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4장 인연은 바람을 타고(8)
“저 녀석이 어느 틈에…!”
갑작스러운 한상우의 등장에 황대건과 루미나스 헌터들이 이를 갈았다.
던전 포탈에서는 아무런 징조도 없었는데, 어느새 한상우가 진형의 후방에서 나타나서 사령탑이라 할 수 있는 지원팀장과 현장 책임자를 습격했다.
루미나스 입장에선 최악인 상황.
그나마 다행인 건 지원팀장 민수아의 목숨이 붙어 있고, 주변에 루미나스 헌터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이었다.
“제길!”
“쳐라!!”
민수아는 짧은 거리의 그림자 위로 순간 이동하는 스킬, [그림자 이전]을 시전해 도망쳤고 루미나스 헌터들은 한상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전장의 분위기는 이미 반전된 뒤였다.
“이런…. 날 무시하면 안 되지.”
“막아!!”
콰아아아앙-!!
“으헉…!!”
진행팀장 황대건과 루미나스 헌터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강철만이 포위망을 뚫고 후방 진형까지 돌격했다.
공중에 흩날리는 피와 부러진 칼날들.
한 차례 굉음과 괴성이 난무한 후, 한상우의 옆엔 강철만이 다가와 있었다.
“지원 타이밍이 적절한데요? 언제 나온 겁니까?”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한상우 헌터는 숨기는 게 많네요.”
사실 비밀이랄 것까진 없었다.
한상우는 그냥 정석대로 아이템을 주운 후, 포탈을 나왔을 뿐이니까.
단지 그 타이밍이 강철만과 루미나스의 격돌로 인해 주변이 흙먼지로 자욱한 때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던전을 나온 직후, 한상우는 재빠르게 아무도 없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겨 사태를 주시했다.
강철만과 함께 있는 이 타이밍에 습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짐작이 가는 이들은 있었다.
루미나스.
음지에서 활동하는 어둠의 조직답게, 끄나풀이던 이규진과 강두식의 복수를 위해 자신을 찾아왔는데 우연히 강철만이 먼저 포탈을 나오면서 격돌한 듯했다.
한상우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적들의 수는 월등히 많고, 이쪽은 자신이 가세한다 해도 지원이 오기 전까지는 두 명뿐.
한상우가 가세해 말단을 몇 명 더 죽이는 정도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상대가 이규진 때처럼 몬스터화 한다면 오히려 발목을 잡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확실히 수뇌부를 기습해 쓰러트릴 수 있는 타이밍을 노리기로 했다.
문제는 강철만이 수뇌부를 기습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는 것이었는데, 명색이 SS급 헌터라 그런지 오히려 루미나스를 압박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던 중, 한상우가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찾아왔다. 수뇌부 중 하나로 보였던 대검을 든 거구의 사내가 강철만에게 직접 쇄도한 것이다.
한상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캐릭터 소환 : 제장이]
[제장이를 소환하여 꼬마 대장장이의 축복이 활성화됩니다.]
[패시브 스킬 : Lv 2. 꼬마 대장장이의 축복 – 꼬마 대장장이를 소환할 시, 각인된 아이템의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소리 내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도록 해.’
-예, 군주님.
수뇌부를 습격하려면 좀 더 강해야 할 것 같았기에 울창한 수풀 사이에서 제장이를 소환한 뒤, [꼬마 대장장이의 축복]으로 화산검과 화산방패의 능력을 상승시켰다.
그리고.
적의 사각지대로 이동하는 [침투]를 사용해 단번에 수뇌부의 뒤를 잡았다.
이건 강철만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압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이용을 했다고도 볼 수 있기에 빈정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강철만은 가볍게 농담까지 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비밀이 많은 사람은 멀리하라던데 한상우 헌터는 특별히 넘어가겠습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고마워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가는 건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언젠가 일어날 일이기도 했고요.”
“저도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몬스터를 잡아도 모자랄 판국에, 같은 인간을 노리는 저런 말종들은 쓸어버리는 게 낫거든요.”
결과가 좋아서 그런 걸까.
한상우와 강철만은 자세를 잡으며 화기애애하게 덕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현장 책임자가 죽고 민수아가 부상당하긴 했지만 루미나스도 기세에선 밀리지 않았다.
황대건이 대검을 고쳐 쥐며 소리쳤다.
“운 좋게 기습이 한 번 통한 것 가지고 기세등등하군. 기껏해야 B급 헌터가 추가된 것뿐이다! 모두 총공격 개시!!”
“예, 알겠습니다!!”
한상우가 나타나긴 했지만 조금 전까지 강철만을 압박했던 루미나스였다.
원래 목적이었던 B급 헌터 한상우와 체력이 상당히 소모된 강철만. 둘을 모두 처리한다면 이 이상의 성과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황대건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명령을 내렸다. 황대건이 명령하자 루미나스 헌터들도 사기를 끌어올리며 승리를 예감했다.
