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3장 피할 수 없는 싸움(5)
쿵-! 쾅-! 까앙-!!
눈길 위로 충격파와 금속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규진의 단검과 화산검이나 방패가 맞닿을 때마다 소음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소리가 계속될수록 내 몸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센 척한 거냐?”
이리저리 움직이고 단검을 휘두르면서 이규진이 비웃음을 날렸다.
‘칫,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반격을 먹이고 싶었으나 상대의 속도가 만만치 않았다.
C급과 B급의 차이뿐만 아니라, 궁수인 강두식과 달리 이규진은 전사였기에 근접전에서 숙련도 차이가 컸다.
공무원 헌터 삼인방을 지키면서 발동한 [수호의 의지]의 발동 효과와 [제국기사단의 검술] 덕분에 합이 이어지고는 있었지만, 이규진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크하하핫!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대체 어디 갔지?”
이규진도 내가 버거워한다는 걸 느끼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솔직히 이렇게 고전할 일은 아니다.
그냥 땡길거야를 소환하기만 하면 이놈은 1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캐릭터 소환]을 쓸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캐릭터 소환]을 쓰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땡길거야를 데리고 올 순 없었다.
땡길거야는 지금.
[캐릭터 : 땡길거야가 설원의 창병(C)을 처치했습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설원의 궁수(C)를 처치했습니다.]
얼음 요새의 보스방에 들어가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메시지 창에 떠오르는 정보를 볼 때 아무래도 보스방으로 향하는 길목의 잡몹들을 처치하는 듯했는데 잠깐 소환을 해제할 수도 없었다.
땡길거야의 존재를 숨기고, 이송하기 위해, 공무원 헌터 삼인방이 도착하기 전에 보스 몬스터를 처치해야 하는 탓이었다.
게다가 지금 땡길거야는 기절한 유상준과 강두식도 함께 데리고 보스방에 진입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땡길거야의 소환을 해제하면, 두 사람의 목숨은 풍전등화나 다름이 없다.
땡길거야를 소환해서 이규진을 처치하고, 다시 그쪽으로 이동을 한다고 해도 던전에서 정신을 잃은 헌터가 목숨을 잃기에는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지금 그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공무원 헌터 삼인방이 위험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하여 나는 순수한 내 힘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상대방이 생각 이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패색이 짙어질 만큼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규진이 스킬을 사용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고, 등 뒤를 비롯한 사각에서 공격해오긴 했지만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패턴을 충분히 분석한 나는 화산방패로 단검을 막아내는 동시에 다음 행동을 예측했다.
‘지금…!’
등 뒤 상단.
이번엔 이쪽으로 올 차례였다.
나는 [반월베기]로 오러를 형성해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예상은 적중했다.
시야에서 사라진 이규진이 내 뒤쪽으로 빠르게 이동한 것이다.
하지만 녀석도 반격이 들어올 걸 예상했는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후우웅-!!
[반월베기]는 허공만 갈랐다.
“큭큭, 그건 이미 봐둔 스킬이다!”
역시 괜히 대형 길드의 B급 헌터가 아니었다.
조금 전, 중간 보스를 잡을 때 사용한 스킬인데 한 번 보고 거리를 가늠한 것 같았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럼 이건 어때?”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꼬마 대장장이의 화산검에 마나를 집중했다.
그 순간.
“음? 무, 무슨…!”
콰아아앙-!!
검 끝에서 피어난 불꽃이 일직선으로 폭발하며 이규진을 집어삼켰다.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크헉!”
설원 기사를 향해 굴러갔던 나처럼, 이번엔 이규진이 폭발에 맞고 데굴데굴 굴렀다.
‘화력 한번 끝내주네.’
[스킬 : Lv 1. 분화 - 검 끝에 화산의 기운을 모아 폭발시킵니다. 마나 10 소모.]
꼬마 대장장이의 화산검에 부여된 장착 스킬, [분화].
폭발이 얼마나 강한지 처음 썼을 땐 나도 움찔했었다.
마나포션을 꺼내 마시는 사이, 이규진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폭발 속에서 일어나 단검을 고쳐 쥐었다.
“한 방 먹었네. 보기보다 제법이긴 한데, 회심의 일격 치곤 너무 약한데? 마나도 너무 많이 잡아먹고 말이야, 큭큭.”
“맘대로 생각해.”
땡길거야의 소환을 유지하기 위해 마나포션을 마시고 있었던 걸, [분화]에 마나를 전부 사용해서 마시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막상 [분화]는 수십 번도 사용할 수 있는 정도밖에 소비되지 않지만.
“방금 같은 위력을 여러 번 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난 그걸 또 당해줄 생각도 없으니… 불쌍해서 어쩌나?”
“아니, 이 정도면 됐어. 충분히 시간을 벌었거든.”
“뭐?”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혹한의 마법사(C)를 처치했습니다.]
