들 뿐.

주신이나 신수종에 해당하는 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사원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수정의 방’ 역시 위치를 찾지 못했다.

“페시스 씨가 이때 있었더라면 훨씬 쉬었을 텐데요.”

테레사도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라도 제 드론을 믿고 가는 게 어떨까요?”

“그래요. 아직 안 늦었으니….”

마지막으로 이태민과 유연화마저 애걸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사실 이렇게 헤매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사원이 넓다고한들 유적이나 미궁 공략 경험이 풍부한 이 멤버가 미아가 된다는 건 어불성설.

헌데도 이토록 조난당해 있는 건….

“이쪽이 틀림없느니라. 짐의 위대한 감각이 그리 말하고 있다.”

가장 선두에서 일행들을 이끌고 있는 위대한 아타락시아의 가주 엘리스 때문이었다.

방향감각이 0에 가까운 길치인 주제에 절대 자기가 틀렸다는 건 죽어도 인정하지 않아 이 사단이 나게 된 것이다.

엘리스가 꿋꿋하게 자기 주장을 펼쳤다.

킁킁거리는 코를 보니 피의 잔향을 추격하고 있는 중인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무슨 근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냄새가 난다. 분명 기분 나쁜 향냄새가 섞인 피 냄새가.”

엘리스가 코너에 코너를 돌고돌았을 때였다.

우우웅!

난데없이 묘한 마력과 함께 거대한 수정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힘든 뜻 밖에 위치다.

“세상에나….”

“진짜로 찾은 거예요?”

나머지 멤버들도 깜짝 놀라 외쳤다.

“엣헴! 그래서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이 기가막힌 감각만 믿는다면 된다고!”

엘리스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쾅!

“아악!”

엘리스의 이마가 투명한 벽에 부딪쳤다.

마치 무언가에 막힌 듯 보이지 않는 결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

두 눈에는 눈물까지 찔끔 맺혔다.

“감히 짐의 길을 막다니….”

[‘블러드 스피어즈’가 발동됩니다!]

혈액으로 만든 붉은 꼬챙이들이 즉시 결계를 강타했다.

하지만.

콰콰콰콰쾅!

마력을 잔뜩 실은 공격에도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법이 안된다면….”

유연화의 발에 강한 마력이 응집되었다.

‘뒤차기’.

태권도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발차기가 작렬했다.

묵직한 충격이 결계의 표면을 따라 퍼져나갔다.

“뭐라도 해봐야겠네요.”

“튼튼하게 지어졌으니 무너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죠?”

카가각!

테레사의 성호와 신성력이 담긴 검이 쇄도했고. 이태민의 드론들이 마력 미사일을 발사했다.

퍼퍼펑! 퍼어엉!

눈부신 광휘와 폭발들이 통로를 가득 메웠다.

사원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투명한 벽은 여전히 건재했고. 그 흔한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무슨 이런 벽이….”

“여길 통과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요.”

“감시하는 병력이 없어서 왜 그런가 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그야 말로 철벽.

어째서 그 흔한 보초 한 명이 없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온갖 종류의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단순히 데미지를 가해 부수는 구조가 아닌 듯 싶었다.

바로 그 순간.

[게이트가 열립니다.]

모두의 앞에 아주 익숙한 인물이 나타났다.

“어라? 왜 다들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얼굴을 갸우뚱거리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로 진혁이었다.

“형!”

“오빠!”

“계약자!”

“진혁 씨!”

헤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반가운 마음이 몇 배나 더 컸다.

딱 하나.

“쳇! 뒈지지도 않고 기어이 살아서 왔군.”

만사가 불만인 천유성을 제외하곤.

하여간 저 녀석은 지옥에서 만나도 물고 씹어댈 놈이다. 매사에 저리 독기를 드러내면서 어떻게 살아가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싸움은 어쩌고 이곳에 온 것이냐?”

“적당히 함정을 파고 적들을 유인했지. 물론, 최대한 빨리 돌아가긴 해야 해. 저쪽에서 미끼 역할을 해주는 친구들 상황이 별로 좋지 않거든.”

헤임달을 통해 보여준 이슈쿠라 늪지.

브라흐마가 조금 수상하게 생각하긴 할 테지만, 결국엔 미끼를 물 것이다.

그 전까지 이곳에서의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합류하지 않는다면 연합은 전멸할 수밖에 없을 터.

다시 말해.

지금부터는 누가 먼저 상대의 뒤통수를 치느냐의 싸움이다.

