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1장 내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4)
입이 쩍 벌어졌다.
그저 조금 높은 점수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샌드백이 터져 버리다니.
뒷일을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몸을 움직였다. 소리가 너무 큰 탓이었다.
‘빨리 나가자,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군주의 특성, 평정 덕분에 재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나는 땡길거야의 소환을 해제하고 복도에 있는 화장실로 대피했다.
과연, 문을 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뭐, 뭐야! 무슨 소리야…!”
“스킬 검증실에서 들려온 것 같은데?”
“헉! 여기 샌드백이 터져 있어!”
검사관들이 복도로 뛰쳐나와 웅성거렸다.
혹시 큰일로 번지는 건 아닐까.
화장실에 숨은 채 귀를 기울였는데 다행히 심각한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고위급 헌터가 온 거 아닐까요? 전에도 있었잖습니까. 샌드백을 치고 사라진 헌터가.”
“강철만? 그런 적도 있었죠. 스트레스 쌓인다고 말도 없이 와서 최고점 갱신하고 사라졌으니까요.”
얘기를 들어보니 전에 강철만도 이런 식으로 불시에 샌드백을 치고 사라진 모양이었다.
위기였지만 다행히 한시름 덜었다.
이제 역으로 나서야 할 때인 듯했다. 이럴 때 숨어 있다가 들키면 의심받기 쉬우니까.
나는 과감하게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어? 무슨 일인가요? 꽤 큰 소리가 들리던데.”
조금 전에 봤던 검사관에게 다가가 놀란 척하며 말을 걸었다.
다행히 의심은 받지 않았다.
“아아, 별거 아니에요. 고위급 헌터가 샌드백을 치고 갔나 봐요. 간혹 그래요, 스트레스 푼다면서.”
“악질이네요. 그런데 원래 저 샌드백이 쉽게 터지고 그러나요?”
“아뇨, 특수 제작한 거라 S급 헌터가 쳐도 멀쩡합니다. 간혹 오래돼서 샌드백과 연결된 합금 사슬이 끊어지는 경우는 있는데 터진 건 처음 보네요.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진짜 강한 것 같습니다. 만점도 아니고, 터트리려면 최소 SS급 헌터는 돼야 할 텐데 말이죠.”
SS급 헌터라니.
검사관의 말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F급부터 SSS급까지.
헌터의 등급은 총 아홉 개로 나뉜다.
레벨과 스탯, 그리고 스킬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헌터청에서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SS급이라면 최소한 레벨이 400은 넘어가는데 3레벨밖에 안 되는 내가 그런 평가를 받다니.
역시 [캐릭터 소환]은 사기급 스킬이 맞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검사관에게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한 헌터인가 보네요. 저도 정진해야겠습니다.”
“아, 네. 그렇…죠. 하하. 조심히 들어가세요. 앞으로도 힘내시고요.”
검사관은 말을 꺼내다 말고 싱긋 웃으며 응원을 남겼다.
앞에 뭔가 하려다가 만 말이 있는 듯했는데, 사실 나는 그 뜻을 알아들었다.
스킬도 없는 F급 헌터가 성장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아이템을 획득하고 사냥을 통해 레벨을 상승시킬 수는 있겠지만 성장에 따른 스킬 획득에서 밀려 결국엔 높은 레벨에 도달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던전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스킬의 위력이나 개수도 중요해진다.
그런데 각성했을 때부터 스킬이 없는 헌터는 레벨이 상승해도 스킬을 몇 개 얻지 못하거나, 효용성이 낮은 것만 얻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헌터시대의 상식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레벨 3부터 SS급 이상의 포텐셜을 가지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앞에 있는 검사관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어쨌든 스킬이 드러나지 않은 덕분에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넵,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사관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나는 미소로 화답한 뒤, 유유히 헌터청을 빠져나왔다.
유일 스킬의 위력을 확인하고 헌터증도 발급받았으니 이젠 실전에 쓸 차례였다.
* * *
게임에서 성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운, 노력, 현질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오랜 시간 플레이한 경험에 따르면 바로.
효율이다.
운이 좋든 나쁘든, 시간이 많든 적든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하면 어떤 상황에든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은 십수 년간 게임을 하며 얻은 일종의 진리.
그래서 나는 헌터증을 발급받자마자 집으로 가지 않고 서울역 사냥터로 왔다.
게임에서 쓰던 전략을 헌터 생활에도 적용한 것이다.
오전에 던전 브레이크를 겪고, 오후엔 서울에서 검사까지 받아 피로가 전신을 휘감았지만 쉴 수는 없었다.
대헌터시대가 된 지도 어언 10년.
현실을 게임으로 치자면 나는 초보다.
10년 동안 서비스한 썩은물 게임을 지금 막 시작한 뉴비인 것이다.
