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키운 캐릭터로 레벨업-30화 (30/169)

제30화

4장 인연은 바람을 타고(5)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오래전부터 강철만은 그런 생각을 해왔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변혁으로 세상이 바뀐 직후였나, 아니면 끝없이 많은 몬스터를 잡아 SS급 헌터가 되고 나서였나.

이유도, 계기도 알 수 없었지만 강철만은 노력이 좋았다.

몬스터를 잡아 레벨업을 하는 것도 즐거웠고, 레이드를 해서 길드를 키우는 것도 재밌었다.

세상이 바뀐 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레벨이나 스탯으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레벨업! 성장!

강철만은 그 재미에 빠져 SS급 헌터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등급이 오르고, 돈과 명예가 쌓이면 레이드를 뛰지 않는 헌터도 많지만 강철만은 항상 선두에 서서 몬스터를 처치했다.

성장의 즐거움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몸을 던전으로 이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에 대한 찬양은 현실뿐만 아니라 가상에까지 이어졌다.

현실에서 SS급 헌터가 됐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하이어란 게임에 들어가 기어이 랭킹 1위를 찍고 말았다.

그야말로 성장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정상에 오르고 나니 새로운 재미에 눈이 뜨였다.

쪼렙 키우기.

레벨이 낮은 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아니, 굳이 저레벨이 아니더라도 열악한 환경에서 악착같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즐거움과 동시에 도와주고픈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지금, 길드장 사무실에서 하고 있는 게임만 해도 그랬다.

<수호 기사 랭킹>

-1위 헌터맨

-2위 땡길거야

…….

‘흠, 열심히 쫓아오네. 아직 날 따라잡으려면 멀었지만.’

땡길거야.

원래 수호 기사 랭킹 1위였지만 자신의 캐릭터, 헌터맨이 종결템을 맞춘 이후엔 2위로 밀려난 캐릭터다.

오랜만에 땡길거야의 캐릭터 정보창을 보니 2위로 밀려난 후에도 악착같이 노력해서 강화를 따라잡고 종결템을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확률에서 미끄러지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나 돈이 많은 건 아닌지 재료템 수급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사실, 강철만의 방법이 무식한 것이었다.

게임의 캐릭터 하나에 수십억 원을 때려 박다니.

남들이 본다면 미쳤다고 할 테지만 강철만은 별 상관없었다.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아신 길드의 길드장인 그에게 수십억 원 정도는 어렵지 않게 벌 수 있는 돈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따라잡기 위해 시간을 들여 악착같이 노력하는 땡길거야의 모습.

그걸 보고 있자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격차가 벌어지면 더 많이 노력하겠지?’

이유야 어찌 됐건 상대가 자신을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희열이 느껴졌다.

강철만은 이 기분을 좀 더 오래 느끼고 싶었기에 다시 현질을 강행, 종결템의 강화 수치를 한 단계 높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확률이 워낙 극악이라 억 단위의 돈을 현질하고도 실패한 것이다.

“어휴, 망겜이 따로 없네.”

아무리 돈이 썩어 넘쳐도, 그 돈이 휴짓조각이 되는 걸 보면 좋은 소리가 나올 수가 없었다. 1등을 차지하려고 했을 때처럼 꼭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도 없었고.

강철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책상 위로 핸드폰을 휙 던졌다.

그런데 그때, 다행히 기분을 풀어줄 만한 소식이 들어왔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길드장님, 방금 미해결 던전을 입찰받았습니다. 등급은 B급이며 위치는 남양주 천마산입니다.”

아신 길드의 비서실장 남희건이 들어와 보고한 것이다.

“오, 진짜요? 스케줄 비우고, 한상우 헌터한테도 연락하세요. 당장 출발하죠!”

“안 그래도 그렇게 진행한 상태입니다. 국회의장과 있던 점심 약속은 취소했고, 한상우 헌터와 레이드 예정 시각을 맞췄습니다. 두 시간 뒤로요.”

“하핫, 역시 우리 비서실장님, 제 마음을 잘 아신다니까요? 보너스 챙겨 드려야겠어요.”

비록 하이어에서 강화는 실패했지만, 현실에서 더 재밌는 일이 생겼다.

헌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뉴비 키우기!

강철만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럼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아,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레이드하는 동안 비서팀 회식이나 하세요. 특별 반차입니다.”

