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화. 무한의 수레바퀴 ‘샤일록’ (1)
척…!
진혁이 양손에 검을 든 채 두 눈을 번뜩였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듯한 맹수의 눈빛.
검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흠칫하고.
오룬과 헤파이토스가 눈을 내리깔면서 몸을 돌렸다.
다소곳이 누워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새로운 단검의 먹잇감이 되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쳇.
아쉽게 됐네.
온몸이 근육질로 된 대장장이들이라면 나름 써는 맛이 있었을 텐데 말이지.
진혁이 입맛을 다시며 대장간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자마자 서늘한 밤바람이 부드럽게 온몸을 스쳐지나갔다.
‘분명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적당히 놀아줄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느 정도 능력을 보여줘도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상대.
후보군에 오를 수 있는 자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진혁이 주변에 있는 마력을 탐지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새로 얻은 무기를 요리조리 만지면서, 어떻게 하면 더욱더 효과적으로 강해져서 태고의 존재들과 그 위에 있는 것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번개처럼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혹시…!’
이 단검에 있는 효과 중 하나. ‘샤일록의 잔혹한 거래’.
릭과 마찬가지로 대상단을 운영하는 자린고비 샤일록의 고유성창이다.
이용한다면 가지고 있는 랜덤박스의 성공확률을 대폭 올릴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원래는 확률조작을 할 수 있는 다른 아이템들을 구매한 뒤에 사용하려 했는데, 어쩌면 그 시기를 대폭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장의 카드 또한 가지고 있기도 하고.
진혁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며 경우의 수들이 착착 정리되기 시작했다. 최대한 변수를 줄이면서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길이 만들어졌다.
좋아.
이걸로 지금 당장 무얼 할지가 결정되었다.
[퍼스트 블레이드의 특수효과를 발동합니다!]
우우웅!
밝은 빛과 함께 눈앞에 있는 공간이 가로로 길게 갈라졌다.
쩍하고 벌어진 균열.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체구를 지닌 발록이었다.
사무적인 불쌍해 보일 정도로 터질 듯 팽창한 양복이 눈에 띈다.
마치, 게임 캐릭터를 그대로 갖다 놓은 듯한 외견이다.
특히나 5m에 이르는 육중한 체구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과연 이게 장사를 하는 놈인지 근접형 탱커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흐음. 갑자기 강제 소환이라니…. 특이한 일이군요.”
샤일록이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았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갑작스레 다른 공간으로 소환되어버린 것이 적잖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원흉을 발견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강진혁 플레이어님. 당신이 절 부른 겁니까?”
“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보다 절 알고 계신가 보네요?”
“시련의 탑에서 당신을 모르면 간첩입니다. 제 상단의 인턴마저도 당신 이름 석 자는 들어봤을 정도이니까요.”
“크흠. 뭐, 제가 좀 유명하긴 하죠.”
“칭찬은 아닙니다만…. 뭐, 다 떠나서 폭풍의 중심이 되는 분을 만나게 됐으니 마냥 헛걸음은 한 건 아니겠군요. 물론, 처음부터 절 찾아주셨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테지만 말입니다.”
샤일록의 입 꼬리가 씰룩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대충 알고 있다.
샤일록이 이끄는 ‘무한의 수레 바퀴’.
릭 헤네시의 이어 탑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상단이다. 원래는 규모와 세력이 엇비슷했었지만, 진혁이 릭과 친해지면서 대번에 판세가 기울어버리고 말았다.
인지도가 높은 랭커의 존재가 얼마나 큰 무게감을 갖고 있는지 증명된 순간이다.
“이제부터라도 좋은 관계를 쌓아나갈 수도 있죠. 물론 절 도와주신다면 말입니다.”
“흐음.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 말씀이군요.”
샤일록의 시선이 황금색 저울로 향했다.
화려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진 저울에선 심상치 않은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호오. 이건….”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건 성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광소였다.
“크크…크하하하하! 이걸 만들어낸 자가 있다니. 이거 재밌군요. 정말 재밌어.”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과 쭈뼛쭈뼛 선 털. 지금까지 온화하고 신사적인 대상인의 모습은 간데없고. 이제는 광기에 빠진 순수한 발록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계약은 적당히 잘 쓰면 훌륭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 되지만, 분에 넘치는 걸 바랄 경우엔 설령 주신이라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겁니까?”
“내 목숨은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좋습니다. 그럼, 거래를 시작하죠.”
샤일록이 손을 펼치자. 말라비틀어진 해골 석상들이 지면에서 솟구쳤다.
쿠쿠쿠쿵!
거대한 책을 손에 쥐고 있는 해골들이 사방에서 스산한 안광을 뿜어냈다.
촤르르륵….
검은색 쇠사슬들 역시 거친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확실히, 심상치 않은 제약이다.
‘꽤 성가셔서 가능하면 하지 않으려 하긴 했는데….’
과거에도 이 계약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할 때마다 영 좋지 않은 일을 겪어야만 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배보다 큰 배꼽인 상황을 자주 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진혁이 아공간에서 ‘?’로 뒤덮인 정육면체 상자를 꺼냈다.
보상으로 받은 ‘sss급 랜덤 박스’. 수많은 아이템들과 스킬 혹은 기연 등을 얻을 수 있는 최상위 가챠 아이템이다.
