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3장 피할 수 없는 싸움(7)
“음? 뭐라 그랬다고요?”
높은 천장에 고급스럽게 인테리어가 된 사무실.
의자에 드러눕듯 앉아 책상 위에 발을 올린 인물이 방금 했던 얘기를 다시 말해달라는 듯 물었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가 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그게… 꺼지시라고 했답니다. 얼굴 보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요.”
“허….”
다시 들어도 기가 찬 것일까.
의자에 드러누워 있던 30대 남자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책상 위에 올렸던 발을 내렸다.
그러자 책상 위에 놓인 명패가 살짝 흔들렸다.
<아신 길드 길드장 강철만>
대한민국의 5대 길드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아신 길드의 길드장.
훤칠한 외모와 유쾌한 성격으로 온갖 화제를 만들어내는 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다시 정리해보죠. 우리 길드원 둘이 팀원들을 습격했다고요? 피해 상황은 어떻죠?”
“C급 헌터 유상준과 헌터청의 공무원 두 명이 독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합니다. 나머지 공무원 헌터는 경상에 불과하고요. B급 이규진과 싸웠던 용병은 병원도 가지 않고, 게이트를 그대로 떠났다고 합니다.”
“팀원들을 습격한 헌터들은요? 정밀 마나 검사 결과 나왔습니까?”
“예. 방금 받은 보고에 따르면 C급 강두식의 등에서 루미나스의 표식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후우, 길드 내에 루미나스가 둘이나 있었다라….”
평소 뭐든 여유롭게 넘기는 강철만이었지만 이번엔 사안이 심각했다.
무력을 숭상하며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비공인 국제 헌터 범죄 조직, 루미나스가 길드원으로 활동해 다른 헌터들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어떤 동기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드러난 것만 봐도 숨겨진 피해자가 꽤 있을 것 같았다.
이 일이 만약 세간에 알려진다면?
진상 조사를 이유로 아신 길드에 압수수색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강철만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옆의 수행비서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일어난 사건, 언론을 통해 알리세요.”
“예? 막는 게 아니라요?”
“이 정도로 큰일은 막아지지 않을 거예요. 괜히 막으려다가 드러났을 경우, 역풍도 세게 맞을 거고요. 그러니 우리가 빠르게 오픈하는 게 낫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비서는 잠깐 고심했지만 이내 강철만의 의견을 따랐다.
정확한 시각이기도 했고, 평소 강철만의 화끈한 성격에 맞는 결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철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추가로 이규진과 강두식이 참가했던 레이드뿐만 아니라 길드원 전체의 레이드 목록 뽑으시고, 함께 진입했던 헌터들의 안위도 추적하세요. 길드원 전체 정밀 마나 검사도 추진하시고요.”
“길드원 전체의 정밀 마나 검사요?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게 아닐까요? 정밀 마나 검사라고 해도 한계는 있습니다.”
루미나스의 표식은 마나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밀 마나 검사를 받더라도 마나의 흐름을 잘 조정하면 표식을 숨길 수도 있어서, 루미나스의 징표 검출률은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SS급 헌터인 강철만이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
하지만 강철만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요. 무조건 해야 합니다. 아니면 대중들은 아신 길드를 루미나스와 연관이 있다고 여길 거예요. 길드원들도 불안해할 거고요. 그걸 해소하려면 길드원 전원이 정밀 마나 검사를 받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거부하는 사람은 퇴사 처리 플러스 헌터청에서 조사받는 걸로 하세요.”
“아…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길드장님.”
“하핫,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강철만의 수행비서 남희건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성격이 유쾌하고 화끈하다고 해서 이걸 업무에도 적용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강철만은 단기적으로는 손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될 수 있는 선택을 했다.
포인트는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
100% 보장되는 게 아니지만, 강철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행했다. 그리고 남희건은 몇 년간 비서로 일해와서 알고 있었다.
강철만의 이러한 결정이 단 한 번도 틀렸던 적이 없다는 것을.
남희건은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도 꺼냈다.
“그렇다면 용병은 어떻게 할까요? 원래는 보상에 대해 합의를 진행하고, 괜찮다면 계약도 추진해 볼 생각이었습니다만….”
“파견된 용병은… 인적 사항이 비공개라고 했나요? 그래도 헌터청을 통해 알아보세요. 합의하려 한다고 하면 연락처나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제공할 겁니다. 성공하면 저한테 연락하고요.”
“직접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대형 길드의 길드장, 그것도 SS급 헌터가 움직인다는 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내년까지 스케줄이 짜여 있기도 하지만, 단순히 누굴 만나는 것만으로도 여러 이슈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직접 오라는데 가줘야죠.”
강철만은 책상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켜고, 하이어에 접속하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구경 한번 해보자고요.”
* * *
쏴아아아아-
샤워기 아래, 머리를 타고 발끝까지 따뜻한 물줄기가 흐른다.
하루의 피로를 녹여내는 듯한 물의 어루만짐.