“그럼, 우리들은 저쪽에서 최대한 버티고 있겠다. 올 때는 굳이 내가 게이트를 열어주지 않더라도 그대와 그대 동료들이 알아서 오는 거겠지?”

“근사한 차 한 대 뽑아서 갈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소린진 모르겠다만… 그대가 그렇다면 괜찮은 거겠지. 알겠다.”

게이트를 열어준 헤임달이 몸을 돌렸다.

헤임달이 사라지자 진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도 수정의 방은 용케 찾았네?”

“전부 짐이 활약한 덕분이지. 헌데, 어째서인지 아무리 애써봐도 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구나.”

“어지간한 걸로는 이걸 깰 수 없어. 원거리 마법공격은 당연히 안 되고 극도로 정제된 순수한 검강으로만 벨 수 있거든. 잠시 비켜 봐.”

‘검의 무덤’과 ‘천마신공’이 펼쳐지며 단검에 실낱 같이 예리한 기운이 깃들었다.

빠르고 간별하게.

한 번의 검격으로 베어버리는 게 핵심이다.

서걱!

진혁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런데.

“……!?”

칼날이 지나간 곳에 가느다란 붉은 선이 남았을 뿐. 이번에도 드라마틱하게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다.

“이, 이상하네. 이게 왜 이러지?”

진혁의 얼굴에서 식은 땀이 주르륵 흘렀다.

상당히 당황했는지 손가락까지 가늘게 떨렸다.

“하, 역시… 매일 수련은 안하고 놀고 먹기나 하더니 실력이 퇴화했나보군.”

천유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동시에 진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구경이나 해라. 그동안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여주지.”

파츠츠…!

[고유성창 ‘백야(白夜)’가 발동됩니다!]

[혼신일체 ‘추혼사영의 검’이 구현됩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저걸 베어버리고….

강진혁을 넘겠다.

언제까지나 현실에 안주하는 능글맞은 고인물의 그림자를 따라갈 생각따윈 없단 말이다.

숨 소리 마저 사라진 공간 속. 천유성이 극한까지 압축시킨 검격을 폭사했다.

카카가각!

사원전체가 쪼개질 듯한 일검.

물론.

용을 써봤자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다.

“풉!”

진혁이 실소를 참는데 실패했다.

“큭!”

천유성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야 천하의 우리 검성도 나랑 똑같구나. 새벽마다 수련한다고 난리 부르스를 추더니 연습장이 아니라 pc방을 갔나봐?”

“닥쳐라! 내가 안 될 리가 없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하면…!”

콰콰콰콱! 카가가각!

검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더 이상 뒤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천유성이 용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날 해봐라. 저기에 금이라도 가나.’

검강은 개뿔.

애초에 이건 마법이나 물리 공격에 내성이 있는 특수 결계다.

침입자가 이걸 부수기 위해 마력을 쏟아부을수록 그 마력을 흡수해 자신의 에너지로 삼아버리는 특성이 있는.

그렇기에 최대한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적절한 호구 한 명이 곁에 있어준 덕에 일이 수월하게 풀리게 됐다.

그로부터 몇 분이나 흘렀을까?

쿠웅!

천유성이 그 자리에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짧은 시간 수천 번 검을 휘두르며 몸 안에 남아 있던 마력과 체력을 모두 소진해버린 탓이다.

“허억…. 허억…. 허억.”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만 같이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마력이 모였겠지.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진혁이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룰루랄라.

태연하게 콧노래를 부르는 건 덤이다.

[고유능력 ‘고대 결계’가 발동됩니다!]

이미 경지에 오른 결계술은 난해하게 펼쳐진 수십 겹의 결계들을 너무나 가볍게 파훼했다.

“너… 너…!”

천유성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핏줄이 툭툭 튀어나온 눈은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즉시 베어버렸을 기세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세가 흉흉하면 뭐하겠나?

이미 게임은 끝나버렸는데.

“네 고귀한 희생. 잊지 않을게.”

진혁이 수정구 앞에 섰다.

굳이 이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서 이곳에 온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쓸 만해 보이는 거점 중 하나.

그러나 이 사원에는 천세의 최상위 주신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었다.

툭.

손가락을 수정구에 갖다댄 뒤, 복잡한 고대 룬어들의 위치를 재배열하자.

[저장된 데미지가 모두 마력으로 치환됩니다.]

[공중요새 ’비마나‘가 기동합니다!]

잠들어있던 공중요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세가 보유한 최강의 성유물 중 하나.

이제부터가 적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시간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