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3장 피할 수 없는 싸움(2)
위험 던전 레이드 날이 밝았다.
서울 관악구 산자락에 위치한 C급 No. 223 던전 앞.
날씨는 평소처럼 화창했지만 여러 헌터들이 희생된 곳에 들어가기 때문일까?
왠지 모를 스산한 기운이 주변에 감도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건 나만 느끼는 듯했다.
“여어, 형씨! 또 만나는구만!”
“좋은 아침입니다, 용병님!”
“오오, 진짜 와주셨군요!”
게이트로 올라가고 있는데 먼저 도착해 있던 공무원 헌터 삼인방이 해맑은 미소로 나를 환대해 주었다.
나는 꾸벅 인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다시 같이 레이드 뛰게 됐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야 하는 건 우리지! 실력 출중한 헌터님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저번에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 용병님. 덕분에 살았어요.”
“용병님, 오늘은 끝나고 꼭 같이 회식 가셔야 합니다. 저희가 보답하고 싶어서 그래요!”
던전 중첩 사건이 꽤 인상적이었던 것일까.
게이트 앞에 도착하자 공무원 헌터 삼인방이 나를 동그랗게 에워싸며 그때의 고마움을 표현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누군가 날 좋게 봐주는 건 감사했지만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차마 당장 참석하지 못한다고는 할 수 없어 나는 에둘러 말했다.
“그건 일단 이번 레이드부터 무사히 마치고 생각해 보죠.”
“오호라, 그럼 참석한다는 말씀이시군!”
“당연히 무사히 끝나겠죠! 위험 던전이라지만 C급인 데다 용병님과 아신 길드 사람들도 있는데 별일 있겠습니까!”
내 말에 서춘복과 안진수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한 기색.
이건 아신 길드의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아, 저기 오시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공무원 헌터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신 길드 헌터들이 산길에서 게이트 앞으로 내려왔다.
인원은 총 세 명.
각각 단검과 활, 그리고 대검을 든 남자 헌터들이었다.
멀끔한 모습에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비를 착용한 걸 보니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대형 길드에서 나온 헌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중 단검을 든 인물이 선두로 말문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오늘 얼음 요새 공략하러 온 헌터청 헌터님들이시죠?”
“하하, 예! 맞습니다. 헌터청 제14 던전팀 서춘복입니다. 여긴 저희 팀원인 박남일과 안진수고, 이쪽은 용병 헌터님이십니다.”
“그렇군요. 저는 아신 길드 제9 레이드팀 팀장, B급 헌터 이규진입니다. 여기 궁수는 C급 헌터 강두식이고, 뒤에 대검을 든 전사는 C급 헌터 유상준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함께 레이드를 하게 된 강두식입니다.”
“다들 반갑습니다! 헌터청 던전팀 막내 안진수입니다.”
이규진과 서춘복의 인사를 시작으로 통성명이 이어졌고, 내 차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레이드에 용병으로 온 헌터입니다.”
“반갑습니다. 전 이규진이라고 합니다. 성함과 등급은 비공개셨죠?”
“예, 맞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실력이야 신대훈 과장님이 보증하신다고 했으니 더 묻지 않겠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규진은 부드럽게 대화를 마쳤다. 고정관념 때문인지, 찢어진 눈에 주 무기가 단검이다 보니 첫인상이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상당히 친절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이어지는 브리핑 역시 그랬다.
“자, 그럼 얼음 요새 공략법을 먼저 말씀드리고 레이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얼음 요새의 보스 몬스터는 성 안에 있습니다. 요새로 가는 길 중간에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양쪽 길 끝에 있는 레버를 당겨야 성문이 열리죠. 여기서 저희는 두 팀으로 나누어 하나씩 길을 공략할 겁니다. 시간을 단축할 목적으로요.”
“일반적인 공략법이로군요. 그런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 던전으로 분류됐고, 최근 희생자도 있었으니 함께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규진의 설명에 서춘복이 이의를 제기했다.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서춘복의 의견이 타당해 보였다.
지금 이 레이드는 어디까지나 희생자 없이 클리어하고 던전 브레이크를 막는 게 목적이다.
최대한 안전하게 클리어하는 게 좋은데 굳이 속도를 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규진은 괜찮다는 듯 웃으면서 얘기했다.
“괜찮습니다. 보통 사고는 보스 몬스터와 싸울 때 일어나지, 잡몹을 처치할 때는 발생하지 않으니까요. 얼음 요새의 잡몹은 다른 C급 던전에 비해 약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위험 던전이라도 C급 던전이니, 뒤에 서시면 제가 최대한 보호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지휘권을 가지고 계시니 거기에 따르도록 하지요!”
이규진의 말에 서춘복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규진이 B급 헌터고, 아신 길드 소속이다 보니 강하게 나가기보다 한발 물러선 것이다. 지휘권을 가진 헌터의 의견은 되도록 따르는 것이 팀워크에도 도움이 되고.
“하긴 이 인원에 B급도 있는데 별일 있겠어?”
“맞습니다. 게다가 아신 길드잖습니까. 지금 착용하고 있는 장비도 희소 등급은 되는 것 같고요.”
