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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캐릭터로 레벨업-29화 (29/169)

제29화

4장 인연은 바람을 타고(4)

째깍- 째깍-

헌터청 본청에 마련된 회의실, 의미 없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새어 나왔다.

주변은 고요했다.

성인 다섯 명이 테이블에 앉아 있음에도.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건 세 남자 중 가운데에 앉은 인물, SS급 헌터 강철만이었다.

“밖에 사람이 많네요. 축하해요. 얼음 요새의 용병, 한상우 헌터. 유명인이 됐네요.”

“글쎄요. 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어색하기만 하고요.”

옅은 웃음과 함께 건네는 그의 말에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분위기를 풀려는 것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상황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반면, 강철만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대답했다.

“이제 유명인이 됐으니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헌터, 특히 남들보다 뛰어난 헌터는 어딜 가든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받거든요. 개인 정보 역시 공공재가 되어서 여기저기 퍼지고요. 지금 밖에 있는 이들이 한상우 헌터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처럼요.”

언뜻 들으면 친절한 설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내 입장에선 조금 가증스러울 따름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건 아신 길드에서 사건을 기사화하고, 정보원들이 나를 미행하다가 다른 길드에 꼬리를 밟혔기에 커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에 뻔뻔하다는 말이 진짜일 줄이야.’

강철만에 대해선 시원시원하고 호쾌하다는 평이 있지만, 반대로 제멋대로에 뻔뻔하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평가는 행동은 같아도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아무래도 내게 강철만은 부정적인 인상이 강한 것 같았다.

얼음 요새에서 사건은 잠입한 루미나스의 행동이라고는 해도 아신 길드의 소속이었고, 강철만은 아신 길드의 길드장이니까.

하이어에서 뛰어넘어야 할 존재기도 하고.

그리고 이러한 내 마음가짐은 강철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팔짱을 끼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남은 대화에 임했다.

“조언은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뭐죠?”

“……!”

“아, 아니. 본인이 직접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강철만의 양옆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비서들은 내 자세와 태도에 기겁했다.

한 명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고, 나머지 한 명은 기가 찬다는 듯한 말투로 항변했다.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내 옆에 앉아 있던 신대훈도 ‘헌터님?’이라고 속삭이며 우려를 표했지만 나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과연, 강철만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째깍- 째깍-

또다시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나는 말없이 강철만을 주시했다.

그러자.

드르륵- 꾸벅-

강철만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단순히 머리만 숙이는 게 아니라 허리까지 90도로 굽혀 제대로 인사한 것이다.

“……!”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비서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신대훈은 입을 쩍 벌렸다.

동요가 없는 건 당사자인 나와 강철만뿐이었다.

“사과하러 왔습니다. 길드 내에 루미나스가 있는 걸 파악하지 못한 저희의 실책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도 저희 책임이고요. 아신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루미나스를 제압하고 헌터들을 구해주셔서.”

“기, 길드장님. 너무 과한….”

중간에 비서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강철만을 말렸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보상 리스트도 뽑아 왔습니다. 다른 분들은 병원비 지급과 함께 입원하는 동안 발생한 손해를 보상하고 합의금도 추가로 드리기로 했거든요. 한상우 헌터의 경우엔 입원하지 않았으니 다른 걸 보상으로 주면 어떨까 합니다. 포괄적으로 제시하면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가이드 라인을 가지고 왔고요.”

강철만의 얘기가 끝나자 비서들이 가방에서 서류 파일을 꺼내 나와 신대훈 쪽으로 내밀었다.

“잠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신대훈은 비서들한테 받은 서류를 한 장씩 넘겨보더니 내게 분석 결과를 공유했다.

“기본 보상금은 10억 원이네요. 이외에도 휴업 손해, 합의금 등 별도로 지급되는 것도 있고요. 다른 걸로도 대체 가능하긴 한데 이 정도면 일반적으로 헌터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 비해 상당히 많이 보상하는 겁니다. 괜찮은 조건이에요.”

“음… 그렇군요. 돈 말고 대체 가능한 건 뭐가 있죠?”

“아이템입니다.”

신대훈이 보여주는 서류를 보니 아신 길드 소유의 여러 아이템이 나열돼 있었다.

희소부터 전승 등급까지.

확실히 보상으로서 가치가 있는 아이템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마음에 드시는 게 없나요?”

“돈이나 아이템은 다른 걸로 대체 가능할까요?”

“다른 거라면…?”

“미해결 던전 입찰권이요.”

“미, 미해결 던전 입찰이요?”

“……?”

아신 길드 측 수행원뿐만 아니라 신대훈의 눈빛에도 의아함이 떠올랐다.

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꽤나 놀란 눈치였는데, 강철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미해결 던전이라, 등급은요?”

“등급은 상관 없습니다. B급 이하의 미해결 던전이라면 F급이어도 상관 없습니다.”

“기, 길드장님. 잠시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귀 좀….”

내 말에 비서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강철만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등급이 낮은 거라면 오히려 저희 길드가 이득입니다. 잘 뜨지 않긴 하지만 F급 미해결 던전의 입찰권은 3억 원도 안 되니까요.”

