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공중요새 ‘비마나’ (2)
배신.
태고의 존재들이 운영자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날렸다.
언노운에게 가는 대량의 영혼과 원념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힘을 모은 태고의 존재들은 즉각 운영자들이 있는 심장부를 노렸다.
콰콰콰콰콰콰쾅!
거대한 촉수가 꿈틀거리더니 언노운이 있는 곳을 덮쳤다.
보라색 물결이 범람했고. 그로 인해 생겨난 마력의 폭풍이 거대한 공간을 가득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메에에에!"
"크오오오!"
아웃브레이크 당시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슈브니구라스의 사도들이 촉수가 뚫은 구멍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울 셈인가!"
JJ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함했다.
"지금 우선 순위가 뭔지도 모르고…!"
2닭과 나머지 운영자들도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아직까지 탑에 공개된 적 없는 성유물들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냈다.
"후후. 이빨부터 드러내는 걸 보니 언노운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나 보군요."
슈브니구라스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옆으로 툴차를 비롯해 크툴루의 축을 담당하는 다양한 신들이 도열했다.
"니알라토텝! 이건 그 분을 배신하겠다는 뜻이냐?"
"그 남자가 요구한 건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수족을 찢어버리는 것과 엘리스의 확보. 두 개입니다. 그 목적만 달성할 수 있으면 중간 과정 따위야 아무 의미가 없죠. 그런 걸 신경쓰는 성격도 아니고요."
오롯이 본인의 흥미와 재미를 추구하는 성향에 '동료'라는 개념은 끼어 있지 않았다.
설령 운영자들이 모두 죽더라도 남자에겐 일말의 동요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니알라토텝은 정확히 그런 남자의 성격을 읽었다.
"원하는… 게 뭐냐? 무슨 목적으로 우리 목에 칼을 들이민 거지?"
"간단합니다. 사실 당신들 수중에 저희로서는 꽤나 골치 아픈 게 있거든요. 그게 뭔지는 알고 계시죠?"
네크로노미콘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단서.
유일무이하게 태고의 존재들을 위협할 수 있는 파편 조각은. 운영자들이 통제불능한 괴물들의 목에 채운 유일한 목줄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템이 운영자들에게 있다는 건 최상위 기밀이었을 텐데.
"……거절한다면?"
"당신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 겁니다."
니알라토텝이 가볍게 지팡이를 내리쳤다.
투웅!
['마주치지 못하는 심연'이 깨어납니다!]
쩌억하고.
지면을 따라 수백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눈이 나타났다.
[특수효과로 인해. 이 필드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정신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지속적으로 입게 됩니다!]
[마력을 사용할수록 체내에 극독이 쌓이게 됩니다.]
탑 전체에 뿔뿔이 흩어져 전력이 반감된 지금.
운영자들은 최악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
같은 시각.
시련의 탑 45층에서는 여러 거대 세력의 운명을 건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파치칙…!
격돌하는 스파크.
서로 다른 번개의 자존심이 한 공간에서 충돌했다.
“절대로 살려보내지 않겠다.”
인드라가 구름에서 뿜어진 번개들을 한꺼번에 끌어모았다.
무시무시한 벼락이 요동치며 하늘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조각 구름에 올라탄 인드라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비마나의 방어스킬들이 발동됩니다!]
['무한의 융단'이 펼쳐집니다!]
철컹! 철컥!
수많은 포탑들에서 불이 뿜어졌고. 1성부터 10성에 이르는 결계들이 빼곡이 요새 주위를 감쌌다.
수많은 세력과 거점들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이동 요새. 그 명성에 걸맞게 요새 전체에서 뿜어지는 마탄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어림없다!"
부우웅!
작은 체구에 작은 구름.
속도에 특화된 인드라는 번개를 동반한 채 그 모든 공격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마치 이 요새의 공격 패턴을 알고 있다고 말하듯이.
‘확실히 효과가 빵빵하긴 하네.’
인드라에게 있어 제우스라는 자극제는 넣는 족족 결과가 나오는 즉효약인 셈이다.
지금도 얼마든지 도발할 수 있긴 하지만, 가장 높은 등급의 스킬을 뽑아먹기 위해선 조금 더 질질 끌어야 한다.
천세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를 뿌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기도 했고.
"어떻게 할 거냐 계약자."
"으음. 잠깐만 알아서 좀 싸워줄 수 있을까? 준비해야 할 게 좀 있거든."
"또 무슨 엉뚱한 짓을 꾸미려고? 그래도 명색이 업을 쌓아온 강자인데 그에 맞는 싸움을 하거라."
진혁의 평소 전투방식을 잘 알고 있는 엘리스가 측은한 눈으로 인드라를 바라봤다.
육체적으로 다치는 것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박살이 날 걸 생각하니 괜한 동정심이 드는 모양이다.
"엉뚱하다니. 난 항상 진지하게 싸우는 거 몰라?"
"퍽이나 그렇겠구나. 하여튼 알겠다. 이 커다라기만 한 요새 방어는 우리끼리 하도록 하지."
"고마워."
복사조건에 있는 걸 정확하게 달성하기 위해선 약간의 보조도구들이 필요할 터.
진혁이 코인거래소에서 주섬주섬 몇몇 옷가지 등을 구매했다.
그러는 사이.
콰콰콰쾅!
투콰앙!
비마나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인드라의 추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세졌다.
요새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
"들러붙지 못하게 할게요!"
이태민이 수천 기에 이르는 드론들을 소환했다.
[이태민이 고유성창 '라스트 마이스터'를 발동합니다!]
공대공 유도 미사일들이 인드라를 노렸다.
퍼퍼퍼펑!