박남일과 안진수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분위기가 다시 가볍고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위험 던전에 진입하는 거지만 다들 크게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은 표정이 달랐다.
“……?”
아신 길드의 C급 헌터, 유상준.
그는 아무 말 없이 같은 길드인 이규진과 강두식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벌써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좀 더 상황을 살폈다.
“다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자, 그럼 진입하시죠.”
“좋습니다, 출발합시다!”
이규진이 포탈로 들어가며 레이드 시작을 알렸고, 하나둘씩 던전으로 들어갔다.
‘뭔진 모르겠지만… 큰일은 아니겠지.’
나를 왠지 모를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털어버리고는 공무원 헌터 삼인방의 뒤를 따라 포탈로 들어갔다.
* * *
“하앗!!”
눈이 쌓인 설원 위로 기합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뒤로.
“그어어….”
쿵-!
거대한 신형이 눈 바닥에 쓰러졌다.
얼음 요새의 잡몹, C급 설원 기사를 처치한 것이다.
“후우….”
나는 검을 휘둘렀던 자세를 풀고, 하얀 입김을 불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이야, 이렇게 빠를 줄 몰랐습니다. 괜히 파견된 게 아니군요!”
“하하, 모두 여러분이 잘 따라와 주신 덕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잡몹을 모두 처치하고, 서로를 칭찬하고 있는 파티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드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얼음 요새로 향하는 길, 설원 기사 50명이 중갑옷을 입은 채 진영을 갖추고 있었으나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정리했다.
B급 헌터 이규진이 배후로 침투해 기습으로 어그로를 끌고, 그 틈에 나머지 인원들이 돌격해 각개격파로 몬스터를 모두 처치한 것이다.
전략이 탁월했던 탓일까.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의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자, 그럼 계속해서 가시죠. 길은 이쪽입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역시 대길드라 그런가 듬직하네.”
이규진은 강두식과 함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앞장서서 걸어갔고, 공무원 헌터 삼인방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그 뒤를 따라갔다.
나도 발걸음을 떼어 파티에 합류했다.
그런데 그때, 무리 맨 끝에서 좋지 않은 표정으로 걷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대검을 든 아신 길드의 막내, 유상준이었다.
던전 초입부터 신경 쓰였던 인물.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신가요? 아까부터 표정이 어두우시던데.”
“아뇨, 컨디션 좋아요. 그냥… 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어서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상준이 말한 이상한 일이라는 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유상준은 뭔가 말하려는 듯하더니 대답을 회피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음….’
세상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거고, 두 번째는.
“갈림길이 나왔네요. 사전에 정한 대로 두 팀으로 나누어서 진행하겠습니다.”
“네, 다들 고생하세요.”
유상준과 대화를 하면서 걸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갈림길이 나왔다.
가운데 길 끝에 요새의 문이 보였지만 양쪽 길 끝에 있는 레버를 당겨야만 열리기에 아직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규진과 공무원 헌터 삼인방은 왼쪽 길로 이동하고 나와 유상준, 그리고 강두식은 오른쪽 길로 이동했다.
레버로 가는 길엔 많은 설원 기사들이 있었지만.
슉슉-! 푹푹푹-!!
“캬! 오늘 아주 착착 감기는구만!”
딱히 나설 필요는 없었다.
강두식이 화살을 날려서 전부 정리해버렸으니까.
나는 강두식의 활약을 구경하며 유상준에게 말했다.
“저희가 나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싸우시네요.”
“네, 잘 싸우시죠. 성격은 좀 이상한 것 같지만요.”
“성격요?”
“그게….”
또 말을 하다가 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 아까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유상준은 뭔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제가 아까 이해가 안 되는 일 있다고 했죠? 용병님, 혹시 최근에 얼음 요새에서 희생된 헌터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냥 중소 길드의 헌터들이라는 것만 알아요.”
“세원 길드의 헌터들입니다. 그리고 그 헌터와 같이 들어갔던 사람들이 바로 이규진 선배님과 강두식 선배님이에요. 자기들이 이끌던 팀원이 죽었는데, 그 장소에 다시 오고도 저렇게 태연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최근 희생자가 나온 팀을 이끌던 이들이 저 둘이었다고?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고,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좀 걸려서…. 제가 과민 반응하는 거일 수도 있지만요.”
“…글쎄요.”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슬픔이 너무 크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슬픔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웃을 때도 있다.
그런데 지금, 강두식의 모습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얼음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싸했던 느낌부터 던전을 돌면서 계속 들었던 불길한 예감들.
그리고 방금 유상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넘겨듣기 쉽지 않았다.
“유상준 뭐해! 네가 중간 보스 어그로 끌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그사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두식이 외쳤다. 사전에 논의한 전략은 나와 유상준이 보스 몬스터인 설원 마상기사의 주의를 끄는 동안 강두식이 원거리에서 지원하는 것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유상준은 나에게 그럼, 하고 살짝 인사를 한 뒤 검을 들었다.
그리고 강두식의 말대로, 앞으로 달려나가던 그때.
“잠깐, 멈춰요!”
푹-!
“어…?”
날카로운 화살촉이 유상준의 가슴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