물론, [캐릭터 소환]이라는 유일 스킬과 경험치를 10배나 올려주는 특성 독존이 있긴 하지만 이미 성장에서 뒤처진 상황.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당분간은 하이어보다 헌터 일에 집중한다.’
어쩔 수 없다.
오토로 어느 정도는 돌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오토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하이어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캐릭터 소환]의 특성상 하이어의 캐릭터를 키우면 나도 강해지니까.
대신 부족한 시간은 돈으로 메워야 한다.
현질.
나도 강철만처럼 레이드를 통해 돈을 벌어 하이어에 현찰 박치기를 할 계획이다.
어차피 내 캐릭터들은 대부분 만렙이라 장비나 스킬 강화가 필요한데, 그건 돈으로 일정 부분 커버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 돈이 수억이 될지 수십억이 될지 모르고, 당장은 하이어에 쓸 돈을 헌터로 활동하는 데 써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후우, 더럽게 비싸네.”
던전으로 향하는 길, 나는 손에 쥔 병을 보며 투덜거렸다.
사냥터 입구의 간이 자판기에서 산 마나 포션 두 개.
혼자 사냥을 하려면 [캐릭터 소환]을 사용해야 하는데 지금 내 마나는 거의 바닥이었다.
그런데 최하급 마나 포션 하나에 100만 원이라니.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등 등급이 올라갈수록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비싸진다는 걸 생각하면 터무니없을 정도의 가격이었다.
보초를 서며 수없이 봐서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직접 내 손으로 사자 더 비싸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투자하는 만큼 버는 게 세상의 진리니까.
‘그래도 이번 레이드만 성공하면 부담이 훨씬 덜해질 수도 있어.’
[캐릭터 소환]은 강력한 만큼 강대한 마나를 소모한다.
지금은 비록 전 재산으로 살 수 있는 게 마나 포션 두 개뿐이지만, 던전 클리어를 통해 얻은 이익으로 마나 포션을 추가 구매하면 된다.
다른 사람들은 파티원과 나눠야 하는 던전에서의 이득도, [독존] 특성 덕분에 내가 독차지할 테니까.
서울 남부 헌터청 근처의 사냥터.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가까운 것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내가 원하는 게 있다.
그리고 또.
“안녕하세요, 던전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여기 바코드에 헌터증 찍고 들어가세요.”
관리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던전 포탈이 보이는 관리실 안, 헌터가 왔음에도 던전 보초는 슬쩍 보고 폰을 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일반적이라면 기분이 상할 수 있는 대응이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예상대로 들어맞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서울역 사냥터는 돈을 아끼기로 유명한 소기업이 위탁 운영하는 곳이라 시급이 짜고, 근무 인원도 교묘한 교대 방식으로 인해 한 명밖에 없다.
덕분에 대우가 좋지 않아 근태 역시 좋을 수가 없는데, 내가 일할 때는 최악이었지만 지금은 최고의 환경이었다.
나도 여기서 근무해 본 적이 있어서 잘 알지.
나는 지금도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던전 보초 복장을 벗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괜히 소문이라도 나면 껄끄러운데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네, 수고하세요.”
삑-!
-자격이 확인되었습니다.
나는 관리실 창문에 비치된 기계에 헌터증을 찍은 뒤, 포탈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곧, 게이트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던전 등급 중 가장 낮은 F급 던전.
사실 땡길거야의 전력과 E급 몬스터 잿빛 바위 곰을 처치한 걸 상기해 보면 E급으로 가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F급 던전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헌터 정책상 하위 던전을 클리어해야만 상위 등급의 던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은 내가 원하는 아이템이 나오는 던전이었다.
확률은 낮지만 드랍만 된다면 초반에 엄청난 도움이 되는 아이템.
덕분에 예약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누구인가?
게임으로 다져져 근성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헌터 어플을 통해 취소가 생겼다는 알람을 받자마자 무한 새로고침과 클릭을 통해 예약에 성공한 것이다.
-와, 방금 뭐냐. 서울역 F급 12번 째리고 있었는데 바로 매진이네.
-매크로 아님? 사람 속도로 저게 말이 되나.
헌터 커뮤니티 저렙 페이지의 유저들도 감탄할 정도의 속도.
‘기회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가 잡는 법이지.’
나는 등에 멘 커다란 가방에서 검과 부서진 방패를 꺼냈다.
그리고.
“시작하자.”
심호흡을 한 후, 포탈로 들어갔다.
[F급 던전에 진입합니다.]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후우, 바빠 죽겠네. 이놈의 지원서는 왜 이렇게 많은지….”
팔락- 팔락-
종이를 넘길 때마다 헌터청 제3 인사과 과장 신대훈의 사원증이 흔들거렸다.