두 사람을 향해 쇄도하는 수십 개의 신형.
강철만이 양손으로 대검을 쥐며 한상우에게 물었다.
“상대할 수 있겠어요? 버거우면 제 뒤에 숨어 계시고요.”
“그건 제가 하려던 말인데요. 힘들면 제 뒤로 오세요.”
수십 명의 적이 달려드는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은 여유가 넘쳤다.
루미나스 헌터들이 눈이 뒤집히는 건 당연지사였다.
“감히 잡담이나…!”
“죽여!!”
검과 창, 도끼 등 수십 개의 무기가 서슬 퍼런 빛을 발했다.
더불어.
우우우웅-! 콰과과과과-!!
각종 스킬이 난사됐다.
검풍부터 불꽃, 전기까지.
파괴력이 세진 않았지만 인원이 많은 만큼 각양각색의 스킬이 한상우와 강철만을 향해 쏟아졌다.
그대로 타격당한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공격들.
그러나 두 사람이 쉽게 당해줄 리는 없었다.
“흥, 가소롭군.”
강철만은 대검을 휘둘러 루미나스 헌터들보다 더 강한 검풍을 날렸고, 한상우는 화산방패를 들어 [용암 전개]를 사용해 방어 범위를 넓혔다.
그 결과.
“크헉!”
“끄아아아악!!”
당하는 것은 루미나스 헌터들이었다.
앞선 루미나스의 합동 공격보다 더 강력한 강철만의 검풍이 루미나스 헌터들의 팔과 다리, 옆구리 등을 찢어버린 것이다.
더불어 한상우도 화산방패로 한 차례 공격을 막은 후, [분화]로 응수해 반격을 날렸다.
이것만 해도 루미나스 헌터들의 전력은 크게 약화됐는데, 더 큰 피해는 그 뒤에 다가왔다.
원거리에서 공격을 주고받은 후에 근거리로 전투의 양상이 옮겨갔는데, 대다수가 강철만의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서거나 쓰러진 것이다.
심지어.
“크윽!”
“뭐야, B급이라면서!”
“망할! 누가 어떻게 좀 해봐!”
한상우의 실력도 발군이었다.
사방에서 루미나스 헌터 대여섯 명이 일시에 덮쳐도 화산방패로 막아내고, [반월베기]로 피해를 입히며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수십 명의 루미나스 부대가 단 두 명의 헌터에게 깨지고 있었다.
그러자 뒤에서 병력을 지휘하던 황대건이 대검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작전을 변경한다. 한상우에게 화력을 집중, 열쇠 조각 회수를 최우선 목표로 한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황대건의 말에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지혈하고 있던 민수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황대건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강철만과 한상우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너도 당해서 알 텐데. 저 둘을 전부 잡긴 힘들 것 같으니 목적만 달성하고 나오자는 뜻이다. 애초에 우리의 목표는 강철만이 아니라 한상우, 저 녀석이 들고 간 열쇠 조각이니까.”
“……!”
나지막한 황대건의 얘기에 민수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 황대건이 사실상 패배를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무를 숭상하는 루미나스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뜯겨나가는 소리였는데 민수아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저 둘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후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민수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 조각을 회수하면 도주 루트를 열도록 할게.”
“그럼 다녀오지.”
그 말을 끝으로 황대건은 주머니에서 강화 물약을 꺼내 마신 후, 한상우를 향해 쇄도했다.
이전에 비해 훨씬 빨라진 돌격 속도.
“흐아아아앗!!”
황대건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한상우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한상우는 루미나스 헌터들의 협공을 막느라 마침 뒤가 무방비한 상태였다.
그런데 기습이 성공하려던 찰나.
까아아앙-!!
무언가 황대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내 동료를 괴롭히려면 나를 넘고 가야지.”
강철만.
방금까지 저 멀리 있던 아신 길드의 길드장이 단숨에 날아와 황대건의 기습을 막아낸 것이다.
더불어.
“그런데 아까보다 조금 더 세진 것 같은데…. 너도 ‘그걸’ 마신 거냐?”
황대건을 보며 이죽거렸다.
이전보다 공격력이 몇 배는 더 강해졌는데, 고전하거나 놀라기는커녕 도핑하고도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듯 비아냥거린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황대건의 자존심을 넘어 열등감까지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감히…! 템빨로 SS급 헌터가 된 주제에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템빨이라니, 서운하게.”
후우우웅-! 쿵-! 쾅-! 콰아앙-!!
황대건은 볼에 루미나스의 표식까지 띄우며 대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가진 힘을 극한까지 끌어내 강철만을 공격한 것이다.
서걱-! 퍽-!
