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3장 피할 수 없는 싸움(1)
“후우, 드디어 끝났군.”
희끄무레한 동굴 안, 나는 화산검에 묻은 보스 몬스터의 잔해를 털어내며 허공을 바라봤다.
그러자 여러 결과가 떠올랐다.
[외눈박이 트롤(D)을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10배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 50을 달성했습니다.]
[모든 스탯을 +1 획득합니다.]
특성, 독존 덕분에 50레벨의 달성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50레벨을 달성하며 히든 퀘스트의 선행 조건을 클리어하고 네 번째 업적도 개방했다.
[선행 조건 - 레벨 50 달성(50/50)]
[선행 조건을 완수했습니다.]
[선행 조건 완수 보상으로 체력 +1 획득합니다.]
[네 번째 업적이 개방됩니다.]
[네 번째 업적 - C급 던전을 클리어하세요(0/1)]
[히든 퀘스트 : 군주의 업적(3/10)]
[모든 업적 달성 시, 히든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고대하던 일이던가.
이 선행 조건을 완수하기 위해 나는 서울역 사냥터의 던전을 닥치는 대로 돌았다.
D급이든 F급이든 던전 입찰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가서 클리어한 것이다.
몸이 축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행군이었는데 이건 캐릭터도 인정할 정도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군주님! 단기간에 정말 강해지셨네요! 저도 그렇고요!”
내 두 번째 소환 캐릭터, 제장이가 옆에서 폴짝폴짝 뛰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확실히 제장이도 처음 소환했을 때보다 많이 강해지긴 했다.
레벨 67.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이었는데 일주일 사이에 50이 넘는 레벨이 올랐다.
제법 높은 수치지만 사실 이것도 내 성에 차는 건 아니었다. 초반이라서 레벨이 빠르게 오르는 것도 있고.
만약 예전처럼 한 캐릭터만 키웠다면 300레벨이 넘었을 것이다.
지금의 하이어는 저레벨 유저에게 경험치 이벤트를 비롯해 여러 혜택을 주고 있고, 나도 많은 육성 노하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젠 밥 먹고 게임만 하던 시절과 달리 헌터 일도 하고, 다른 만렙 캐릭터들도 키워야 하다 보니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부족한 시간 속에서 나는 최대한의 효율을 찾으려 노력했다.
무한 레이드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열심히 던전을 도는 와중에도 수면 시간을 줄이고, 나머지 시간은 하이어를 플레이한 것이다.
지금 땡길거야 대신 제장이를 소환한 것도 효율 때문이었다.
땡길거야를 소환하면 레이드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마나가 너무 많이 소모된다.
반면, 제장이는 땡길거야와 비교하면 마나 소모량이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데다 캐릭터 레벨도 올릴 수 있었다.
땡길거야는 만렙이라 몰랐지만 몬스터를 처치하면 나뿐만 아니라 캐릭터도 경험치를 먹었던 것이다.
비록 하이어에서 레벨업하는 속도에 비하면 매우 느렸지만, 일주일 동안 던전에서만 레벨을 3이나 올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제 내 사냥 속도도 땡길거야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저등급 던전의 몬스터들이 약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새로운 무기 사용, 레벨업, 제장이의 버프 효과 등 여러 효과가 겹쳐 F급이나 E급 몬스터는 일격에 처치할 수 있게 됐다.
예전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강해진 것이다.
‘슬슬 여긴 졸업해도 되겠어.’
서울역 사냥터에 정이 많이 들었지만 여긴 D급에서 F급 사이의 던전밖에 없었다.
다음 업적인 C급 던전도 깨야하고, 효율도 떨어져 다른 사냥터를 찾아보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보스 몬스터의 드랍 아이템들을 제장이의 인벤토리에 넣은 후에 던전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
“고생 많았다, 제장아. 다음에 보자.”
“네! 감사합니다, 군주님! 다음에 또 불러주세요!”
레이드를 마치고 정산할 차례였다.
나는 제장이의 소환을 해제한 후, 던전 밖으로 나가 아이템 거래소로 향했다.
그때, 시야에 들어오는 한 신형.
던전 보초였다.
몇 차례 레이드를 돌고 왔음에도 그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건성으로 쳐다보며 은근히 게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내 옛 시절이 떠오르는 모습에 나는 피로 회복용 포션 하나를 꺼내 보초에게 건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예…? 가,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뜬금없는 선물에 던전 보초가 의아한 눈빛으로 꾸벅 인사했다.
보통 헌터들은 기분이 좋아도 아이템을 선물로 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나도 던전 보초 알바를 할 때 고생한다며 한두 번 정도 포션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아이템은 비싸니 그나마 가격이 저렴한 포션을 팁 개념으로 주는 것이다.
비록 보초의 반응을 보니 내가 누구인지, 또 이걸 왜 주는지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신경을 쓰지 않아 준 덕분에 편하게 레이드를 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던전 보초의 인사에 묵례로 답한 후, 다음으로 고마운 사람에게 이동했다.
그는 오늘도 나를 보자마자 환대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헌터님. 오늘은 D급 No. 177 던전을 다녀오셨군요. F급부터 D급까지 종횡무진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서울역 아이템 거래소의 직원은 역시 오늘도 내가 들어간 던전을 맞췄다.
나는 옅게 웃으며 화답했다.
