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2장 행운도 만드는 것이다(1)
“하아, 이거 진짜 물건인데….”
헌터청 인사팀 사무실.
신대훈은 의자에 앉아 서상재 대리한테 받은 영상을 계속해서 돌려봤다.
금발에 갑옷, 붉은 망토를 착용한 사내가 샌드백을 터트리는 모습.
그저 영상일 뿐이지만 신대훈은 대단한 걸 놓친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어제, 이것과 똑같은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을 서울역 사냥터에서 봤기 때문이다.
분명 아이템 거래소 앞에 있는 걸 눈으로 보고 쫓아갔거늘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자신뿐만 아니라 뒤늦게 달려온 팀원들도 수색에 동참했지만, 금발 헌터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과장님, 잊어버리세요. 분명 대형 길드에 소속된 헌터일 겁니다.”
“외국인이라 영입이 어려울 수도 있고요.”
인사과 팀원들이 아쉬워하는 신대훈을 위로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신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든 것이다.
“나 외근 다녀온다!”
“과, 과장님! 여기 검토해야 할 서류가…!”
“사냥터로 가셔도 그 헌터는 없습니다!”
인사팀 직원들이 행선지를 눈치채고 서둘러 소리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신대훈은 다시 서울역 사냥터로 향했다.
* * *
“여기가 보스 몬스터 방인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나는 원숭이 주술사가 보스 몬스터인 E급 던전 No. 46의 동굴 끝에 자리한 커다란 문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20분쯤 걸렸나.
이 던전은 3인 기준, 보통 보스 방까지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던데 나는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돌파했다.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앞서 고블린 때처럼 동굴 안을 달린 다음, 몰려드는 잡몹 원숭이들을 땡길거야로 해결한 것뿐이었다.
사냥이 너무 빠른 탓에 오히려 전투보다 아이템을 줍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정도였다.
“좋아. 잠깐 아이템 좀 줍고. 소환 해제.”
“예, 주군.”
나는 땡길거야의 소환을 잠시 해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을 주섬주섬 주웠다.
레벨이 20으로 오르고, 찬란한 현자의 팔찌를 손에 넣은 덕분에 소환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상당히 늘었다.
[상태창]
[이름 - 한상우]
[레벨 - 20]
[고유 특성 - 하이어의 군주]
<스탯>
[힘 : 28] [민첩 : 25] [지력 : 40] [체력 : 30] [마력 : 41]
<스킬>
[유일 스킬 - Lv 2. 캐릭터 소환]
[마나 : 110/410]
<특성창 열기>
<장비>
‘확실히 마나가 많아지니까 편하네.’
나는 최하급 마나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생각했다.
최대 마나의 상승 정도가 마력의 증가치에서는 비해 다소 아쉬웠지만, 그래도 30% 이상 증가했고 찬란한 현자의 팔찌의 마나 감소 덕분에 소환 시간 자체는 꽤나 늘었다. 성장 속도까지 생각하면 놀라운 수준.
마나 소비량은 여전히 적지 않았기에 계속 마나 포션을 마실 필요는 있었지만, 저번 던전 공략에서 번 돈으로 열 개를 사서 어느 정도 여유도 있었다.
그럼에도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여전히 마나는 최대한 아낄 필요가 있었다. 아이템 획득 정도는 스스로 하는 게 나은 것이다.
‘그래도 무사히 들어와서 다행이군.’
아이템을 줍고 있으려니, 던전 입장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사실 이곳에 올 때 혼자 클리어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던전 브레이크 당시 이미 땡길거야가 E급 몬스터들을 단신으로 쓸어버리는 무력을 보여줬으니까.
오히려 E급 던전에 들어오는 게 문제였다.
현재 헌터증에 등록된 내 등급이 F급이라 단계가 높은 E급 던전에 혼자 들어가는 걸 제지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D급까지는 솔로로 던전에 들어가는 헌터들이 제법 있지만 C급 이상부터는 던전에 들어갈 때 파티를 꾸리는 게 대부분이다.
F급 혼자서 E급 던전에 들어간다고 하면 의심을 사거나 안전상의 이유로 제지를 당할 수도 있기에 나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녕하세요, 던전 진입하려고 합니다.’
‘예, 헌터증 찍고 들어가세요.’
