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3장 피할 수 없는 싸움(6)
“음? 무슨 일 있나? 저기에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많이 모여 있지?”
“저기 C급 던전 있는 곳 아니야? 옷차림도 헌터들 같은데?”
“고작 C급에 헌터들이 저렇게 많이 모여 있다고? 던전이라도 새로 열렸나.”
“글쎄, 들은 적이 없는데.”
서울 관악구, 길을 걷던 남학생과 여학생이 산자락 아래에 모인 인파를 보며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웅성웅성-
두 학생의 말대로 산자락엔 어림잡아 50명이 넘는 헌터가 모여 있었는데, 흔치 않은 광경에 학생들을 비롯해 구경하러 나온 동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터들이 모인 곳은 C급 No. 223, 별칭 얼음 요새가 있는 곳으로 다수의 헌터가 포진할 정도의 고등급 던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과 주민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던전 주변의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친, 이게 무슨 난리야.’
얼음 요새 던전 앞, 신대훈은 주변을 돌아보며 이마를 짚었다.
헌터청에서 나온 던전팀부터 지원팀과 경호팀, 그리고 체포팀까지.
S급 던전을 공략할 때나 모일 법한 수의 인원이 고작 C급 던전 앞에 모여 있었다.
인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인 헌터들 역시 하나같이 B급 이상의 고등급이었다.
“엄청나네요. 예전에 루미나스의 S급 헌터 방시현을 체포할 때가 떠오르는 수준입니다.”
서상재도 신대훈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이 한 번에 출동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특정 길드의 길드원이 상습적으로 다른 헌터를 습격했고, 지금도 피해자가 발생한 흉악 사건이었다. 심지어, 그 배후에 루미나스가 있다는 의심마저 있는 상황이라 대규모 출동은 불가피했다.
사안의 심각성은 파견된 인원만 봐도 봐도 알 수 있었다.
“신대훈 과장님, 이 던전 레이드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죠?”
헌터청 제1 던전팀의 팀장, S급 헌터 이은하가 신대훈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진 검은 머리칼과 검푸른 제복, 그리고 고양이상의 미모가 인상적인 그녀는 헌터청의 대표적인 간판 스타였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헌터청에 몇 없는 S급이며, 헌터로서의 실력뿐만 아니라 공무원으로서의 업무 능력도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다.
헌터 활동은 물론이고 내부 업무, 대외 활동 등 온갖 업무에서 중책을 맡기 때문에 분 단위 스케줄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그녀가 현장에 직접 나타나다니.
그만큼 헌터청에서 이 사건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대훈은 얼음 요새 던전의 포탈을 주시하며 이은하 팀장에게 대답했다.
“반나절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아직 헌터 두 명이 던전 안에 있다고 하고요.”
“탈출한 헌터들은요?”
“모두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체포팀과 경호팀을 붙여서요. 그리고 그중 가해자인 C급 헌터 강두식은 정밀 마나 검사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만약 몸 어딘가에서 스페이드 문양이 나온다면….”
“루미나스라는 뜻이겠죠.”
이은하의 대답에 신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로는 덤불이, 위로는 구름이 그려진 스페이드.
죽음을 뛰어넘는 힘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루미나스에 입단할 때 몸에 새기는 표식으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인 신념을 몸에 새기는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는 표식인 것이다.
신대훈은 핸드폰을 꺼내 아신 길드에서 전달받은 이규진과 강두식의 인적 사항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이런 짓을 벌일 곳이라고 하면, 루미나스밖에 떠오르지가 않네요.”
“그럴 확률이 높겠네요. 안에 있는 아신 길드 헌터는 B급이라고 했죠? 그럼 용병의 등급은 어떻게 되죠? 아까 자료를 열람해 보니 비공개로 되어 있던데요.”
“그게….”
이은하의 물음에 신대훈은 대답을 망설였다.
얼음 요새에 있는 한상우의 등급을 차마 얘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대훈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이은하에게 한 발짝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F급입니다.”
“예…? 인사과장님,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찌릿.
이은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대훈을 흘겨봤다.