나는 머리칼을 쓸어넘긴 후, 몸쪽으로 물줄기를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따끔-!
“윽….”
옆구리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이규진의 단검에 베였던 자리였다.
상처는 없었다.
체력 포션을 마시면 경상은 흉터도 없이 말끔하게 치료되니까.
하지만 신경 깊숙한 곳은 치유되는 데 시간이 걸리기에 통증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특히 오늘처럼 격하게 싸우고, 독에 중독까지 됐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몬스터도 아니고, 헌터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다니.
위험투성이인 헌터 일의 특성상 언젠간 한 번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공무원 헌터 삼인방과 유상준을 살렸으니까.
하루를 돌아봤을 때, 이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었다.
“후우, 개운하네.”
샤워 후, 나는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직 아신 길드에서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떨떠름하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용병이 대형 길드의 길드장에게 급발진을 했으니.
하지만 그건 의도된 행동이었다.
성장 속도를 봤을 때 언젠가는 강철만과 마주할 일이 있을 텐데, 그때를 대비해 미리 기선 제압을 한 것이다.
의미 없는 힘 싸움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간관계는 대부분 첫 대면에서 형성돼 그 인상이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시작이 사장과 직원 관계라면,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밖에서 만나더라도 상하 관계였던 분위기가 남는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번 사건을 통해 강철만보다 조금이라도 갑의 위치를 선점하는 게 좋다.
어차피 보상이라고 해봐야 현금 좀 주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이긴 하다.
어느 쪽이든 내가 이득을 보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또 연락 오겠지. 패를 쥐고 있는 건 나니까.’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머리를 말리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사실 진짜 신경 쓸 일은 따로 있었다.
‘아신 길드에 헌터청의 헌터들까지 나를 봤으니 이제 조용히 성장하는 건 물 건너갔다고 봐야겠지.’
성장.
[캐릭터 소환]이라는 유일 스킬을 얻은 후,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레벨업을 진행해왔다.
SS급 헌터의 레벨을 우습게 뛰어넘는 만렙 캐릭터를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피곤해지는 건 시간 문제기 때문이다.
용병을 뛸 때 정보를 비공개로 해놓긴 했지만, 사안이 큰 만큼 인적 사항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벌써 기사가 떴다고?”
<[긴급] 위험 던전 공략 도중 아신 길드 헌터 두 명 사망.>
<[속보] 사망한 아신 길드 헌터들에게서 루미나스의 표식 발견돼….>
<[속보] 구조된 헌터청 소속 헌터, 생명엔 지장 없어.>
포털 사이트에 여러 기사가 떠올랐다.
물론 헌터들의 실명이 공개되진 않았고, 내 정보 역시 신대훈이 잘 관리하고 있겠지만 영원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장 속도를 좀 더 올려야겠어.’
개인적으로 아신 길드 측에서 기사를 막거나 내보내는 시기를 늦출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내 신원을 숨기는 것도 아직 성장이 필요한 지금뿐.
정체를 드러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성장하면, 그때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고 성장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보다 활발하게 행동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쉬운 대로 남은 시간이라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나는 우선 미뤄놨던 보상을 수령했다.
시야 오른쪽 상단.
[히든 퀘스트 : 군주의 업적]
[네 번째 업적 - C급 던전을 클리어하세요(1/1)]
[네 번째 업적 달성에 성공했습니다.]
[메시지를 터치할 시, 보상이 지급됩니다.]
얼음 요새를 빠져나왔을 때 클리어됐던 보상 메시지가 떠 있었다.
나는 보상 획득 메시지를 터치했다.
보상은 곧바로 수여됐다.
[네 번째 업적의 보상을 획득합니다.]
[캐릭터 소환의 스킬 레벨이 3에서 4로 상승합니다.]
[스킬 레벨 상승에 따라 동시 소환 가능한 캐릭터의 수가 증가합니다.]
[유일 스킬 : Lv 4. 캐릭터 소환]
[현재 소환 캐릭터 : (0/2)]
[보유 캐릭터 : 2]
[선출 가능 횟수 : 0]
“이제 동시에 소환할 수 있겠네.”
나는 메시지를 보며 씩 웃었다.
현재 소환 캐릭터 수의 표시가 (0/1)에서 (0/2)로 바뀌었다.
지금껏 선출한 캐릭터가 두 명이더라도 하나만 소환할 수 있었는데 마침내 둘 다 소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나의 소모는 더욱 커지겠지만, 순간적인 폭발력도 증가할 것이다.
그런데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이었다.
동시 소환 가능한 캐릭터 수가 늘었다는 건 좋았지만, 제장이가 아직 버프 말고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 동시에 소환한다고 해도 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한 고생에 비하면 뭔가 부족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일렀다.
업적 보상 메시지의 반대편에.
[긴급 퀘스트]
[몬스터가 된 이규진을 처치하세요(1/1)]
[긴급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터치할 시, 보상이 지급됩니다.]
아직 수령하지 않은 보상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