예상보다 쉽게 해결됐다.
보초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F급 던전 클리어라는, E급 던전 진입을 위한 최소 조건만 보고 나를 들여보냈다.
아무래도 E급까지는 크게 경계하지 않는 듯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도 보초를 설 때 그랬던 것 같았다.
약간은 입맛이 쓴 현실이었다.
“좋았어. 전리품 습득도 끝났고….”
아이템을 수집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보스방의 커다란 문을 열기 직전, 먼저 땡길거야를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그래. 전진해, 땡길거야.”
“예, 알겠습니다.”
내 앞에서 문을 여는 땡길거야를 바라보며 나는 마나 포션과는 다른 빛깔의 포션병을 하나 꽉 쥐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마나를 절약하기 위해선 내가 문을 열고, 보스를 바로 잡을 수 있는 타이밍에 땡길거야를 소환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굳이 땡길거야를 먼저 소환해 문을 열게 했다.
그 이유는.
끼이이익-
“우끼끼끽!!”
[탐욕 많은 원숭이 주술사가 혼돈을 걸어옵니다.]
이렇게 문을 여는 순간 보스 몬스터가 마법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땡길거야가 보스방의 문을 열자마자,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원숭이가 지팡이를 휘저었고 거기서 나온 검은 연기가 땡길거야의 몸을 휘감았다.
이 저주는 보스 방에 진입하는 순간 발동하며, 최초의 한 번은 피할 수 없었다.
목숨에 치명적인 수준의 저주는 아니지만 혼돈 효과에 빠지면 인지 능력이 저하되고, 초보 헌터들은 심한 경우 환청이나 환시를 겪게 되기도 한다.
덕분에 이 원숭이 주술사 던전은 인기가 없다.
경험치가 적고, 좋은 아이템도 주지 않는데 페널티까지 안고 보스와 싸워야 하니까.
물론 해독 포션을 마시고 저주를 푸는 방법도 있지만, 해독 포션의 가격은 마나 포션보다도 비싸 초보 헌터들에겐 꽤나 부담이 된다.
그게 No. 46 던전이 기피되는 이유 중 하나였고.
나도 혹시나 몰라 해독 포션을 챙겨오긴 했는데, 땡길거야가 있다면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다. 이것도 다 돈이니까.
[탐욕 많은 원숭이 주술사의 혼돈이 침범해 옵니다.]
‘쳇, 어이없네.’
영향이 없는 땡길거야를 보며 안심한 그 순간, 땡길거야의 몸에서 튕겨나온 검은 연기가 나를 휘감았다.
보통 처음에 탱커가 들어가 저주를 받고 해독 포션을 마시는 식으로 버틴다고 들었는데 땡길거야의 레벨이 너무 높다 보니 저주가 튕겨 나와 내 쪽으로 온 듯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어처구니없기는 했지만, 나는 침착하게 해독 포션의 뚜껑을 따려고 했다.
그런데.
[군주의 특성, 평정이 발동합니다.]
[혼돈에 저항합니다.]
팅-!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연기가 내 주변을 맴돌다가 튕겨 나간 것이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지만, 메시지와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보니 군주의 특성, 평정 때문이었다.
그저 전투에 있어서 당황하지 않게만 해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저주를 차단하는 능력까지 있다니.
포션 값 굳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숭이 주술사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우, 우끼끽…?”
널따란 동굴 한가운데, 우리를 바라보며 재차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혼돈에 저항합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다 했냐? 처치해라, 땡길거야.”
“예, 주군.”
나는 명령을 내렸고, 땡길거야는 검을 든 채 앞으로 걸어갔다.
“우, 우끼끽…!!”
잘못돼도 뭔가 한참 잘못됐다는 걸 느낀 걸까.
원숭이 주술사는 싸우는 대신 옆으로 방향을 틀어 도망가려 했지만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끌어오기를 사용합니다.]
파지지직-!
검 끝에서 발생해 날아간 오러 채찍이 원숭이 주술사를 휘감아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끌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검을 휘두르자.
[캐릭터 : 땡길거야가 탐욕 많은 원숭이 주술사(E)를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10배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민첩 +1, 체력 +1을 획득합니다.]
보스 몬스터가 일격에 명을 달리했다.