그러나 농담이 아니었다.
“사실입니다. 여기… 용병의 인적 사항입니다.”
신대훈은 이번엔 핸드폰으로 한상우의 인적 사항을 열어 이은하에게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반응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대체 왜 F급을 얼음 요새에 파견하신 거죠? 헌터증 발급 날짜를 보니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제 불찰입니다. 고등급 헌터와 함께 다니고, 던전 중첩 사건도 해결한 적이 있는 용병이라 위험 던전도 무리 없겠다 싶었는데 이런 사달이….”
신대훈은 순순히 자신의 오판을 시인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은하는 크게 추궁하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죠. 그보다, 던전 진입석은 언제쯤 오는 거죠?”
“확보는 끝났으니 이제 곧 올 겁니다. 다만 급하게 승인이 떨어진 게 하나뿐이라서….”
먼저 입장한 헌터들이 복귀하기 전에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인 던전 진입석은 특정 몬스터에게서 아주 희귀한 확률로 나와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심지어 긴급 상황에 그 구하기 힘든 걸 써서 겨우 한 명 들어간다는 것도 너무나 큰 페널티였지만.
이은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바로 들어갈 거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무기를 꽉 쥐었다. S급인 그녀가 들어간다면 B급인 이규진을 제압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던전 진입석이 도착할 때까지 그저 안에 있는 용병이 무사하기를 기다릴 뿐.
신대훈과 생존자의 말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F급이라는 용병도 범상치 않은 인물인 듯싶었다.
하지만 F급과 B급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F급이 B급과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경험에 기반한 이은하의 판단은 제로에 가까웠고, 모여 있는 다른 헌터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기에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포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웅웅-!
이은하의 음성 뒤로 C급 No. 223던전의 포탈이 일렁였다.
“나, 나옵니다…!”
무기를 들고 주변을 지키던 헌터들이 움찔했다.
그것은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저벅- 저벅-
포탈을 통과한 신형이 발을 내디딘 순간, 헌터청 헌터들은 또다시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포탈 밖으로 나온 이가 다름 아닌.
“……!”
“뭐, 뭐야? 이규진이 아니잖아…?”
처음 보는 인상착의를 가진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50명이 넘는 헌터가 주변에 있었지만, 예상 밖의 상황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법.
적막도 오래가진 못했다.
“허, 헌터님…!”
불안한 눈빛으로 포탈을 주시하던 신대훈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달려와 손을 잡은 것이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한상우는 신대훈이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랐기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공무원 헌터 삼인방을 던전 밖으로 내보냈을 때, 헌터청에서 지원이 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나오자마자 신대훈이 달려와 손을 잡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녕하세요, 헌터청의 제1 던전팀장 이은하입니다. B급 헌터는 어떻게 됐죠?”
헌터청의 대표 스타인 이은하를 만날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긴장감이 가득한, 그러나 별을 담은 듯 반짝이는 눈빛이 한상우를 향했다.
한상우는 신대훈을 슬쩍 밀어내며 대답했다.
“처치했습니다. 시신은 수습 못 했고요.”
“헉! 정말이십니까?”
“B급 헌터를… 처치하셨고요? 대체 어떻게요?”
신대훈과 이은하가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F급 헌터가 아신 길드의 B급 헌터를 이기다니?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두 사람 다 그렇게 질문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이은하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은 그때.
사박- 사박- 사박-
산길 아래에서 아신 길드의 제복을 입은 인원 수십 명이 올라왔다.
대형 길드답게 40대 남성 헌터를 중심으로 오와 열을 맞춰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헌터청에서 온 공무원 헌터들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뭐 하다가 이제 오는 거야?”
“대형 길드 헌터랍시고 목에 힘 빡 준 거 봐라.”
던전 주변을 지키고 수색하던 공무원 헌터들이 눈을 흘기며 저마다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좋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선두에 서서 올라오던 헌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아는 얼굴을 찾은 듯 이은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신 길드의 부길드장 성상현입니다. 상황 공유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상황을 전파한 게 언제인데 이제 오시는 거죠?”