“저는 한 게 없습니다. 친구가 다했을 뿐인걸요.”
“하하, 친구분께 거하게 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많이 사주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요.”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하루에 한 번, 레이드를 통해 번 돈 중 일부는 반드시 땡길거야나 제장이 등 게임 캐릭터들에게 썼다.
비록 현질이긴 하지만 어쨌든 돈을 쓰긴 쓰는 거다.
내 말에 거래소 직원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역시 멋지십니다. 아이템 처리는 평소대로 하시겠습니까?”
“예, 평소대로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성능이 좋은 아이템은 경매에 올리고, 나머지는 정찰된 가격에 따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5분 정도 걸릴 것 같군요.”
빠르게 진행되는 거래.
친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잡설이 적어서 편했다.
던전 클리어 속도나 새로운 아이템 등 의심스러울 법도 한데, 이곳의 직원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묻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배려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밖으로 나오기 전, 거래소 직원에게도 포션을 건넸다.
“별건 아니지만, 이걸로 나중에 커피값이라도 하세요. 늘 감사합니다.”
“헛! 괜찮습니다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헌터님.”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그렇게 거래소 직원에게까지 선물을 건넨 후,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울역 사냥터를 나왔다.
‘집에 가서 맥주나 한 캔 마실까.’
레벨 50을 찍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지만, 오랫동안 출퇴근하던 곳을 떠나게 돼서 그런지 술이 생각날 정도로 아쉬움이 남았다.
안주로 뭘 먹으면 좋을까.
머릿속으로 메뉴를 떠올려봤다.
치킨부터 시작해 피자, 보쌈, 족발까지.
돈을 좀 벌어서 그런지 가격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직 고등급 아이템이나 집, 차 등을 살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밥값 정도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번 돈의 상당량을 [캐릭터 소환]을 유지할 마나 포션에 할애하고 있고 거기에 하이어 현질까지 있어 펑펑 쓰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지만 말이다.
‘오늘은 치킨 먹으면서 하이어 종결템 재료 뽑기도 평소보다 좀 더 많이 해보자.’
그런데 그렇게 혼술 계획을 세우던 그때.
우우우웅-!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면서 문자가 날아왔다.
<헌터청 신대훈 과장 - 안녕하세요, 한상우 헌터님. 레이드 관련하여 의뢰를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잠깐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귀가는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 *
“그러니까 과장님 말씀은 C급 위험 던전 레이드에 참여해줄 수 있냐는 거죠? 헌터청의 팀원은 저번과 같지만, 아신 길드의 헌터 세 명이 함께 하고요.”
“예, 그렇습니다.”
서울역 근처 카페, 내가 방금 들었던 얘기를 정리하자 맞은 편에 앉은 신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 던전.
일정 이상, 헌터들의 희생률이 높은 던전을 부르는 명칭으로 신대훈이 의뢰를 부탁한 C급 No. 223 던전은 지난 1년 동안 열 명 이상 실종자나 사망자를 낸 곳이었다.
눈과 얼음이 뒤덮인 성에 있는 몬스터를 처치해야 해서 별칭 얼음 요새라 불리는 곳.
“여기 얼음 요새에 관한 정보입니다.”
신대훈이 서류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건네주었다.
얼음 요새의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에 관한 정보가 적힌 서류였다.
나는 종이를 넘기며 얼음 요새의 정보를 확인했다.
잡몹은 설원 기사고, 보스 몬스터는 잡몹들을 조종하는 혹한의 마법사였다.
전반적인 난이도는 C급 중에서 중간으로 지옥의 가고일과 비슷한 정도로 분류되어 있었다.
신대훈이 내게 의뢰를 부탁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만 그 정도 던전이 위험 던전이 됐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나쁘지 않네요. 친구에게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험 던전이긴 하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침 C급 던전을 클리어해야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독존의 효과도 챙기기 위해 그냥 땡길거야와 단 둘이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마나 포션이 있어도, 소환을 유지하느라 몇 분에 한 병씩 마나 포션을 계속 들이키면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이 우선적으로 원하는 것은 땡길거야의 무력일 테니까 그것만 가져올 수 있다면 인원의 조정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뇨, 이건 한상우 헌터님께 드리는 의뢰입니다. 이번 레이드에 친구분께선 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신대훈이 원하는 건 땡길거야가 아니라 나인 듯했다.
“예? 저요?”
“네.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지옥의 가고일을 무사히 처치하셨고, 이번엔 아신 길드의 헌터들도 함께 하니까요. 그리고 아신 길드의 B급 헌터가 자기보다 높은 등급의 헌터는 없으면 좋겠다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자기보다 고등급 헌터가 있으면 지휘권이나 정산율 등이 바뀔까 봐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저 혼자라….”
특이한 요구는 아니었다.
파티나 연합에서 지휘권이나 분배를 중요시하는 헌터는 많으니까.
특히나 대길드라 불리는 아신 길드의 헌터라면 콧대가 높을 테니 그런 요구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위험 던전으로 분류되어 헌터청의 지원을 받는 마당에 자신보다 낮은 등급을 요구하다니.
자신감이 있는 건지, 자만심이 넘치는 건지 판단할 순 없었지만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닌 듯했다.
어차피 일회성이고,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순간 소환으로 땡길거야를 이용하면 되니 말이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도록 하죠.”
나는 신대훈의 의뢰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