다 들린다 이놈들아.

사실 금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저들의 말대로 미해결 던전에 들어가는 건 보상금을 선택하는 것보다 손해일 수 있다.

아무리 미해결 던전이라고 해도 등급이 낮다면 드랍템 역시 가치가 높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게 지금 중요한 것은, 돈이나 아이템보다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업적의 클리어였다.

돈이야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미해결 던전은 새로운 던전이 뜰 때까지 모니터링을 해야 하고 입찰도 진행해야 하는 등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다행히 강철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죠. 대신….”

조금 성가신 조건이 붙었다.

“저랑 같이 갑시다, 미해결 던전.”

* * *

“이게… 이규진과 강두식을 처치한 녀석의 프로필이라고?”

“그렇습니다. 지부장님. 헌터청에 심어둔 정보원을 통해 몰래 빼낸 것입니다.”

성북동의 한 대저택.

루미나스의 지부장이 비서가 건네준 서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 한상우, 나이 30세, 헌터 등급 B급.

스탯은 C급 헌터정도지만 A급 헌터 수준의 스킬을 보유 중.

특이 사항으로는 F급으로 판정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등급 재심사에서 B급으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만약 일반적인 길드장이 봤다면 흥미를 가지며 영입을 추진하라고 했겠지만.

“이게 다인가?”

“예, 그렇습니다.”

“별 볼 일 없군. 알아서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루미나스의 한국 지부장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B급 헌터 이규진을 처치했다기에 그 이상의 등급일 거라 예상했는데 프로필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실망한 건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제1 진행팀장과 제1 지원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에이, 시시하네. 재미없겠어.”

“난 또 무슨 희대의 천재가 나타난 줄 알았네.”

둘 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프로필을 훑어볼 따름이었다.

그 모습에 비서가 일침을 놓았다.

“이번 임무의 목적이 유흥이 아니라 열쇠 조각 회수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죠?”

“큭큭, 그건 기본입니다.”

비서의 말에 진행팀장이 웃으며 대꾸했다. 지원팀장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진행팀장, 어떻게 처리할래? 납치, 암살, 주거 공간 무단 침입, 동료로 위장한 다음 배신하기 등등. 방법은 많아. 네가 선택하면 내가 지원할게.”

“뭐가 좋을까. 가장 잡음이 없는 건 던전에서 처치하는 건데, 이규진과 비슷한 수법이라 경계가 심할 것 같고…. 던전 출입 명부를 보니 주로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네. 좀 특이한데? 파티를 맺은 적이 거의 없어.”

등 뒤로 대검을 멘 진행팀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한상우의 특징을 브리핑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보통 던전의 등급이 오를수록 변수가 많아져 점점 파티를 맺는 경우가 늘어나는데, 한상우는 F급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 혼자 사냥한 것이었다.

조금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비서와 지원팀장은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흔치 않긴 하지만 아예 없는 케이스는 아니죠.”

“맞아요. 집안이 빵빵해서 아이템 왕창 두르고 혼자 경험치 독식하는 헌터야 가끔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솔플하는 놈들은 보통, 일반적인 헌터보다 강한 경우가 많은데 쉽게 열쇠 조각을 뺏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얘기에 진행팀장이 다시 의문을 표했다.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는 신중함이었는데 그 모습에 비서가 ‘풉!’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분은 앞서 임무를 실패한 두 사람보다 더 강하잖아요? 부하들도 대동할 수 있으니 훨씬 수월하겠죠.”

“비서님 말씀이 맞아. 이규진과 강두식은 기껏해야 B급과 C급이었지만 우린 A급인 데다 팀원들도 있으니 양과 질적인 면에서도 차원이 다르지.”

“잠깐, 그 ‘우리’에, 저까지 포함된 건 아니겠죠?”

“하하, 당연하죠 비서님! 지부장님의 총애를 받는 비서님의 실력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부장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는 그녀의 랭크는 S급.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그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얘기가 길어지면 삼천포로 빠진다고 하던가.

두 여인이 수다 떠는 모습에 진행팀장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본론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좋아, 그럼 당장 집으로 쳐들어 가자고. 어차피 혼자 사는 놈 같은데 자는 동안 쓱싹하면 바로 해결될 거야!”

쿵-!

진행팀장이 등에 멘 대검을 바닥에 찍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비서와 지원팀장의 호응을 얻진 못했다.

“저런…. 위험도가 너무 큰 작전이네요. 잘못하면 디바인 실드처럼 귀찮은 놈들이 냄새를 맡을 수도 있어요.”

“맞아. 비서님 말씀대로 대놓고 처리하는 건 위험해. 이규진과 강두식 때문에 경계도 삼엄해졌을 거고, 다른 곳에서 주시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럼 어쩌자는 거야?”

두 사람의 태클에 진행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보니까 외곽 지역 던전을 자주 가네. 그럼 미행을 하나 붙인 다음….”

지원팀장이 프로필에 붙은 한상우의 사진을 보고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깜짝 파티를 해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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