“거듭 사과 말씀드립니다. 주요 인원이 모두 레이드 중이었는데 겨우 소집해서 왔습니다.”
“선발대라도 보내셨어야…. 후우….”
이은하는 성상현을 질책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신 길드원이 가해자인 만큼 대응을 위한 회의를 하느라 늦었을 게 뻔하고, 또 추궁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었다.
이은하는 팔짱을 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 종료됐습니다. 부상당한 헌터들은 모두 병원으로 이송했고, 곧바로 치료와 정밀 검사를 받을 겁니다. 아신 길드의 B급 헌터 이규진은 던전에서 사망하였고요.”
“이규진이 말씀이십니까? 제가 보고받기론 인원 대부분이 나오고 용병과 이규진만 남았다고 하던데 그럼….”
성상현의 시선이 한상우를 향했다.
마치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
아신 길드의 부길드장답게, 눈빛에 담긴 위압감만 해도 엄청났지만.
“…….”
한상우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그러자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성상현이 다시 이은하에게 말을 걸었다.
“이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비공개거든요.”
받아주지 않는 건 이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상현은 하는 수 없이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권위를 버리고, 한상우에게 직접 얘기한 것이다.
“으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아신 길드의 부길드장 성상현입니다. 혹시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그쪽 길드원 두 명이 저를 습격했는데, 제가 그쪽에게 알려줘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막말로 그쪽도 루미나스일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루, 루미나스라니…! 어떻게 그런 모함을…! 안에 들어간 그 둘이 루미나스라는 증거는 있습니까? 그 둘의 개인적인 문제는 아니고요?”
성상현의 이마에 핏줄이 나타났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신 길드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발언은, 길드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 증거 있습니다.”
“봐요, 있을 리가… 네?”
“루미나스의 상징, 스페이드 문양. 그게 이규진에게 나타났습니다.”
“뭐라고…?”
한상우의 말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상우와의 대화는 곧 끊기고 말았다.
우우우웅-!!
성상현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 탓이었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다름 아닌.
<강철만 회장님.>
아신 길드의 회장, 강철만이었다.
“예.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성상현입니다. 네. 도착해 있습니다.”
성상현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현장에는 방금 도착했지만, 뒤에 있는 수행원들이 재빠르게 상황을 전파했는지 강철만은 이미 모든 내용을 알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성상현은 전화를 끊고, 한상우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강철만 회장님께서 용병님을 직접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가시겠습니까? 불안하다면 헌터청 분들도 동행하셔도 좋습니다.”
“저보고 직접 오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한상우와 성상현의 대화에 주변에 있는 모든 헌터의 이목이 집중됐다.
몇몇이 속삭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네.”
“하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긴 하지.”
“혹시 몰라. 입막음으로 두둑이 쥐여줄지. 대형 길드가 다 그렇잖아?”
주변에서 이런저런 말이 나왔지만, 한상우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성상현의 제안에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전화 건 분한테 전해 주십시오.”
짤막하게 대꾸했다.
“꺼지시라고.”
“……!”
성상현을 비롯한 모든 헌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지금 뭐라고….”
“못 들으셨습니까?”
한상우는 대수롭지 않게 풀어서 얘기해줬다.
“아니꼬우면 직접 오라는 말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 아랫사람만 덜렁 보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요.”
“……!”
성상현도 아예 기가 막혀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상우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제 몸은 멀쩡하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헛, 예! 아, 알겠습니다, 헌터님.”
주변에 보는 눈이 많건만 신대훈에게만 짤막하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뜬 것이다.
“저, 저런! 강철만 회장님께 감히…!”
뒤늦게 아신 길드의 헌터들이 분개했지만, 한상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몇몇은 싸가지가 없다며 욕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헌터청의 헌터들은 대부분 호감을 느꼈다.
‘와, 패기 봐. F급 맞아…?’
특히 이은하가 그랬다.
정말 저게 F급 헌터란 말인가?
등 뒤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을 뒤로한 채, 한상우는 홀로 관악구 산자락을 걸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