“큭큭큭!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겠습니다만, 확률을 올리는 건 그리 값싸지 않습니다. 그리 좋은 박스라면 더욱더 말이에요.”
쿠웅!
랜덤 박스를 올려놓자 저울이 한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진혁이 우선은 가지고 있는 코인과 마정석을 모두 꺼내 반대쪽에 올려놨다.
촤르륵!
엄청난 양의 코인과 마정석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러나 저울은 여전히 한쪽으로 기운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무슨 빌딩을 올려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뼈 빠지게 모은 결과물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
샤일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저 여유로운 웃음기를 당장에라도 지워버리고 싶다.
진혁이 아공간에서 발뭉을 꺼내 저울 위에 올려놨다.
쿠쿠쿵!
이번엔 저울이 상당히 올라갔다.
“……무슨!”
샤일록 역시 적잖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상황을 뒤집기는 무리였다.
저울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나가긴 했으나 적어도 2배 이상은 더 지불해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발뭉 이상을 소모하는 건 손해인데….’
아무리 랜덤 박스에서 뽑아 먹을 게 많다고 하더라도 서리혼령의 창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다른 아이템들을 투자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혁이 종이에 무언가를 써서 저울 위에 올려놨다.
나풀거리는 종이 한 장이 저울 위에 살포시 올라갔다.
그러자 갑자기 저울이 완전히 반대쪽으로 기울어져버렸다.
아니, 어디 그뿐이랴?
콰아앙!
종이 한 장으로 인해 지면이 완전히 박살 났고. 부서진 파편들이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상황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었다.
“대체 뭘… 적었길래?”
샤일록이 천천히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는 순간 그의 얼굴이 탐욕과 흥분으로 뒤섞였다.
암, 좋아 죽겠지. 행복해 죽겠고 말고.
진혁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린고비’. ‘대상단의 주인’. ‘영원한 2인자’ 등.
샤일록에겐 여러 가지 이명이 붙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명이 바로 ‘인체실험가’였다.
자신이 개발하거나 극비리에 입수한 수많은 종류의 독과 저주 등을 실험하고 더욱 강화시켜 VVIP들에게 비싼 값에 판매하는 게 그의 주수입원 중 하나라는 소리다.
그런데 시련의 탑에서 손꼽히는 강자가 스스로의 몸을 실험체로 제공해주겠다니 당연히 구미가 당길 수밖에.
샤일록이 최근에 입수한 수많은 저주와 독 등을 떠올리며 어떤 걸 먼저 사용하고 실험해야 할지… 온갖 종류의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이 거래는 대상이 죽어버리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확률을 조작하는 건 비싼 수준이 아니죠. 저 인간의 몸이 탐나긴 하지만… 아깝긴 아깝단 말입니다.’
흔히 대상단의 주인쯤 되면 비장의 아이템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기 마련, 당연히 샤일록에게도 시스템의 경계를 넘나드는 보물이 있었다.
굉장히 어렵게. 수천 년 동안 공을 들이고 또 들여 모은.
그런데. 그걸 아끼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죽더라도 절 원망하지 마셔야 합니다?”
샤일록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이야말로 나중에 한 입으로 다른 말 하기 없기입니다.”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인체 실험의 횟수는 총 3회. 3번 기회에 걸쳐 살아남는다면 샤일록이 보유하고 있는 ‘광채를 갉아먹는 보석’을 획득하실 수 있게 됩니다!]
촤르륵!
쇠사슬이 두 명의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이제는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다.
⁕⁕⁕
축제가 끝나고 모두가 잠자리에 든 시각.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잠든 대저택 앞으로 낯선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도착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네 기사 중 하나인 죽음의 기사가 주위를 살폈다.
이상하게도 저택 주변에는 그 흔한 보초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이태민의 드론이나 테레사의 성역은 물론, 엘리스가 거느리고 있는 수많은 아타락시아의 뱀파이어 하나조차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곳은 단 한 명의 괴물에 의해서 정리된 상태였으니까.
“늦으셨군요.”
어둠 속에서 백발의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벨루스.
엘리스의 오른팔이자 아타락시아의 실질적 2인자였다.
“은근히 방비가 촘촘하게 되어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언노운이 몸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엘리스는?”
“자기 방에서 얌전히 자고 있습니다. 주변의 혈족들 역시 깔끔하게 정리해뒀고요.”
“과연, 운영자답지 않게 훌륭한 솜씨십니다. 제거하지 않고 함께 하기로 한 선택이 역시나 옳았던 것 같군요.”
“과찬의 말씀을. 애초에 시대에 뒤떨어진 머저리들이랑은 같은 길을 걷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고인 물은 언젠간 썩기 마련일 테니까요.”
싱긋 웃은 벨루스가 저택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안으로 가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침입자들이 즉각 안쪽으로 들어가 두 방향으로 나눠 움직였다.
언노운과 두 기사는 테레사가 있는 곳으로.
벨루스와 두 기사는 엘리스가 있는 곳으로.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조용하게, 어디까지나 전면전이 아닌 기습과 목적 달성이 최우선이다.
그런데 모두가 각자의 침실로 들어간 순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왔군요.”
엘리스와 테레사가 완전 무장을 끝마친 채 침입자들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