신대훈은 넥타이를 풀며 종이 뭉치를 넘겼다.
벌써 몇 시간 째던가.
신입 헌터 채용 기간이라 검토해야 할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양이 너무 많아 모두 검토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수준이었는데, 그나마 추린 게 이 정도였다.
컴퓨터로 1차 서류를 걸러내고 다른 인사과에도 배정된 서류가 있어 수백 장에서 그친 것이다.
그래도 사무실에 있는 다섯 명이 검토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헌터 국가기관인 헌터청이니까.
위상만 본다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헌터들이 모두 이곳에 지원해야 하지만.
“어후, 인물이 없네. 마음에 드는 헌터가 하나도 없어….”
쓸만한 인재가 보이지 않았다.
F급부터 C급까지.
다양한 등급의 헌터가 지원했으나 괜찮은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범법자, 정신 이상, 던전 진입 거부 등.
모두 하나 같이 하자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능력 있는 헌터는 국가기관에 들어오지 않고 일반 길드에 들어가는 게 보통이니까.
대부분 이곳에 지원하는 헌터들은 더 이상 적극적인 던전 활동이 어렵거나 소위 말하는 꿀을 빨기 위해 오려는 경우가 많았다.
이건 다른 쪽도 마찬가지인지 인사과 팀원들 모두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넘겼다.
팔락- 팔락-
적막한 사무실에 퍼지는 종이 넘기는 소리.
‘그래도 하나쯤은 있겠지.’
비록 지루한 일의 연속이었지만 신대훈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명색이 과장인데 여기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순 없으므로.
그런데 그때, 겨우 다잡은 마음을 깨는 이가 나타났으니.
“과장님! 특종입니다, 특종!”
헌터청 제3 인사과, 대리 서상재.
180cm의 큰 키에 훈훈한 외모를 가진 20대 남자, 인사과의 간판이라 불리는 서상재 대리였다.
뭔가 재밌는 걸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업무에 찌들어 있던 터라 신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툭툭거렸다.
“우리가 기자냐? 특종이라고 할 게 뭐 있어?”
“과장님, 이거 진짜 대박입니다. 얼른 보셔야 해요!”
신대훈이 툴툴거렸지만, 서상재는 듣지도 않고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평소와는 다른, 마치 대단한 걸 발견하기라도 한 모습.
“또 웃긴 영상 아니야? 괜히 호들갑은….”
반면, 신대훈은 차분할 따름이었다.
인터넷의 재미난 영상을 보여주며 난리를 피우는 건 서상재 대리가 자주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침 연속된 업무로 지루하던 차라 신대훈은 못 이기는 척 서상재가 보여주는 핸드폰을 쳐다봤다.
그런데.
“뭐, 뭐냐, 이거?”
화면에 나오는 건 웃긴 영상이 아니었다.
영상인 것은 맞았으나 그 궤가 달랐다.
CCTV라는 걸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구도였는데 장소가 익숙했다.
휑한 공간에 놓인 샌드백과 전광판.
헌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 가는 헌터청의 스킬 검증실이었다.
각성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지만, 샌드백을 치면 나오는 낮은 파워 점수를 보고 좌절하게 되는 공간.
하지만 영상 속에선 그러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스킬 검증실에 갑자기 갑옷을 입은 기사가 하나 저벅저벅 들어오더니.
쩌어어엉-!!
방패로 샌드백을 후려쳐 터트려버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서울 남부지부에서 근무하는 제 친구가 방금 있었던 일이라고 보내준 겁니다. 신원 미상 헌터라고 하는데, 녀석이 저한테 신세 진 게 있어서 특별히 먼저 보내준 거예요. 이 정도면 다른 길드에도 분명 정보가 들어갈 겁니다, 과장님.”
서상재가 상세하게 경위를 설명했다.
신대훈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문을 열었다.
“방금? 정확한 시간은?”
“오후 2시, 그러니까 세 시간 전입니다.”
“그래? 다들 외투 챙겨! 서류 검토는 나중에 하고, 바로 외근 나간다!”
짤막한 대화 뒤로 신대훈은 의자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앉아 있던 다섯 명의 팀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예? 갑자기요?”
“과장님 왜 저러셔?”
“뭔데, 뭘 봤길래 저러시는 건데?”
업무를 보던 인사팀 팀원들이 서상재에게 다가와 마찬가지로 영상을 시청했다.
반응은 아까와 같았다.
“샌드백을 방패로 터트려? 스킬을 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누구지? 이 정도로 하려면 최소 S급은 넘어야 할 텐데 갑옷도 처음 보는 아이템이야.”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영상 속의 헌터를 바라봤다.
그때, 신대훈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차 키를 들고 나가며 소리쳤다.
“그거 최소 SS급 헌터다! 반드시 영입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