핵폭탄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열압축탄. 폭발 지역을 진공상태로 만들어 피해를 극대화하는 효과는 주신의 방어력까지 깎아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요새 주위가 폭염과 연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테레사와 유연화가 움직였다.
[테레사가 '별들의 부름'을 발동합니다!]
유성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 폭의 영화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워낙에 빠른 인드라를 맞추긴 쉽지 않을 테지만, 이 정도 숫자의 유성들이라면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다.
유연화 역시 유일한 원거리 공격으로 인드라의 기를 추적했다.
[유연화가 Lv29 '태청강기'를 발동합니다!]
유형화된 강기가 주먹의 형태로 뻗어나갔다.
세 명의 랭커가 퍼부은 합격.
"해치웠… 아차."
말을 하던 이태민이 재빨리 자기 입을 막았다.
실수로 마법의 부활주문을 외워버린 것이다.
"귀찮은 날파리들 같으니라고. 이까짓 걸로 나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예상대로 화가 잔뜩 난 인드라가 버젓이 나타났다.
그래도 나름 주신급 강자들과의 경험이 있는 멤버들인데, 45층의 주신은 또 다른 격을 보였다.
바로 그때.
번뜩!
한 줄기 푸른 섬광이 인드라를 강타했다.
"아아악!"
처음으로 인드라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풍성하게 자라난 하얀 수염에 흰색 거적데기.
만약 누군가 할로윈에서 주정뱅이 제우스를 맡는다면 이런 모습이 나올까 싶었다.
“어흠! 이리 오너라.”
진혁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제우스에게 근접하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그게 오히려 인드라의 이성을 날려버렸다.
“내 앞에서… 감히 그 여자에 환장한 늙은이 흉내를 내?”
[인드라가 7개의 구름 - ‘적란운(積亂雲)’을 발동합니다!]
7개의 구름 중에서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구름.
강력하게 뭉친 번개덩어리가 진혁의 머리 위로 향했다.
콰콰콰콰콰콰콰!
20m에 이르는 원형 기둥이 만들어졌다.
곧바로 거대한 빛이 하늘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바로 그 타이밍에 맞춰. 진혁이 마력을 손 끝에 집중시켰다.
[뇌신(雷神) - ‘라이트닝 브레이슬릿’이 발동됩니다!]
비마나의 위로 얇고 넓게 퍼진 뇌막이 펼쳐졌다.
콰아아아앙!
번개와 번개가 맞부딪치면서 스파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미묘한 힘과 힘의 균형.
인드라가 더욱더 거세게 마력을 쏟아부었다.
……밀린다.
다행히 비마나의 고유실드 덕분에 적란운의 번개가 공중 요새에까진 도달하지 못 했다.
욱씬!
진혁의 전신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인드라의 힘이 강력했다.
진혁이 눈살을 찌푸린 채 살짝 비틀거렸다.
물론, 그런 작은 틈을 놓칠 인드라가 아니었다.
“우습군. 힘의 묘리를 파악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대한 힘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무슨 수로 제우스의 능력을 손에 넣었는진 모르겠지만, 그 힘은 인간 따위가 다루기에 너무나 벅찬 종류다.”
고작 한 번의 공방전.
하지만 그 한 번으로 어느 쪽의 번개가 더 강력한지 결정 됐다.
“확실히 매콤한 맛이긴 해.”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련도나 경험의 차이가 있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번개를 다루는 효율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런데 그거 아나?
지금 이 싸움은 단순히 힘의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걸?
무엇보다 이쪽은 왕관을 비롯해 아직 제대로 된 패를 꺼내지도 않았다.
[에너지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신나서 두드려 패는 건 좋은데….
비마나의 수정구는 아직 한참 ‘배가 고프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야지.
“뭐, 뭐야? 설마… 번개를 에너지로 치환할 수 있다고?”
인드라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검강 같은 종류야 워낙 순수하게 정제되고 통제가 용이한 마력이기 때문에 비교적 수정구에 저장이 쉽다.
하지만 자연계열, 그 중에서도 특히 번개는 다루기 어렵고 종잡을 수 없어 수정구에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설령, 그것이 번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무어냐, 저 놈은?’
분명 검과 결계를 주로 다룬다고 들었다. 아니, 번개를 잘 다룬다고 해봤자 100년도 살지 못하는 필멸자가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단 말인가?
인드라가 처음으로 두려운 감정을 느꼈다.
허나, 이미 너무 늦었다.
비마나의 동력은 충전이 끝났고.
[좌표 112, 235, 339. 확인했습니다.]
우우웅!
곧바로 목적지를 향해 공간이동을 시전해버렸다.
번개로 뒤덮였던 하늘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
“으아아악!”
“아아악!”
“뚫어라! 거의 다 이겼다!”
“막아!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고함소리와 함성이 어우러진 전장.
늪지에 자리잡은 연합 측은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었고. 천세는 그런 연합의 방어벽을 유린하며 승기를 굳히기 직전이었다.
변수 따윈 없다.
대부분의 주신들을 구석에 몰아넣었고. 늪지에 사는 대형급 마수들 역시 대부분 제압이 끝났으니까.
심지어 퇴로마저 완벽하게 차단해뒀기에 반나절 안에는 모든 적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 언노운이 언약까지 발동시키면 탑 밖에 세계는 멸망하고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은 전부 사라진다.’
플레이어가 없다면 탑을 등반하는 자도 없을 터.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리라.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토록 고대하던 과업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휴양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겠지.
그런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신 ‘인드라’로부터 긴급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창백하게 굳어버린 인드라의 얼굴.
“브, 브라흐마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미래에 대한 단꿈을 삽시간에 앗아가버렸다.
적이 노리고 있는 곳은 천세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연꽃’이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