-주군,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고 인간 두 명을 던전 포탈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땡길거야가 모든 임무를 마쳤다는 걸 알려왔다.
마침 남은 마나 포션도 많지 않았는데 환상적인 타이밍이었다.
이규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여전히 날 얕잡아보고 있지만 말이다.
“시간을 번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으냐!”
이규진이 눈을 희번덕대며 돌진했다.
그 기세가 참 맹렬했는데 나로선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순간 소환. 땡길거야, 방패 치기.’
가까이 다가와 준 덕분에 끌어오기의 마나를 아낄 수 있었으니까.
쩌엉-!!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땡길거야의 [방패 치기]가 정확히 꽂힌 것이다.
이규진은 눈밭을 데굴데굴 구르다 축 늘어졌다.
“으윽! 뭐, 뭐야 이 새…!”
B급 헌터에 장비도 좋은 걸 착용해서 그런 걸까?
[방패 치기] 한 번에 기절한 강두식과 달리 의식이 남아 있었다.
“한 대 더 맞아야 조용해지겠군.”
나는 화산방패를 고쳐잡으며 이규진에게 다가갔다.
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지만, 배후와 동기를 알아내거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살아 있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큭큭…, 고작 먹이 따위한테 굴복할 순 없지….”
갑자기 이규진이 주머니에서 뭔가 캡슐 같은 걸 꺼내더니 와그작 씹어먹었다.
“회복하게 둘 줄 알고?”
기껏해야 상처를 치유하는 캡슐일 게 뻔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규진을 제압하기 위해 빠르게 다가갔다.
효과가 나타나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하고 접근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녀석이 먹은 건 단순한 캡슐이 아닌 것 같았다.
땅을 박차 거리를 좁힌 순간.
쿠웅-! 파아앙-!!
“크윽…!!”
몸이 뒤로 쭉 밀릴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가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규진의 외형도 바뀐 것이다.
두둑-! 두두두둑-!!
입고 있던 가죽 갑옷이 모두 찢어지고, 괴이한 소리와 함께 몸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이내 몸을 일으켰을 땐.
“크롸아아아!!”
[추악한 암살자 이규진(B)]
녀석은 인식표를 띄운 괴물이 되어 있었다.
“몬스터가… 됐어?”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1.5배 정도 커진 몸집과 붉게 변한 눈, 그리고 이마에서 빛나는 스페이드 형태의 문양.
환각은 아닐 것이다.
군주의 특성, 평정으로 정신 계열 마법은 내게 통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눈을 한 번 비벼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현상이 이규진이 몬스터로 변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긴급 퀘스트 발동]
[군주로서 타파해야 할 사특한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몬스터가 된 이규진을 처치하세요(0/1)]
퀘스트까지 떴다.
처음 보는 ‘긴급’ 타이틀까지 단 상태로.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순 없었지만 고민을 길게 할 순 없었다.
몬스터 이규진이 변화된 몸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크라악!!”
“크윽!!”
‘미친, 이건 안 된다.’
검을 맞댄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몬스터로 변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규진은 이전보다 2배는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제국기사단의 검술]을 필사적으로 활용해, 검을 흘려내거나 막아냈지만, 한계는 있었다.
결국, 독이 묻은 단검을 모두 막지 못하고 몇 번 베이고 말았다.
심지어.
퍽-!
“크헉!!”
아까와 같이 복부를 걷어차여 바닥을 구르기까지 했다.
어지러운 시야 속, 나는 재빨리 쫓아오는 몬스터 이규진에게 [분화]를 날려 물러나게 했다.
잠깐 생긴 공백.
나는 재빠르게 피해를 확인했다.
사지는 멀쩡해 전투를 계속할 순 있었지만.
[중독에 걸렸습니다.]
[10분 동안 체력이 지속해서 감소합니다.]
독 데미지 때문에 체력이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의식 소실 저주가 침투합니다.]
[군주의 특성, 평정이 발동합니다.]
[정신 계열 마법에 저항합니다.]
평정 덕분에 다른 헌터들처럼 의식을 잃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걸 마냥 호재로 볼 순 없었다.
이대로는 이규진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녀석은 [분화]가 지나가자 쉬지 않고 다시 내게 쇄도해왔다.
이제 제압은 물 건너간 일이었다.
‘살려두지 않는다.’
“땡길거야!!”
결론을 내린 나는 곧바로 [캐릭터 소환]을 사용했다.
“예, 주군! 사특한 자에게 심판을…!”
부연 설명은 필요 없었다.
땡길거야는 강림하자마자 달려드는 적을 향해 검을 조준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앙-!!
“크라아아악!!”
[캐릭터 : 땡길거야가 신성 폭발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추악한 암살자 이규진(B)을 처치했습니다.]
검 끝에서 초록빛의 오러를 폭발시켜 몬스터 이규진을 소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