황대건은 대검을 단검 휘두르듯 가볍고 크게 휘두르며 강철만을 몰아붙였다.
속도와 힘 모두 이전의 황대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었으나.
‘단조롭다.’
SS급 헌터와의 격차는 상상 이상이었다.
가진 힘을 전부 끌어낸 공격은 오히려 단조로워졌고, 강철만은 대검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궤도를 완전히 틀어버렸다.
주변의 잡졸을 한상우가 일당백으로 상대하고 있었기에, 앞에서처럼 다른 공격을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유효타 없이 반복되는 공격은 결국 큰 빈틈을 만들었고, 반격마저 허용하고 말았다.
쿠우웅-!!
“크헉!!”
황대건은 옆구리를 베이고, 발로 복부를 걷어차여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강철만의 옆으로 다가온 한상우가 감상평을 내놓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딱 그 꼴이네요. 처리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고생은 한상우 헌터가 했죠. 그런데 정말 B급 맞습니까? 제 생각에 저 정도를 상대하려면 최소한 A급은 되는 것 같으신데요.”
“…최근에 측정했으니 맞을 겁니다. 저 녀석들이 너무 약한 것 아닐까요?”
한상우는 그렇게 둘러대면서 내심 강철만의 실력에 감탄했다.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을 때야 워낙 힘의 차이가 컸고, 시간을 들이면 분명 한상우도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루미나스는 한상우 혼자였다면 땡길거야를 소환하지 않는 이상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둘은 소탈하게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 황대건이 간신히 쓰러진 몸을 수습하고 주위를 돌아봤다.
“으윽….”
“이게 SS급 헌터…?”
“무리야, 절대 못 이겨….”
가면을 쓴 루미나스 헌터들이 곳곳에 쓰러져 자조 섞인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때였다.
쓰러진 루미나스 헌터 중 한 명이 황대건의 이성이 끊어지는 발언을 내뱉었다.
“역시 A급 헌터가 SS급 헌터를 이길 수는 없나 보네.”
들리지 않게 조용하게 한 말이었지만, 아쉽게도 강화 물약을 마신 황대건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 말을 들은 직후, 황대건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걱-! 툭-!
해당 발언을 한 루미나스 헌터의 목을 베어 버리더니 녀석의 품에서 강화 물약 예닐곱 개를 꺼내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루미나스 헌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진행팀장님…!”
우드득-! 콰드드득-!!
“크아아아아악!!”
강화 포션을 털어 넣자 괴성과 함께 황대건의 몸이 들쭉날쭉하며 점점 부풀어 올랐다.
그러자.
“저 미친놈이…! 전원 퇴각! 임무 포기하고 퇴각한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수아가 조금 전과 다르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
살아남은 루미나스 헌터들도 재빠르게 포위망을 해제하며 산속으로 도주했다.
물론, 그걸 가만두고 볼 강철만이 아니었다.
“어딜…!”
말단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강철만은 스킬을 써서 이동하려는 듯 희미해지는 지원팀장의 신형을 향해 땅을 박찼다.
그런데 그 순간.
“크롸아아악!!”
웬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철만은 서둘러 머리 위로 자신의 대검을 들어 올렸다.
쩌어어어엉-!!
‘크윽, 무슨 힘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충격파가 너무 강해 공격을 막아냈지만 신발이 땅에 파묻힐 정도였으니까.
강철만은 고개를 들어 기습을 감행한 인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대해진 체구, 전신에 새겨진 루미나스 문양과 머리 위에 뜬 인식표.
[광기의 도살자 황대건(S)]
황대건이 몬스터로 변해 있었다.
‘뭐지? 인간이 몬스터로 변한 건가? 아니면 몬스터가 인간인 척하는 건가?’
순간, 강철만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껏 수많은 적을 상대해 왔지만, 인간이 몬스터로 변한 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한 건 외형뿐만이 아니었다.
쾅-! 쾅-! 콰아아앙-!!
“으윽…!!”
강철만이 황대건의 대검을 억지로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으나 더 큰 공격을 감행해왔다.
우우우우웅-!!
몬스터 황대건이 마나를 모으더니 무기의 크기를 키우는 스킬, [거대화]로 멀리 떨어진 강철만을 향해 그대로 대검을 내리찍은 것이다.
강철만은 서둘러 방어 스킬을 사용하려 했다.
황대건의 대검에서 빛이 나오는 걸 보니 단순히 크기만 커진 게 아니라 닿는 즉시 폭발이 일어날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빌어먹을, 마나가…!’
방어 스킬을 사용하려던 찰나, 마나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조금씩 아껴 쓰고 있던 게 방금 있었던 충돌로 모두 소진된 것이다.
임기응변을 발휘하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 숙여요!”
강철만의 앞으로 한상우가 나타나 방패를 치켜들었다.