“예? 길드장님을 보좌하는 게 저희 일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등급도 B급이면 낮은 편이고, 어차피 미해결 던전은 한상우 헌터랑 둘이 들어가기로 했으니까요. 던전 밖에서 기다리면 할 일도 없을 텐데 그냥 자유를 즐기세요. 이런 일 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좋은 일이 생겨서 그런지 강철만은 비서실장 남희건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었다. 최근 일이 많아져, 비서실이 휴일도 반납하며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주는 휴식이었다.

기회가 왔을 땐 덥석 잡아야 하는 법.

남희건은 꾸벅 인사하며 길드장이 주는 반차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차는 지하 주차장에 있으니 거기까지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재밌게 노세요. 걱정하지 말고 법인카드 긁으시고요!”

강철만은 남희건에게 신신당부한 뒤 주차장으로 이동, 차를 타고 입찰받은 미해결 던전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등장한 슈퍼루키야. 입단 추천을 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잘 시간도 부족하다는 대형 길드의 길드장과 B급 헌터의 동반 레이드.

그걸 먼저 제안한 강철만에게 의도가 없을 리가 없었다.

강철만은 이번 레이드를 통해 한상우의 자질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과연, 영입할 만한 인물일 것인가.

오랜만에 등장한 신인에 강철만은 콧노래를 부르며 미해결 던전 앞까지 차를 몰고 갔다.

그런데.

“오, 한상우 헌터! 미리 와 있었네요?”

“반갑습니다. 길드장님도 일찍 오셨군요.”

한상우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사전에 조율했던 레이드 예정 시각까지 30분이나 남았는데, 이미 도착해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것이다.

‘성실한 느낌이야. 기본이 되어 있어.’

아직 레이드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 흡족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한 길드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이렇게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은 최소한 중간은 할 거라는 신뢰가 생겼다.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군요. 자, 그럼 레이드를 시작해 볼까요?”

“좋습니다.”

한상우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졌다.

강철만은 앞장서서 균열 앞으로 걸어갔다.

포탈은 새로 생긴 던전을 뜻하는 노란색이었다. 이제 두 사람이 진입하면 검은색으로 바뀔 것이고, 클리어하면 던전의 특성에 따라 포탈이 남거나 아예 소멸할 것이다.

“미해결 던전은 처음이죠? 먼저 진입할 테니 따라오세요. 바로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르니 전투 준비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고인물은 뉴비가 놀라지 않도록 자세하게 설명해야 하는 법.

강철만은 친절하게 미소를 지은 뒤,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화아아악-!!

[B급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여 던전을 클리어하세요.]

메시지가 떠오르며 풍경이 바뀌었다.

산골짜기에서 사막으로.

그런데 변한 건 배경뿐만이 아니었다.

“키키륵!!”

쐐애애애액-!!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과 함께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쇄도해왔다.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매복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미리 전략을 짜놓은 듯 앞에서는 도마뱀 전사들이 달려들고, 뒤에서는 화살이 날아오는 상황.

미리 대비를 하더라도 당할 수밖에 없을, 무시무시한 협공이었지만.

“훗, 깜찍하네.”

강철만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기습을 받아쳤다.

뒤에서 앞으로, 대검을 크게 휘둘러 일으킨 검풍으로 화살과 도마뱀 전사들을 동시에 베어버린 것이다.

한 차례 습격을 막은 후, 강철만은 주위를 둘러봤다.

사막 한가운데, 등 뒤로는 망루 대여섯 개가 솟아있고, 앞으로는 리자드맨처럼 생긴 전사 100여 마리가 진영을 잡고 서 있었다.

‘일반적인 섬멸형 던전인가 보네. 첫 기습만 막으면 어그로는 끌리지 않는 것 같고…. 몬스터들은 B급 중에서도 약한 편에 속하는군.’

강철만은 빠르게 전장과 던전의 특성을 파악했는데 그 사이, 한상우도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시작부터 화끈하네요.”

“이런 게 미해결 던전의 묘미죠. 한상우 헌터는 망루를 맡아주세요. 앞의 녀석들은 제가 처치할 테니. 자, 시작합시다!”

강철만은 빠르게 명령을 내린 뒤, 땅을 박차 전략을 실행하려 했다.

그런데.

“음? 왜 안 움직이세요?”

한상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 몬스터가 깔려 있고, 강철만이 브리핑도 했건만 전투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전투 준비가 무엇인가.