공중에 흩날리는 먼지와 땅으로 떨어지는 아이템들.
“고생했다, 땡길거야.”
“과찬이십니다, 주군.”
나는 땡길거야의 공을 치하한 뒤, 소환을 해제하고 보스 몬스터가 떨어트린 아이템을 살펴봤다.
과연 두 번째 히든 퀘스트는 어떤 보상을 줄 것인가.
나름 기대하며 땅에 떨어진 아이템들을 살펴봤는데.
“…고서가 왜 없지?”
내가 찾는 아이템은 없었다.
* * *
칠전팔기.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말.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E급 No. 46 원숭이 주술사 던전을 클리어했지만 내가 원하는 아이템, 탐욕 많은 원숭이 주술사의 고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레이드를 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네 번째부터는 잡템도 대충 줍고 보스 몬스터만 빠르게 처치했다.
E급 No. 46 던전의 경우, 인기가 많이 없어 실시간으로 계속 입찰을 할 수 있었다.
평범한 헌터라면 체력 상 절대 하지 못할 일이지만, 나는 마나 포션으로 마나만 채운다면 땡길거야를 소환하면 그만이었기에 별 무리가 없었다.
앞서 익혔던 무리 사냥의 요령을 사용하니, 한 던전에 사용하는 마나 포션은 한 병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아홉 시간 동안 아홉 번 연속으로 레이드를 진행했는데 이상하게도 몬스터는 일반적인 아이템만 줄 뿐 히든 퀘스트의 요구 아이템인 ‘탐욕 많은 원숭이 주술사의 고서’는 드랍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열 번째.
“우끼끽…!!”
[캐릭터 : 땡길거야가 탐욕 많은 원숭이 주술사(E)를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10배를 획득했습니다.]
후두둑-!
이번에도 고서는 뜨지 않았다. 심지어 평소보다 거대한 지팡이를 들고 있던 레어 몬스터였는데도 말이다.
“이거… 너무 안 나오는데.”
칠전팔기 아니, 구전십기를 했는데도 실패했다.
이제 가져왔던 마나 포션도 다 떨어졌다.
대체 얼마나 확률이 극악인 것일까.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에 검색해 봤지만 그런 아이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주군, 다시 시도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래야겠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될 때까지 하는 것.
원하는 템이 뜰 때까지 던전을 무한 반복으로 도는 건 게임을 하면서 익숙해져 있던 것이기에 크게 이질감이 들진 않았다.
마나 포션의 여유분은 없었지만, 남은 마나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한 번 더 클리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원숭이 주술사 정도의 상대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 탐욕 많은 원숭이 주술사가 잡기 어려운 건…. 응?”
그런데 전혀 다른 부분에서 갑자기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녀석 이름이 왜 탐욕 많은 원숭이 주술사지?’
땡길거야를 따라 출구 포탈로 향하던 중, 바닥에 널브러진 아이템을 보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주군…?”
“잠시만.”
나는 가던 길을 멈춰서고 보스 방을 둘러봤다.
벽에 박힌 발광석 아래, 그저 널찍한 동굴일 뿐인 공간.
‘탐욕 많은’이라는 녀석이 거주하는 곳이라기엔 너무 휑했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가설 하나.
‘만약 고서가 드랍 아이템이 아니라면?’
“어딘가에 숨겨져 있겠지.”
나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나직이 자문자답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게임이긴 하지만 맵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나 구석진 곳에 보물을 숨겨놓는 건 꽤 흔한 클리셰니까.
게다가 열 번이나 시도했는데 원하는 템이 뜨지 않았으니 한 번쯤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했다.
그렇다면 숨겨진 장소를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
초행, 아니 두 번째나 세 번째였으면 몰랐겠지만 나는 이미 열 번이나 원숭이 주술사를 상대했다.
그렇기에 머릿속에 단서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원숭이 주술사의 도주 경로.
녀석은 땡길거야를 마주할 때마다 뒤가 아닌 옆으로 도망쳤다.
보통 도주할 땐 거리를 최대한 벌리기 위해 뒤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하게 옆으로 가려 했던 것이다.
나는 원숭이 주술사가 도망가려 했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찾았다.”
동굴 벽에서 이질적인 부분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