팔짱을 낀 채 무기도 꺼내지 않고 느긋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저도 같이 사냥하는 거였나요?”

“예? 그게 무슨….”

“길드장님께서 먼저 같이 미해결 던전에 들어가자고 하셨잖습니까. 그거, 쩔 해준다는 뜻 아니었습니까?”

쩔.

게임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고레벨 유저가 저레벨 유저의 사냥을 도와주는 것을 뜻한다.

사실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정보가 없어 일반 던전보다 더 위험한 신생 던전에 등급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사람이 온다는 것 자체가, 고등급 헌터가 알아서 다 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모든 싸움을 강철만 혼자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강철만이 같이 던전에 들어온 목적은 한상우의 실력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들어왔는데…. 일단 저는 잠시 뒤에서 적의 패턴을 보고 있을 테니,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하세요. SS급 강철만 헌터님.”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강철만은 무어라고 해명하려고 했으나, 단호박 그 자체인 한상우의 눈빛을 보니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뉴비 키우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삐끗한 느낌이었는데, 그럼에도 강철만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에이, 설마 진짜 하나도 안 싸우겠어.’

주변에 몬스터가 많은 데다 자신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SS급 헌터이자 대형 길드의 길드장이다.

한상우도 굳이 밉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싸우면 한상우도 반드시 합류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흐읍!!”

“샤라아악!!”

[사막의 도마뱀 전사(B)를 처치했습니다.]

[사막의 도마뱀 궁수(B)를 처치했습니다.]

강철만이 전사들의 진영과 망루를 넘나들며 전투를 벌였지만.

‘진짜 안 싸우잖아!’

한상우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것이다.

혹시라도 레이드가 진행되면 생각이 바뀔까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몬스터가 끝없이 쏟아지고, 강철만의 처치 몬스터 수가 300마리가 넘어가도 한상우는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저 가끔 뒤에서 강철만의 활약이 멋지다는 듯 박수만 칠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강철만의 인내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저기, 한상우 헌터? 슬슬 몬스터 좀 잡는 게 어때요?”

“아… 그렇군요. 도와드리겠습니다. 힘드신가 보네요.”

혼자서 한 시간도 넘게 쉬지 않고 싸웠는데 그걸 말이라고…!

강철만은 이마 위에 핏줄이 서는 걸 느꼈지만 표출할 순 없었다.

한상우의 말을 인정하기엔 도무지 SS급 헌터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철만은 입만 웃는, 영혼 없는 미소로 한상우의 말을 받아쳤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연습 차원에서 권하는 겁니다. 모름지기 헌터라면 다양한 전투를 통해 실전 감각을 살려야 하니까요.”

“음,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알겠습니다, 보스 몬스터는 제가 혼자 상대하기 힘들 것 같으니 이제부터 보스 방 입장 전까지 남은 몬스터들은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됐다!

강철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한상우의 실력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침 저 멀리 모래 언덕 위에 중간 보스처럼 보이는 도마뱀 전사가 서 있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몸집도 더 큰 데다 무기도 검이나 활이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있었다.

“천천히 따라오세요.”

한상우는 강철만을 뒤로한 채 도끼를 든 도마뱀 전사에게 달려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놓치지 않고 평가하리라!

강철만은 눈을 부릅뜨고 한상우의 전투를 관찰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쿵-! 서걱-!

“캬라악….”

분명 달려가서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중간 보스 격인 몬스터가 죽은 것이다.

‘뭐지? 저렇게 쉽게 죽을 녀석이 아닌데?’

강철만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본 결과, 일반적인 B급 헌터라면 적어도 최소한 십수 합은 겨룰 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상우의 일격에 소멸됐다.

그것도 중간 보스처럼 보였던 녀석이 말이다.

‘혹시 내가 잘못 봤나? 이번엔 자세히 봐야겠어.’

강철만은 이어질 한상우의 전투를 주시하기 위해 비빈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몬스터였다.

“이런… 이거 어떡하죠? 더 잡고 싶었는데 이게 끝이네요.”

“예? 그게 무슨….”

한상우의 뒤를 따라 모래 언덕 위로 올라갔지만.

“…….”

더 이상 잡을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아쉽네요. 그래도 길드장님의 전투를 볼 수 있어서 큰 배움이 됐습니다.”

아쉬움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한상우의 말투.

‘낚였다…!’

강철만은 한상우의 등 뒤에 나타난, 보스 방과 연결된 포탈을 보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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